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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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2화


제 327 장 삼종방법(2)

그날 저녁,진산월은 후원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있지 않은 방안은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방 안에는 침상 하나와 탁자 하나,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슴푸레한 윤곽만이 겨우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이 남자임을 알게 했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악자화였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악자화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진산월은 악자 화의 감겨진 눈과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콧날,그리고 갈라진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악자화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석천현 동광사에 있는 대응전 앞에서였다. 그때 진산월은 갑작스레 실종된임영옥의 행방을 찾기 위해 무척 초조한 상태였으며,그곳에서 쾌의당고수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천봉궁의 선자들에게 도움을 받기도했다.

그들이 모두 떠난 대웅전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진산월 앞에 악자 화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새벽의 여명을 받으며 나타난 악자화는 임영옥이 태음신맥을 지니고 있으며, 구음향으로 악화된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구궁보의 천양신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 년 만에 다시 본 악자화는 예전보다 조금은 수척해지고 마른 것 같았다. 아니면,이번 일로 인한 수 난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까?

진산월은 한동안 악자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하나뿐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짙은 어둠만큼이나 무거운 정적이 방안을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앉아있고 누워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한 침묵이 어색할 법도 하련만,진산월은 무심히 허공을 응시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문득 그의 입에서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위독하오.”

악자화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가 듣든 말든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진산월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예전에 천양신공을 익혀야만 구음향에 중독된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했었소. 그런데 아쉽게도 천양신공으로도 그녀의 몸을 정상으로 돌리지는 못했소. 오히려 지금은 천양신공의 기운마저 음기로 변해서 그녀의 몸을 갉아먹고 있소.”

그의 음성은 적막한 어둠 속을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천양신공을 익힌 것이 정말 그녀에게 득이었는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게 되었소.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오. 당신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거요. 다만 그녀가 운이 없던 것이겠지.”

어둠 속에 내비치는 진산월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음울하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도 그녀가 어떤 여인인지 알거요. 그녀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여인이오. 겉으로는 부드럽기 그지 없지만,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강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 그래서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도 나는 그녀에게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거요. 어리석게도 말이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진산월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우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녀가 결코 나보다 먼저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소. 그리고 나라면 어떤 수단을 쓰든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진산월은 양손을 쳐들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지도록 튀어나온 그 주먹은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핏기가 사라져 창백해보였다. 그러다 천천히 힘이 빠지며 주먹 쥔 손이 풀어졌다. 벌려진 손가락 사이로 짙은 어둠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군. 이제는 천하의 어떤 것도 움켜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단 하나뿐인 연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 정말 우스운 일 아니오?”

진산월은 다시 양손을 내렸다. 그만큼 어둠이 짙어지고 주위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산월의 시선이 느릿느릿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악자화의 얼굴로 향했다. 악자화의 두 눈은 여전히 굳게 감겨 있었고,코로는 미약한 숨결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악자화의 닫혀진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에게 넋두리라도 하고 싶은데,당신밖에는 그럴사람이 없었소. 그것뿐이오.”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악자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막 몸을 돌렸을 때,지금까지 굳게 다물어 있던 악자화의 입술이 아주 살짝 열렸다. 그리고 갈라져쉬어버린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를 바짝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음성이었다.

“현음진기(玄陰眞氣)라는 것이 있다……

문으로 걸어 나가려던 진산월은 몸을 멈추었으나,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어둠 속의 한 점을 가만 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악자화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라 터진 입술을 조금씩 열었다.

“행공법(行功法)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익히기는 무척 힘들지만 제대로 익힌다면 능히 천하제일의 음공(陰功)이라 할 만한 것이지. 알려지기로는 천하의 어떤 음기라도 능히 제어할 수 있고,일정 경지에 이르면 천하의 어떤 절맥이라도 능히 고칠 수 있다고 하더군.”

진산월의 어깨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움찔거렸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악자화의 입술은 계속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 현음진기는 마도제일인이라 불리는 자의 독문무공인데,그는 현음진기를 무척이나 아껴서 열두 명이나 되는 제자들 중에서도 단 두 명에게만 그 구결을 알려주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구결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누구도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지.”

“그중 한 제자는 현음진기를 익히기 위해 끝없이 마도제일인과 그에게서 현음진기를 배운 두 명의 제자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그 제자는 현음진기가 자신이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무공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아주 머나먼옛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무공 말이지.”

음의 고저와 장단이 거의 없는 악자화의 목소리는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 같기도 했고,의미 모를 잠꼬대 같기도 했다.

“그 무공은 어느 전통 있는 명문정파의 비전이었는데,어느 날인가 사라져버려 지금은 그 문파에서조차 익힌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제자는 현음진기에 대해 알수록몇몇 부분이 그 전설 속의 무공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진산월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하나 어둠 속에 내비치는 그의 두 눈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괴이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두 무공은 모두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음공일 뿐 아니라 특이한 행공법이 있고,치료에 탁월한 효능이 있으며,음공 자체보다는 그것에서 파생되는 무공들이 더욱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단순히 이런 점들뿐이었으면 그 제자도 두무공의 유사점에 대해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어느 날그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

“현음진기를 익힌 두 제자는 첫째와 막내였는데, 막내는 그와는 제법친분이 두터워서 두 사람은 종종 비무를 하곤 했지. 그런데 비무 도중 그가 심하게 다치는 일이 생겨서 막내 제자가 무심코 그의 운공을 돕기 위해 치료 효과가 좋은 현음진기를 주입했어.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내공 중 일부가 막내의 기운에 그대로 녹아든다는 걸 알아차렸지. 막내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황급히 내공 주입을 멈추었지만,이미 그는 진한 의혹을 느낀 상태였어. 왜냐하면 그때 그는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예전에 몸담았던 문파의 무공을 끌어올린 상태였거든. 그런데 놀랍게도 현음진기에 바로 반응을 일으켰던 거야.”

악자화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악자화는 한참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후로 그는 현음진기의 비밀을 풀기 위해 좀 더 노골적으로 움직였지만,첫째에게 그런 행동이 발각되고 말았지. 그 후에 초라한 몰골로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에게 구해진 거야. 비참한 이야기지.”

악자화의 감겨진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정말 비참한 이야기야……. 누군가의 넋두리가 아니었으면 결코 내뱉고 싶지 않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진산월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막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악자화의 갈라진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첫째와 막내의 현음진기는 오성수준에 불과해. 현음진기의 진정한 위력은 팔성이 넘어야 나타나는데,그건 오직 현음진기의 원주인인 마도제일인만이 도달한 경지이지. 그를 찾고 싶으면 선양으로 가야 할 거야.”

진산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악자화의 눈은 처음처럼 감겨 있었고,입술 또한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으나,악자화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진산월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산월의 몸이 사라진 후에도 악자 화는 한동안 미동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언제 뜨여졌는지 그의 감겨졌던 눈이 검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악자화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고 있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흐음.”

그의 입에서 뜻을 알기 힘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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