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345화


제 338 장 음모지야(3)

한동안 묵묵히 싸음을 보고 있던 흑포 복면인이 알 듯 모를 듯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봉구령이라면 능히 무영검군을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군. 결국 우리가 나서야 하려나?”

궁장 여인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아직 그는 혈영창(1111 影槍)의 진수인 혈망을 내보이지도 않았어요.”

흑포 복면인은 여전히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말하자면 무영검군도 나름대로 숨겨둔 한 수를 가지고 있을거요. 그러니 봉구령이 혈망을 펼친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란 말이오.”

“당신은 봉구령을 직접 상대해 본적이 있나요?”

“꼭 그와 솜씨를 겨뤄봐야만 그의 실력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일전에 나는 봉구령과 유중악의 창을 모두 겪어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오?”

“있어요. 창으로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그들 두 사람을 모두 상대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단 한 사람.”

흑포 복면인의 두 눈에 흥미로운빛이 감돌았다.

“그가 누구요?”

궁장 여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손검당.”

흑포 복면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날카롭게 번뜩였다.

“요즘 낙양 일대에서 가장 무서운검을 가지고 있다는 자로군. 그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검객이라고 듣긴 했지만,설마 봉구령의 창 아래에서도 살아남을 정도 였단 말이오?”

“봉구령이 혈망을 쓰기 전까지는 거의 대등하게 싸웠어요.”

“흠. 그자는 좀처럼 낙양을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봉구령과는 무슨 일로 싸우게 되었던 거요?”

궁장 여인은 흑포 복면인을 힐끔쳐다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소한 남자들 간의 다툼이었어요.”

언뜻 흑포 복면인의 눈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내걸렸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그자는 한 여인에게 빠져 그녀의 주위를 한 마리나비처럼 맴돌고 있어서 호접유객이라는 다소 비아냥 섞인 별호로 불리기도 한다더군. 봉구령도 풍류라면 누구에게도 뒤지는 인물이 아니니 혹시 두 사람이 그 여인 때문에 시비가 붙은 게 아니오?

그리고 그 여인은 아마도 부인의 막내제자인……

궁장 여인의 목소리가 빙굴에서 홀러나온 둣 차가워졌다.

“쓸데없는 부분에 신경을 쓰는군요. 아무튼 중요한 건 손검당이 봉구령을 상대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일 년 전에 유중악과도 싸운 적이 있어요.”

“불과 일 년 사이에 강호에서 가장유명한 창의 고수 두 사람을 연이어상대했단 말이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운이 좋은 거지요. 어쨌든 그는 그들 두 사람을 상대하고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그자가 봉구령의 창이 유중악보다 무섭다고 했다는 말이오?”

“실력 자체는 유중악이 조금 더 나은 듯하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는 유중악의 손에서 삼십 초를 견디지 못했는데,봉구령과는 오십 초 가까이 백중세를 이루었으니 말이에요.”

“그런데 봉구령이 혈망을 쓰자 판세가 달려졌단 말이오?”

“그래요. 손검당은 혈망의 첫 번째초식을 간신히 피했으나 이어지는 두 번째 초식에 옆구리를 관통당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당신도 알겠지만, 봉구령의 혈망은 모두 여섯 초식으로 되어 있지요.”

흑포 복면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봉구령의 혈망이라면 아무리 무영검군이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구려.”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봉구령에게 그를 맡긴 게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무영검군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그나저나 봉구령의 혈망이 그 정도라면 이곳은 그에게 믿고 맡겨도 되겠군.”

“문제는 저쪽이로군요.”

궁장 여인의 시선이 다른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연신 요란한 폭음과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고,거친 경풍과 시퍼런 검광이 폭죽처럼 연거푸 피어올라 주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낙일방이 여덟 명의 복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데,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누가 이길지 전혀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 흑포 복면인은 그쪽에 대해서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옥면신권의 주먹이 나이답지 않게 단단하긴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소. 그는 결코 관혼팔담진 (關魂A漂陣)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궁장 여인이 각별한 눈으로 여덟명의 복면인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훑어보았다.

“공동파의 콧대 높은 말코들이 어떻게 꼭꼭 숨겨 놓고 보여주지 않던 팔담검객(A澤劍客)들을 순순히 내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죠?”

“그냥 내 수완이 좋았다고만 알아두시오.”

복면인들의 정체는 공동파의 팔담검객이었다. 그들은 공동파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특수한 신분이어서,개개인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공동파의 수뇌들 몇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하게 신변이 보호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존재조차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공동파의 숨겨진 칼’이라 불렀는데,그 이유는 그들이 관혼팔담진이라는 특수한 절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관혼팔담진은 타 문파에 비해절정고수의 수가 부족한 공동파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공동파의 전대고수들이 합심하여 창안해낸 대일인합격진(對一人合擊陣)으로, 강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것은 그 절진에 갇힌 사람 중 살아서 나온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관혼팔담진이 그동안 몇 번이나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언제부터인지 그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강호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림인들 중에는 공동파의 고수가 여덟 명이 모여 있는 자리는 가급적 피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관혼팔담진을 ‘연옥니담진(‘保獄振漂陣)’이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는데,그 이름 그대로 한 번 갇히면 끝없는 지옥의 수렁에 빠진 둣 도저히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낙일방은 무당산에서 벌어진 형산파와의 일전에서 자신의 실력이 나이를 초월하여 강호무림의 절정고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이제 그의 무공을 의심하는 무림인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의 강호경험이 일천하여,다양한 부류의 고수들과 싸운 적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흑포 복면인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강호에는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복잡하면서도 기괴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절진(絶陣)들이 적지 않았다. 오랜 시간과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그런 절진들은 경험이 풍부한 강호의 노련한 고수들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대적 경험이 별로 없는 낙일방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관혼팔담진은 존재 여부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절진 중의 절진이었으니,제아무리 낙일방이 당대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 할지라도 그 절진을 파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흑포 복면인의 예상대로 낙일방은 여덟 명의 복면인들이 펼치는 절진 속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성난 맹수처럼 사납게 날뛰고는 있지만,아무리 공력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고수라 할지라도 저런식으로 움직여서는 곧 진력마저 고갈되어 제풀에 주저앉고 말 게 뻔했다.

흑포 복면인은 이내 고개를 돌려궁장 여인을 돌아보았다.

“밤도 깊어 가는데,이쯤에서 오늘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소?”

궁장 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 자,두 사람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는 후원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그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후원의 별실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낙일방과 성락중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곳. 하나 지금 두 사람은 외인이 그 방을 향해 가는 것을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위가 거의 폐허처럼 변한 와중에도 그 방문 앞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굳게 닫힌 방문만 보면 도저히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의 한가운데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막 두 사람이 방문을 향해 걸어가려 할 때,갑자기 두 개의 인영이 방문 앞을 가로막았다.

크고 작은 두 인영을 본 흑포 복면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 상황에서도 내 앞을 막을 생각을 하다니. 과연 신검무적의 제자들이라 이건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유소응과 손풍이었다. 유소응은 진산월에게 직접 하사받은 견정검을 굳게 쥐고 있었고,손풍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금시라도 달려들 듯 성난 눈으로 흑포 복면인과 궁장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당한 강호의 고수들이 대체 뭐가 부끄럽기에 얼굴마저 가린 채 야밤에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온단 말이냐? 본 파에 볼일이 있으면 내일 날이 밝은 다음에 정식으로 방문첩을 작성해서 찾아오도록 해라.”

손풍이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소리치자 흑포 복면인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젊은 친구의 기세가 상당하군. 종남파에서 제일 늦게 입문한 막내 제자라고 들었는데, 맞는가?”

손풍은 눈을 부릅뜨고 서슴없이 자신의 가슴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렇다. 내가 바로 본 파의 가장촉망받는 제자인 손풍 어른이시다.

그러는 너는 어느 파의 누구냐? 너도 무림인이라면 순순히 복면을 벗고 떳떳하게 이름을 고하도록 해라.”

“흐흐. 종남파 막내제자의 기상이 하늘을 뒤덮을 듯하군. 이제 갓 종남파에 입문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자가 무림인 운운한다는 게 조금우습지 않나?”

“얼굴을 내보이는 것조차 두려워어두운 밤에도 복면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너보다는 내가 훨씬 더 무림인답다고 생각한다.”

당당한 손풍의 말에 흑포 복면인의 눈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지며 진득한 살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과연 신검무적의 제자답게 입심이 대단하군. 어디 솜씨도 그 주둥아리처럼 대단한지 한 번 볼까?”

흑포 복면인의 전신에서 구름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손풍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 기세는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나 손풍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풍이라고 지금 상황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자신보다훨씬 어린 유소응이 침착한 자세로 자신의 옆에 우뚝 서 있는데 어찌겁먹은 기색을 보일 수 있겠는가?

‘병든 사고와 꼬마 사형은 내가 지킨다. 손풍,너는 할 수 있다!’

손풍은 피가 나도록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 자신이 그동안 배운무공들을 머릿속으로 재빨리 되새겨보았다. 흑포 복면인이 공격할 경우 어떻게 막고 어떻게 반격할지를 열심히 궁리하는 그의 두 눈은 어느때보다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유소응은 별다른 감정의 빛이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그저흑포 복면인과 자신 사이의 빈 공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쥐어져 있는 장검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엉뚱한 공상에 빠져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흑포 복면인은 열심히 초식을 궁리하며 자신을 쏘아보는 손풍의 모습을 빙긋 웃으며 지켜보다가 문득 유소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한 줄기 신광이 어른거렸다.

강적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심성, 두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두 발을 살짝 벌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는 완벽한 자세,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없이 깊고 차분한 호

흑포 복면인은 한동안 유소응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재로군, 기재야. 신검무적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대체 어디서 이런 보석을 찾아냈을까?”

손풍의 눈꼬리가 꿈틀거린 데 비해유소응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흑포 복면인은 문득 조금 전과는 다른 중후하면서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린 친구. 내 앞을 막지 말고 이대로 물러나도록 해라. 십 년 후에는 기꺼이 상대해주겠다.”

유소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수중에 들고 있는 견정검의 손잡이를 가만히 두드릴 뿐이었다.

탁탁.

그에 따라 검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가볍게 흔들렸다. 흑포 복면인은 수실에 수놓아진〈견(堅)>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무림인이로구나. 내가 말을 잘못했다. 무림인에게 십 년후를 운운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

흑포 복면인의 기세가 한층 더 거칠고 난폭해졌다.

그에 따라 주위의 공기가 뒤흔들리며 거센 경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너희들이 무림인임을 인정하지.

그러니 무림인다운 최후를 선사해주마.”

흑포 복면인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유소응은 견정검을 자신의 중단으로 올려 세웠고,손풍 또한 마른 침을 삼킨 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람도 숨을 멈춘 듯한 그 순간,굳게 닫혀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 하나.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