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8화
제 326 장 종남조신(1)
종남산의 아침은 언제나 신선하다.
오늘은 유달리 공기가 맑고 쾌청한 날이었다.
전풍개는 잠시 창괄한 하늘을 올려보다가 문득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가슴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초가보와의 혈전 당시에 현음상인냉구유의 현음강기에 당한 상처가 아직도 완전하게 낫지 않은 탓이었다.
제갈외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로도 완치시킬 수 없을 만큼 현음강기의 후유증은 지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현음강기 자체가 워낙 음독한 것이어서 골수에 파고든 음기를 완전히 뽑아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전풍개의 몸이 전성기처럼 젊고 회복이 빠르지 않다는 게 더컸다.
그래서 날씨가 춥거나 오늘처럼 공기가 차가운 날이면 전풍개는 늘 가슴 부위에 시큰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전풍개는 그것조차도 처절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생각하고기꺼운 마음으로 감수했으나,오늘은 유난히 공기가 맑고 차가워서인지 가슴 부위의 통증이 평상시보다심한 것 같았다.
한동안 가슴을 문지르던 전풍개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려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풍개는 그 사람이 소지산임을 알아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게냐?”
소지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전풍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슨 일이냐?”
“노 사숙께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전풍개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젠 이 늙은 사숙을 찾아올 시간도 없다는 말이지?”
전풍개가 비아냥거렸으나,소지산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장안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노 사숙께서 직접 움직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모양입니다.”
전풍개의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설마 바깥출입도 못 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단 말이냐?”
“직접적인 위해는 없었지만,상대가 상대다 보니 노 사숙께서 행동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누구인데 세상 무서운 줄모르던 그놈이 몸을 사린단 말이냐?”
“검단현이란 자입니다.”
소지산의 말에 전풍개의 표정이 홱변했다.
“검단현? 철혈매화 검단현이 화산을 내려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풍개는 사나운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그 죽일 놈이 결국 다시 나타났군. 그놈을 내려보냈다는 건 화산파에서 이번에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려 한다는 뜻이겠지?”
소지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그가 부인하지 않은것은 묵언의 시인이나 마찬가 지였다.
그만큼 종남파 고수들에게 검단현은 금기시되는 인물이었다. 종남파를 멸문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다 영어(國圖)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다시 되살아나 화산파의 선봉에 섰으니 종남파 고수들로서는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전풍개의 눈에 한 줄기 불안한 빛이 어른거렸다.
“그 녀석이 잔머리가 많고 수단이 좋기는 하지만,검가 놈에 비하면 무공이 현격히 떨어지는데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소지산은 침묵을 지키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자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지산은 검단현에 대해서는 임장홍이 살아있을 때부터 몇 차례 말을 들었지만,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가 장안의 화산파 고수들을 지휘하는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후 그에 대해 수소문했지만,워낙 오래전에 활약했던 인물인지라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다만 검단현이 활동할 당시에 서안은 물론이고 섬서성일대에서 철혈매화라 불리며 무서운명성을 떨쳤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당시 검단현은 악랄하리만치 집요한 성격과 치밀한 일 처리,그리고 잔혹한 손속으로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런데 지금 전 풍개의 반응을 보니 그의 무공 또한 놀라운 수준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십 년 전에 전풍개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할 정도의 고수였다면 지금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을지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고,강자를 꺾고 싶다는 호승심이기도 했으며,묵묵히 수련에만 힘써온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함이기도했다.
전풍개는 생각에 잠겨 있는 소지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소지산은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었고, 의복 또한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으며, 피부도 탄력이 있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추레하고 헝클어진 모습과는 딴판이어서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하나 전풍개는 그의 본령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도 소지산은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메우기 위해서 불편한 한쪽 팔을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고,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매시간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검에 대한 열정은 전풍개가 지금까지 보아온 누구 못지않았으며,그에 따라 무공의 진경 또한 눈부실정도였다.
지금의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은 모두 그의 정혼녀인 방취아가 매일 아침마다 극성스러울 정도로 꾸며주었기 때문이었으며,그녀가 아니었다면 소지산은 지금도 남루한 옷을 입고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무공을 익히는데 자신의 모든 심력을 아낌없이 바치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노해광이 비밀리에 찾아왔다 간 후에는 내공의 상승 또한 두드러질 정도여서 전풍개조차도 지금은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꾸준히 앞을 향해 정진해 온 그를 옆에서 줄곧 지켜봐 왔기에 그에 대한 전풍개의 믿음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전풍개는 희미하게 싹터올랐던 불안감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이 녀석이라면 검단현,그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빠르게 마음을 추스른 전풍개는 이윽고 소지산을 향해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노해광이 무어라고 서신을 보내왔느냐?”
“노 사숙께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본 파의 경계를 좀 더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만약의 사태라……. 하긴 검단현,그 미친놈이 수틀리면 무슨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지.”
지금까지 서안에서의 싸움은 철저하게 노해광과 화산파의 대리전 형상이었다. 종남파에서도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았고,화산파 또한 은밀히 고수들을 지원해줄지언정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나 검단현이 전면에 나선 이상언제 그들이 종남파를 향해 검을 휘둘러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검단현은 그만큼 과격하고 거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화산파에서 그런 그를 중용했다는 것은 종남파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응방식을 바꾸겠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말은 없었느냐?”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시더군요.”
전풍개는 나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녀석이 하는 게 다 그렇지. 아무려면 화산파를 상대하는 데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리리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바보 같은녀석.”
소지산은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고 있는 전풍개를 조용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물었다.
“노 사숙께 답신을 보내려 하는데,특별히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전풍개는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본 파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라. 어차피 화산파와는 언제고 한 번은 부딪힐 일이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풍개는 문득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노해광이 서신을 보내온 자가 누구냐?”
“지일환이라는 자입니다.”
전풍개의 뇌리에 압삽하게 생긴 쥐눈의 장한이 떠올랐다. 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상로객인지 뭔지 하는 도둑놈 말이냐? 왜 하필이면 그런 놈을 전서 인(傳書人)으로 쓴단 말이냐? 주위에 사람이 그렇게 없단 말이냐?”
상로객 지일환은 눈치가 비상하고 몸이 날래서 중요한 편지를 전하는 일을 맡기기에는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소지산도 그를 몇번이나 보았기에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굳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놈을 불러와라.”
전풍개의 명령에 소지산은 두말하지 않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 났다.
잠시 후 소지산을 따라온 지일환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나 멀리 전풍개의 모습이 보이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전풍개는 힐끔 그를 쳐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냉큼 이리 오지 못하고 뭐하는 게냐?”
그 호통에 지일환은 화들짝 놀라쏜살같이 전풍개의 앞으로 달려와서 넙죽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전 대협.”
제대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지일환의 한심한 모습에 전풍개는 잔뜩 인상을 찜그렸으나 이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장안 일대의 지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지일환은 전풍개가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자신을 쓰윽 훌어보자 전신이 빙굴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어 절로 오한이 일었다.
‘제길. 오늘 일진이 어째 뒤숭숭하다 했더니 이 노괴를 보게 될 줄이야.’
속으로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지일환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남들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제법 자신만만하구나. 요새 몸이 영 찌뿌둥하여 온천을 하고 싶구나.
화청지 말고 쓸 만한 온천이 어디에 있느냐?”
뜻밖의 말에 지일환은 약간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 보았다.
서안에는 몇 개의 온천이 있지만,그 중 어느 곳도 화청지를 능가하는 곳은 없었다. 양귀비가 자주 사용했다고 하여 유명해진 화청지는 위치도 좋고 온천 자체도 거대했지만 황실에서 주로 사용하는지라 일반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전풍개 또한 서안에서 오래 살아온인물이라 온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텐데,굳이 자신을 불러 물어보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풍개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지 자 지일환은 움찔하여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요즘은 수세관과 열천원이 가장 쓸 만하다고 합니다.”
“홈. ‘시름을 씻는다’라……. 수세관이 좋겠군.”
한쪽에서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소지산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수세관을 가시렵니까?”
“그럴 생각이다.”
전풍개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소지산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종남파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전풍개가 갑작스레 온천행을 결심한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더구나 노해광이 일부러 서신까지 보내주의를 당부한 마당에 종남파를 떠나 풍운이 일고 있는 서안으로 출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나 소지산은 전풍개를 말리지 않았다. 굳게 다물어진 전풍개의 입술과 번뜩이는 눈을 보는 순간,아무리 만류한다 해도 그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소지산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너도 가려느냐?”
“당연히 제가 사숙조를 곁에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본 파는 누가 지킨단 말이냐?”
“조금 전에도 노해광이 서신까지 보내 본 파의 경비를 더 힘쓰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본 파를 지키고 있도록 해라.”
전풍개의 천연덕스런 말에 소지산은 표정도 바꾸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방화를 데려가시지요.”
“방화를?”
“얼마 전에 유운검법의 기본노수를 모두 익혔습니다. 이제는 곧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야 하는데,그 전에 온천에서 잠시 심신을 정양하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홈.”
전풍개는 잠시 소지산의 얼굴을 응시했으나, 소지산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전풍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다녀오려 했는데,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어쩔 수 없구나.
방화를 준비시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소지산은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려인사를 하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때 그의 뇌리 속에는 철혈매화 검단현이 장안 동대가의 어딘가에 숨어서 화산파의 고수들을 암중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수세관은 그 동대가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