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6화
제 339 장 의기불굴(1)
병색이 완연한 금시라도 꺼질 듯 미약한 음성이었다. 하나 그 음성이 들려온 후 금시라도 피를 뿌릴 것 같았던 살벌한 분위기는 일변했다.
흑포 복면인의 전신에서 폭풍처럼 일어났던 맹렬한 기세는 씻은 둣이 사라져 있었다.
손풍이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유소응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던 견정검은 어느새 검집 안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유소응은 흑포 복면인과 궁장 여인을 일견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한 점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고께서 두 분의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흑포 복면인이 묘한 눈으로 유소응을 쳐다보았다. 간단한 말 몇 마디로 졸지에 흑포 복면인과 궁장 여인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한밤의 무례한 침입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찾아온 평범한 방문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차이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흑포 복면인은 어차피 장내의 판세를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이 담대하고 맹랑한 꼬마의 수작에 잠시 어울려줄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들어가 보겠네.”
그는 슬쩍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유소응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장 여인 또한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가자 혼자 남게 된손풍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통을 긁적거렸다.
‘꼬마 사형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의도가 뻔한 저런 놈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다니……. 아무리 사고가 허락했어도 끝까지 말렸어야지.’
손풍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신도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열려있던 방문이 다시 닫혔다.
“어?”
손풍은 문을 열려 했으나,아무리힘을 주어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손풍은 의미 모를 넋두리를 중얼거리며 계속 문을 열려고 끙끙거렸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도저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분명 다른 방문과 똑같은 평범한 나무로 만든 문이었음에도 강철문이라도 된 것처럼 몸으로 밀고 어깨로 밀쳐도 요지부동이었다.
“사형. 나도 들어가게 문 좀……
손풍은 몇 번이나 손으로 문을 두드려도 꼼짝도 않자 갑자기 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문을 세차게 걷어찼다. 그런데 그토록 굳게 닫혀있던 문이 발길질 한 번에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닌가?
“됐다!”
손풍은 자신이 방금 감히 사고가 있는 방문을 발로 찼다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한데 그 순간,갑자기 안에서 세찬경풍이 폭발하듯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경풍이 어찌나 강력하던지 방문은 물론이고 방 전체가 마치 거대한 폭발물에 터져버린 것처럼 박살이 나 버렸다.
과아앙!
손풍은 경풍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 진 문짝과 함께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긴 했으나,어찌나충격이 컸던지 귀가 멍하니 울리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둣 아파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유월의 날씨임에도 한겨울처럼 싸늘한 냉기가 가득 밀려와서 몸이 덜덜 떨려왔다.
손풍이 어려서부터 영약을 물처럼 복용한 강건한 신체가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정도로 차갑고 지독한 한기였다.
손풍은 나무 파편과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한동안 멍하니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멈추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조금 전만 해도 멀쩡했던 별실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채 폐허로 변해 있었다. 부서진 나무 파편과 수 북하게 쌓인 흙먼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찢어진 천 조각들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아름답게 꾸며진 방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손풍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폐허로 변한 방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폐허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고! 꼬마 사형!”
손풍은 목이 터져라 두 사람을 부르며 맨손으로 돌조각과 잔해들을 정신없이 파헤쳤다. 양손이 부르트고 얼굴이 흙먼지가 범벅이 되면서도 손풍은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고! 사형……! 안돼! 제발……
제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먼지 속을 뒤집고 다니는 손풍의 모습은 영락없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폐허를 파헤치던 손풍의 손에 문득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비단으로 된 이불이었다. 손풍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알록달록한 목화 문양의 이불은 분명 임영옥이 덮고 있던 것이었다.
“사고!”
손풍은 황급히 이불자락을 잡아당겼다. 부서진 돌조각 사이에 묻혀있던 이불은 여기저기가 찢어진 데다 기이한 냉기가 감돌고 있어서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반쯤 파헤치자 이불 한편에 누군가가 돌돌 말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냉기 때문에 푸석푸석해진 이불을 거의 부수다시피한 손풍은 이내 이불에 말린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사형! 꼬마 사형!”
이불 속의 사람은 다름 아닌 유소응이 었다.
유소응은 냉기에 휩싸여 창백해진 얼굴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손풍은 우선 그의 숨결부터 확인했다. 비록 가늘긴 했으나 아직 호흡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손풍은 그의 몸을 끌어안다가 너무나도 차가운 냉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꼬마 사형! 정신 차려! 이러다간얼어 죽는단 말이야!”
초여름 날씨에 얼어 죽는다는 말을하는 게 왠지 어울리지 않았지만,손풍이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몸이 차가운 상태에서 계속 정신을 잃고 있으면 정말 얼어 죽게 될 것만 같았다.
하나 아무리 흔들어도 유소응은 깨어나지 않았다. 손풍은 냉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손으로 유소응의 차가운 살결을 계속 비벼댔으나,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지?”
손풍의 짧은 지식으로는 유소응이 왜 이런 상태에 빠졌는지,어떻게 해야 그를 깨울 수 있을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대체 멀쩡한 모습으로 방으로 들어간 유소응은 왜 이불에 싸인 채 꽁꽁 언 상태가 되었단 말인가? 비록밤이라고 해도 아직 후덥지근한 기운이 남아있는데,대체 어디서 이런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을까?
뿐만 아니라 유소응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 방은 임영옥의 거처로, 그녀는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상에 누워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 파리한 안색으로 침상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종남파의 제자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본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 방으로 유소응과 두 명의 괴인들이 들어간 것을 손풍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유소응만 이불에 말린 채 발견되었을 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조금 전의 폭발로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산산이 박살 나 버렸단말인가?
하나 그렇다면 하다못해 시신의 조각이나 핏물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에 있는 네 사람 중 한 사람만 꽁꽁 언 상태로 남아있고 다른 세사람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니 손풍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선은 꼬마 사형을 살리는 게 먼저다!’
갑자기 사라진 사고의 안부가 걱정스러웠으나,그보다는 유소응의 상태가 더 화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유소응의 호흡이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손풍은 차가운 그의 몸을 꼬옥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손풍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당장은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폭발로 방이 송두리째 사라졌음에도 주위의 싸움은 여전히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창을 든 정체불명의 고수와 싸우고 있는 성락중은 그 싸움에 완전히 몰입되어 그런 폭발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두 사람의 격전은 어찌나 살벌하고 무시무시했던지 손풍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이내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덟 명의 복면인들에게 둘러싸인 낙일방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항상 준수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고,눈처럼 깨끗했던 백의는 여기저기가 찢어져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항상 듬직하고 의지가 되었던 동중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동중산이 머물러 있는 방쪽에서 연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음이 분명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쩌지? 생각해라,손풍! 너 아니면 꼬마 사형을 구할 사람이 없다.’
손풍은 민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자신의 둔한 머리를 탓하며 계속 생각에 골몰했다.
유소응을 안고 있는 팔과 가슴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유월의 밤에도 몸을 떨게 할 정도로 차가웠으나,그는 그런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어제 천봉선자 중의 한 사람이 찾아왔었지? 이 근처에 머물러있다고 했는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손풍의 입에서 짧은 음성이 홀러나왔다.
“만강루……. 서쪽에 있는 만강루!”
그는 혼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그말을 중얼거리며 서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꽁꽁 언 소년을 가슴에 안은 채 정신없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이내 짙은 어둠에 가려져보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