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9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9화


제 326 장 종남조신(2)

방화는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차오르자 정신이 맑아지며 기분이 고양되 었다.

그제야 비로소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는 것 같았다.

방화는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전풍개는 특유의 강퍅한 얼굴을 전면에 고정시킨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차갑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응시하는 방화의 눈에는 선망과 존경의 빛이 가득 담겨있었다.

전풍개는 육십이 훨씬 넘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종남파의 누구보다도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고,단 하루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가보와의 격전에서 입은 내상이 완쾌되지 않아 몸이 불편할텐데도 단 한 번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하여 수양에 힘써왔다.

그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줄곧 지켜보아 온 종남파의 제자들이 어찌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입이 거칠고 표정이 싸늘해서 쉽게 다가갈 수는 없어도 종남파를 위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겁고 충실한지는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장문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상태임에도 종남파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내실을 다질 수 있는것도 전풍개가 존장으로서 문파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전풍개와 단둘이 동행하게 되었으니 방화로서는 설레고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자기가 실수하여 전풍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더구나 요즘 장안 일대에서 노해광사숙과 화산파 고수들 사이의 다툼이 점차 심화되어 상당한 사상자가 났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전풍개의 신상에 작은 변이라도 일어난다면 자신은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방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사조님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유난히 준수한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여인의 피부처럼 새하얗고 선이 가는 이목구비 때문에 장승표에게 늘백면서생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몇 달 동안의 고련을 겪어서인지 지금의 방화는 한층더 남자다워지고 씩씩한 소년 무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항상그를 함부로 대하던 서문연상의 태도도 예전보다는 한결 암전해진 것 같았다.

문득 전풍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유운검법의 기본로수를 모두 익혔다고?”

방화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다행히 사부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유운검법은 변화가 무쌍한 만큼응용법이 다양해서 기본식을 얼마나잘 변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양지차를 이룬다. 그러니 그점을 명심해서 변초의 습득에 신경을 쓰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몸을 쉬기 위해 나온 것이니 그렇게 긴장해 있을 필요가 없다. 편안히 있도록 해라.”

“예,태사조님.”

대답과는 달리 방화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모습이었다.

전풍개는 연신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방화를 힐끔거리다가 이내 한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상당한 기운을 지닌자들 몇이 그들에게서 제법 떨어진 곳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종남파를 떠날 때부터 느낀 기운들이었다.

‘수신대라 했던가? 이 녀석 하나를 위해서 저렇게 헌신하다니 참으로 무던한 놈들이로다.’

전풍개의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화를 데려가라고 할 때 짐작하긴 했는데,이토록 노골적으로 따라붙을 줄은 몰랐군.’

수신대는 방화의 부친인 초가보주초관의 수하들로,초관은 초가보가 무너질 때 자신의 의제이며 수신대의 대장인 혈화창 우문화룡에게 유일한 피붙이인 방화를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우문화룡은 방화를 찾아 서안 일대를 뒤지고 다니다가 방화가 종남파에 들어간 것을 알고는 정체를 감춘 채 종남파를 찾아왔고,결국 정체가 드러나자 수신대원과 자신을 거두어 줄 것을 부탁했다.

소지산과 노해광은 고민 끝에 그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문화룡이 노해광을 돕기 위해 서안으로 간 반면에 대부분의 수신대원들은 종남파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방화가 전풍개의 시중을 들기 위해 종남파를 벗어나자 어느새그들 중 상당수가 은밀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지산이 굳이 전풍개에게 방화를 동행하라고 했던 것도 수신대원들이 방화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수신대원들 개개인의 무공은 전풍개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수신대라는 명칭대로 주변의 뜻하지 않은 위협으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하는 역할로는 가히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게다가 전풍개 같은 뛰어난 수준은 아니어도 모두들 상당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어서 위기의 상황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수세관은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온천이었다. 크고 작은 욕탕이 수십 개 있었고,특히 조용히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별실이 여러 채 있어서 서안의 상류층들이 곧잘 이용하고는 했다.

전풍개는 제법 커다란 욕탕이 있는 별실 하나를 얻었다. 방화의 우려와는 달리 온천욕을 즐길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별실은 제법 잘 가꾸어진 작은 정원이 있었고,그 한편에 지붕과 벽을 나무로 만든 욕탕과 옷을 갈아입거나 잠시 쉴 수 있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방화는 전풍개를 지척에서 호위해야 하기에 욕탕 밖의 방에서 대기하려 했으나,전풍개의 재촉에 어쩔수 없이 자신도 탈의를 하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수려한 외모답지 않게 제법 탄탄한 방화의 몸을 보고 전풍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수련한 흔적을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어깨 부위의 근육이 잘 발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방화는 방화대로 전풍개의 노인답지 않은 건장한 몸과 여기저기에 나있는 크고 작은 상처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그 상처의 대부분은 검흔으로, 그중에서도 옆구리에서 아랫배까지 길게 그어져 있는 상처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마치 지렁이가 지나간 듯 손가락 굵기로나 있는 상처는 그 주위가 톱날에 잘려나간 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방화의 눈이 자신의 아랫배 상처에 쏠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전풍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 상처들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이 상처가 궁금하냐?”

방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척 오래된 상처 같은데 아직도 그 흔적이 너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풍개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닌 검객의 검기에 당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상처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이 상처도 이십 년이 훨씬 넘은 것인데,아직도 몸이 허해지거나 기력이 달리면 상처 부위가 아려오곤 하지.”

상처를 따라 손을 움직여가는 전풍개의 표정이 너무나 무거워서 방화는 달리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가 문득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십여 년 전이라면 혹시……

“그래. 이게 바로 사공표의 칠살검에 당한 흔적이다. 이것 외에도 모두 열다섯 군데에 그놈의 검이 후비고 지나간 상처들이 남아 있지.”

전풍개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씹어뱉는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그놈의 칠살검법에 당하면 이렇게 살이 거칠게 잘려진다. 검기 자체에 사람의 몸을 파괴하는 지독한 기운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 그런 검기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날아온다고 생각해 보거라.”

“아……r

방화는 사람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광경을 상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진저리를 쳤다.

전풍개는 그런 방화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앞으로 그런 검들을 상대해야 한다. 네가 뚫고 나가야 할 강호란 곳은 그보다 더욱 사납고 난폭한 놈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나약한 마음을 먹어서는 절대로 그러한 전장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방화의 이마에 땀이 잔뜩 돋아났다. 온천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풍개의 칼날같이 날카로운 시선 아래 몸을 떨고 서 있는 방화는 다시 예전처럼 겁 많고 소심한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전풍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더욱강하고 거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겁이 나면 본산에 처박혀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된다. 장문인의 성격상 일단 받은 제자는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파문하지 않을 테니 언제까지고 본 파의 제자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채 살 수 있겠지. 하나 그것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무인(武人)은 더더욱 아니지. 그리고 나는 그런 놈들을 본 파의 제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릇 무인이란 자신의 검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가 검에 묻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게 강호에서 한 자루 검에 목숨을 내걸고 살아가는 무림인의 숙명이다. 그리고 본 파의 제자라면 당연히 무림인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방화는 이윽고 눈을 감았다. 유난히 기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그의 지금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전풍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冬:??후

S S S

온천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한쪽으로 흘러가는 소리만이 적막한 주위에 조용히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방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똑바로 전풍개를 바라보며 어느 때보다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무림인이 될 겁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당당한 본 파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전풍개는 별빛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는 방화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노부도 그러리라고 믿는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