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10화 (3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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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10화


제 326 장 종남조신(3)

뜨거운 온천욕을 마치고 알몸에 얇고 매끄러운 비단 장포 하나만을 걸 친 채 욕탕 밖의 정원 그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차가운 냉차를 즐기는 것은 별미중의 별미였다.

이때만은 늘 냉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전풍개의 얼굴도 모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방화는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아 붉게 상기된 얼굴로 냉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는데,전풍개의 면전이라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이 있는 정원은 욕탕에서 대청으로 향하는 가운데 공간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었는데,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독특한 운치를 풍기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 늘어선죽림은 제법 울창해서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뿐 아니라,보기만 해도 청량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경관도 좋아서 온천욕을 마친 상쾌한 기분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

방화는 이런 상태로 오후의 한나절을 느긋하게 보내는 것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처럼 마음 편히 쉰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지난 겨울만 해도 집을 뛰쳐나와 뚜렷하게 갈 곳도 없어서 장안 일대를 서성거리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러다 운 좋게 장문인을 만나 종남파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아버지가 세운 초가보와 살 떨리는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싸움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를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밤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거려야 했으며,그것을 잊기 위해서 더욱 무공수련에 미친 듯이 몰두해야만 했다.

숙부인 우문화룡이 찾아온 후에는 그나마 마음속의 부담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으나,그때부터는 사부로 모신 소지산에게서 혹독하리만치매서운 수련을 받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태사조를 따라나선 장안행에서 온천욕을 하고 죽림의 시원한 그늘 아래서 차가운 냉차를 마시고 있으니 그야말로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이런 맛에 온천욕을 하는구나.’

방화는 기회가 되면 사부인 소지산을 모시고 꼭 다시 이곳에 들러보리라 결심했다.

장안의 유월은 무척이나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는 계절인데,온천욕을 하고 죽림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전혀 더운 것을 느끼지 못했다.

쏴아아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죽림을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소나기가 처마를 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방화는 전풍개가 들고 있는 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새로운 잔을 따르려다 주전자가 빈 것을 깨달았다.

“좀 더 드시겠습니까?”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의자에 깊숙이 파묻히듯 앉아서 조는 듯 마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전풍개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이제 그만 가보도록 하자.”

“예,태사조님.”

방화가 무심결에 전풍개를 따라 막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돌연 전풍개가 들고 있던 찻잔을 죽림 쪽으로 집어 던졌다.

땅!

요란한 음향과 함께 그가 던진 찻잔이 때마침 날아온 유엽비수(神P葉匕首)와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공교롭게도 그 박살 난 파편들이 몽땅 유엽비수와 함께 등장한 검은 복면인에게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검은 복면인은 유엽비수를 던짐과 동시에 맹렬한 속도로 죽림에서 뛰쳐나오다 찻잔의 파편 세례에 질겁하고 놀랐다.

“으헛!”

파편의 대부분은 간신히 피했으나일부에 격중 당한 복면인은 한 차례신형을 휘청거리다가 이내 다시 몸을 날렸다. 왼쪽 어깻죽지 부근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지며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왔으나, 복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풍개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안령도?■例刀)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도광이 금시라도 정원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릴 듯했다.

공교롭게도 전풍개와 방화는 모두 장검을 정원 입구에 있는 옷 갈아입는 곳에 두었기에 지금 당장은 알몸에 얇은 비단 장포만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수세관의 별실은 대청을 통해서만 정원과 욕탕으로 들어올 수 있기에 방화도 안심하고 병기를 정원 입구에 벗어놓았는데,죽림을 통해 숨어 들어온 암습자가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전풍개는 이런 일이 일어날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 전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오히려 복면인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파파팟!

복면인이 질풍처럼 안령도를 휘두르자 사방이 온통 번뜩이는 도광에 휩싸여 버렸다. 방화는 금시라도 전풍개의 몸이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아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런 바보 같은…….,

방화는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전풍개가 나서기 전에 자기가 먼저 복면인을 막아섰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벌어진 암습에 당황하여 멍하니 서 있고 말았으니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풍개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유연한 동작으로 복면인을 향해 다가 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토록 매서운 복면인의 칼이 전풍개의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뻔히 눈앞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보면서도 단 일도도 격중 시키지 못하자 복면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현묘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걸음임에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화는 전풍개의 몸놀림이 무엇인지 이내 알아보았다. 종남파 무공의 기본이 되는 장괘장권구식을 펼칠때 사용하는 장괘보(통?卦步0였다.

장괘보는 사실 특별한 보법이라기 보다는 장괘장권구식을 펼칠 때마다 자연스레 밟게 되는 연환보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복면인의 날카로운 공격을 너무도 수월하게 피하고 있으니 방화로서는 새삼 전풍개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풍개가 자신의 지척까지 접근하자 복면인은 다급한 눈빛으로 더욱맹렬히 안령도를 휘둘렀다. 하나 전풍개는 주저 없이 안령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주름진 손이 앞으로 움직인다 싶은 순간, 미친 듯이 안령도를 휘두르던 복면인이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커억!”

그의 아랫배에는 어느새 전풍개의 반쯤 쥐어진 주먹이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복면인은 나름대로 독기를 품고 다시 덤벼들려 했으나,어찌 된 영문인지 살짝 맞은 것 같은 아랫배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전풍개는 새우처럼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복면인을 슬쩍 내려다본 후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안령도를 멧어 들었다.

“살수 나부랭이가 쓰기에는 너무좋은 칼이로군.”

안령도의 예리한 칼날을 쓰다듬던 전풍개는 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슬쩍 오른손을 내저었다.

팍!

안령도가 허공을 날아 대청 입구의 대들보 한가운데 틀어박혔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방화는 급히 복면인에게 다가가 그의 마혈부터 제압한 후 복면을 벗겨 보았다. 사십 대의 험상궂게 생긴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화는 전풍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태사조님. 소손이 처리했어야 했는데,태사조님께 노고를 끼쳐드렸습니다.”

“노고는 무슨. 몸 풀 거리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자의 처리를 어떻게 할까요?”

“곧 들어올 녀석에게 맡기도록 해라.”

뜻밖의 말에 방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곧 들어올 녀석이라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방화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조님을 뵙니다.”

그는 다름 아닌 노해광이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방화의 전신을 쓸어보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몸을 보니 그동안 제대로 수련을 한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구나.”

방화의 얼굴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노해광은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전풍개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했다.

“사숙께 어려운 걸음을 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전풍개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해광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자꾸 쓸데없는 일만 저지 르고 있는데 어떻게 본산에만 처박혀 있을 수 있겠느냐?”

“제가 불민하여 사숙을 걱정시켜 드린 점을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노해광이 재차 허리를 숙이자 전풍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사라도 지내느냐? 무슨 인사를 두 번씩 하는 게냐?”

노해광은 숙였던 허리를 똑바로 펴며 한쪽에 쓰러져 있는 복면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복면인의 얼굴을 살펴본 노해광은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흠.”

“아는 자냐?”

“예. 오독계라는 낭인(浪人) 입니다.”

“독계? 무슨 이름이 그따위냐?”

“이름도 되고 별호도 됩니다. 성이 오씨인데,독계라는 별호가 알려지자 아예 이름처럼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 제법 칼솜씨가 좋아서 여기저기 자주 불려 다닌다고 하더니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왔군요.

“낭인치고는 칼솜씨가 그런대로 쓸만하긴 하더구나.”

전풍개의 입에서 이 정도 말이 나온 것은 정말 대단한 칭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해광은 전풍개의 표정을 슬쩍 살피며 물었다.

“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뻔한 걸 물어 무엇 하느냐?”

“독계는 주로 적류문의 청부를 받아온 자입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들의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

전풍개는 묵묵히 노해광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적류문의 뒤에는 검단현이 있습니다. 사숙께서 장안에 내려오신 걸 알고 검단현이 문안 인사를 한 모양입니다.”

“문안 인사라. 고얀 녀석이군.”

“검단현으로서도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있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뚫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전풍개의 시선이 노해광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요즘 검단현에게 밀려서 고전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노해광은 전풍개의 따가운 눈빛을 받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 가벼운 탐색전만 벌이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조만간 제대로 된 싸움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본산에 그런 서신까지 보내서 노부를 내려오게 한 것이냐?”

“그건…….,,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놈이 그런 편지를 받고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을 리가 없지. 네 계획대로 검단현이 노부에게 수작을 부려 왔는데,이게 화산의 뜻이라고 봐도 되는 것이겠지?”

노해광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사숙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군요. 사실 이번에 화산파에서 검단현을 보낸 것은 화산파 내의 세력구도에서 강경파가 득세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본 파를 향해공격을 가해왔을 겁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은 나름합리적인 인물이라고 들었는데,아무래도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용진산이 있었다면 아무리 본 파가 눈에 거슬렸더라도 화산파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매장원 사건이후 화산파가 흔들리는 상태에서 용진산이 무당집회에 참석하기 위해떠난 것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이유라고 봅니다.”

“아니면 그것조차도 용진산의 의도 일 수도 있고.”

전풍개의 일침에 노해광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현재 화산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이장로 천절검사(天絶劍士) 단우진은 용진산과는 예전부터 노선을 달리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용진산의 의도라기보다는 단우진이 자신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전풍개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됐다. 노부는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질색이니,네가 잘 알아서 판단하겠지. 그나저나 검단현이 쓴 수법치고는 지나치게 허술?! 것 같은데,네 생각은 어떠냐?”

“어떤 수법을 썼느냐 보다는 사건자체가 더 중요하겠지요. 장안 한복판에서 종남파의 유일한 어른이 암습을 당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더 심한 수법을 쓰지 않아도 그것 만으로 본 파를 이번 싸움에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풍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단현이 노부의 의도를 알았을까?”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어차피 그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본 파에게 시비를 걸 어와서 사태를 크게 확장시켜야 했으니 말입니다.”

“결국 노부가 기회를 주자 검단현이 미끼인 걸 알면서도 바로 문 셈이로군.”

전풍개가 자신을 미끼로 표현하자 노해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숙께 그런 역할을 맡게 해드려송구합니다.”

“장안에서 장사꾼 노릇을 하더니 쓸데없이 사과하는 버릇만 생겼군.

어쨌든 네 의도대로 판은 짜여졌다.”

전풍개는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해광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너는 한 가지만 대답하면 된다. 검단현을 꺾고 그들의 의도를 쳐부술 확실한 자신이 있는 것이냐?”

노해광은 자신의 가슴속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전풍개의 날카로운눈빛을 받고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화산파를 상대하는데 절대적인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미끼를 문 먹잇감을 놓쳐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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