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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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9화


제 334 장 고검출세(3)

검단현은 차가운 눈으로 일 층을 쓰윽 훌어보았다.

일 층은 이미 추혼사절에 의해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던 시신들이 한쪽에 나란히 누워 있고, 부서진 의자와 탁자의 잔해들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사실 추혼사절 네 사람은 그동안 오대파의 추적을 피해 이름을 숨기고 손가장의 청명숙에 머물러 있었다. 손노태야가 화산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노해광과의 연합을 파기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청명숙에 기거하는 열두 명의 고수들을 보내주었는데,그들은 당시의 인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노해광은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을 하다가 산해루에 출입시켜 단골로 삼았던 것이다.

산해루가 공격받지 않는 한,그들을 부리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과 노해광 사이의 약조였다. 노해광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한 수로 추혼사절 같은 뛰어난 실력의 고수들을 둘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했고, 추혼사절 또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산해루에서 미주가효를 벗 삼아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언제까지고 산해루의 단골손님으로 주위의 이목을 숨긴 채 지내왔을 것이다.

검단현은 주변이 정리되어 한층 넓어 보이는 산해루의 일 층을 가리키며 전풍개를 쳐다보았다.

“저 정도 공간이면 서로의 솜씨를 보이기에 적당한 것 같군. 어떻소,전 대협? 정말 나와 일대일로 겨루어 볼 생각이 있으시오?”

도발적인 그의 말에 전풍개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어졌다.

하나 그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노해광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무인(武人)이 검으로 승부를 가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싸울 때 싸우더라도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전풍개는 당장이라도 검단현을 향해 달려들듯 했으나,노해광의 표정이 워낙 진지한지라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리라 생각했는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단현은 전풍개를 분노하게 하여 그와 일대일의 결전을 유도하려 했다. 일단 전풍개와 싸우기 시작하면 정파의 특성상 다른 누구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을 테고,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불리한 여건을 뒤집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노해광이 시의적절하게 끼어드는 바람에 검단현의 그런 의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검단현은 한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노해광을 응시했다.

“해결해야 할 일이란 게 무언가?”

노해광은 당장 전풍개와 검단현의 충돌을 막은 것만으로 안심했는지 표정이나 음성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자네는 사람을 풀어 멀쩡한 내 가게를 부수었을 뿐 아니라 일단의 무리들을 침입시켜 손님들을 다치게했네. 마땅히 그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겠나?”

“사과와 배상이라……

“당당한 명문정파의 제자가 함부로 가게를 훼손하고 인명을 살상하려했으니 대강남북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 수모를 어찌 당하려는가?

우선 오늘 일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피해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해주기를 바라네. 싸우는 건 그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일세.”

사과와 배상!

검단현에게는 참으로 낯선 단어들이었다.

지금까지 검단현은 누구에게 머리를 숙여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보상은 더욱 기막힌 말이었다.

구대문파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화산파에 감히 보상을 청할간 큰 무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보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자신의 잘못을 시인해야 하는데, 그건 화산파의 제자로서는 너무도 치욕스런 일이 될 것이다.

검단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한동안 노해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심한 시선이었다.

남들은 견디기 힘든 검단현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서도 노해광은 전혀거리껴 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턱밑에 나있는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살짝입가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그 모습이 영락없이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노회한 상인 같았다.

“장사꾼이 다 되었군.”

검단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리자,노해광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손해나는 건 딱 질색이라서 말일세. 자네도 그렇지 않나?”

“그렇지.”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무얼 말인가?”

“자네도 무작정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 아닌가?”

검단현은 노해광이 무슨 말을 할지 순간적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노해광이 자신에게 한 수 양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하나 노해광이 그렇게 무른 인물은 아닐뿐더러 그런 식의 양보는 오히려 자신을 더욱 수치스럽게 하고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검단현은 문득 노해광의 다음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 그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노해광은 이미 다음 말을 내뱉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명문정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회람연(0覽宴)을 열어 분쟁을 해결하곤 했네. 이번일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게 어떻겠나?”

“회람연을 열자고?”

“그게 양 문파 간에 불필요한 희생을 억제하고 최후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는군.”

검단현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노해광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회람연!

언뜻 듣기에는 양 문파 사이에 친목을 도모하는 연회를 나타내는 말같았으나,실상은 전혀 달랐다.

세력이 서로 비등한 두 문파 사이의 분쟁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게 되면 문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파멸적인 전면전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게 된다. 그럴 때 분쟁의 당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공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 바로 회람연이었다.

두 문파에서 친분이 있는 주위에 회람을 돌려 그 사실을 널리알리기에 회람연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지만,사실은 지극히 무림인다운 발상이 만들어낸 살벌하고 위험천만한 자리였다.

일단 회람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두 문파는 더 이상의 시비를 걸 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회람을 돌리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한 번의 싸움으로 그동안의 모든 분쟁을 끝내고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만약 그것을 어기게 되면 더 이상은 명문정파로 행세할 수 없을 정도로 문파의 명예가 실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 회람연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회람연은 두 문파의 세력이나 힘이 거의 백중지세였을 때 가능하며,그것도 두 문파가 모두 승낙을 해야만진행될 수 있었다.

게다가 만약 회람연에서 패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너무도 막대하기에 설사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어도 먼저 회람연을 제의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우세한 상황이라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회람연을 열 필요가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 않는 강호무림에서도 회람연을 보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해광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먼저 회람연을 제의했으니 검단현이 그 의도를 몰라당혹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회람연이라……:

검단현은 회람연을 받아들였을 때의 유불리를 판단해 보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화산파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회람연을 열어도 종남파에서는 지금 서안에 있는 인원들 외에는 추가로 보강될 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화산파는 아직도 본산에 여러 명의 장로들이 남아있고,유능한 속가제자들을 추가로 투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종남파의 세력들 중 가장 두려운 존재인 황성고검 나력지와 그의 제자들은 막상 회람연에는 나설 수 없었다. 회람연은 순수한 두 문파의 제자들과 속가들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회람연을 열자고 한 노해광의 제의는 거의 자폭에 가까운 무모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해광이 과연 그런 정도의 예측도 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노해광은 무공이 미흡한 것 외에는 두뇌와 지략에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정보와 소식에 빠르고 계산에 능해서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회람연을 먼저 제의 한 것은 종남파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노해광의 심중에는 어떤 계획이 숨어 있는 것일까?

자신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노해광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검단현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위중한 일이 닥칠수록 냉철하고 차가워지던 그로서는 드물게 겪어보는 뜨거운 분노였다.

검단현은 힐끔 전풍개를 돌아보았다.

전풍개도 노해광의 입에서 회람연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움찔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은 격정적이고 화급하다고 알려진 질풍검의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전풍개가 특별히 반대하는 기색이 없자 검단현은 노해광을 쏘아보며 다짐하듯 물었다.

“본 파와 종남파 사이의 회람연이겠지?”

노해광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양 파사이의 일일세.”

검단현의 시선이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나력지를 향했다.

“일단 회람연이 열리면 두 문파의 소속이 아닌 사람은 누구도 개입할수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노해광은 피식 웃었다.

“철혈매화답지 않군.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나? 어찌 되었건 자네로서는 지금보다 나빠지는 일은 없지 않겠나?”

미소 짓는 노해광의 모습이 얄법기는 했으나,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짜놓았던 계획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본신의 신변마저위험한 처지에 놓였던 검단현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나빠지는 경우를 떠올릴 수 없었다.

“좋아. 회람연을 받아들이지. 날짜는?”

“오 일 후가 적당할 것 같네.”

“장소는?”

“날짜는 우리가 정했으니,장소는 양보하도록 하지.”

검단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노해광의 음성이나 표정,입가의 미소는 계속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나 검단현은 최후의 순간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화월루로 하지.”

화월루는 산해루를 마주 보고 있는 기루였다. 산해루 때문에 이 일대는 그동안 은근히 노해광의 세력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검단현이 화월루를 장소로 정한 것은 이번 기회에 노해광의 세력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노해광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심한 검단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월루라. 모처럼 꽃밭에서 칼춤을 춰보겠군.”

검단현은 부상을 입은 두 명의 장로와 네 명의 일대제자들만을 데리고 산해루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해광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전풍개가 그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노해광은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제 결정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아니었느냐?”

“그렇지요. 오늘 설사 검단현을 이곳에서 쓰러뜨렸더라도 화산파와의 싸움은 계속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싸움이 커질수록 본 파의 희생도 커졌을 테고,그건 이제 겨우 문호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키고 있는 본 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을 겁니다.”

“네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회람연을 승낙했지만,솔직히 마음한구석에는 아직도 탐탁지 않은 게 남아 있다. 너는 정말 자신이 있느냐?”

노해광은 그 말에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전풍개는 물론이고 한쪽에 묵묵히 서 있던 나력지 또한 흥미어린 얼굴로 쳐다보았을 때,노해광은 비로소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의 승패는 자신감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누가 더 절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까지 본 파의 제자들처럼 절박하게 살아온 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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