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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48화


제 339 장 의기불굴(3)

누산산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손풍이 아직까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당신”?…. 아직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손풍은 그 질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꼬마 사형은? 사형은 어찌 되었손풍이 무어라고 하건 말건 누산산은 벌컥 화를 냈다.

“누가 당신보고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고 했어요? 어서 일어나지 못해요?”

손풍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소저가 꼼짝도 말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소?”

“그게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지,당신보고 계속 무릎 꿇은 채로 있으란 뜻이에요?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다른 사람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요? 뭐 이런 바보천치 같은 작자가 다 있어?”

누산산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에 손풍이 고개를 절레절레흔들더니 다시 그녀에게 사정조로 매달렸다.

“이것도 내가 잘못한 것이란 말이구려. 알겠소. 무조건 사과하겠소.

그러니 꼬마 사형이 어찌 되었는지만 말해주시오. 살았소,죽었소?”

손풍의 다급한 표정을 본 누산산은 그제야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흥. 유 소협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어요.”

손풍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정말이오? 꼬마 사형이 무사하단말이오?”

“그래요. 애초에 별다른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다만 갑작스런 음기의 침입으로 몸이 잠시 가사(假까)상태에 빠졌던 것이라서, 음기만 제거하면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것 참 다행이구려.”

“다만 그의 체내에 침입한 음기가 무척 독특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 음기를 제거하는 데상당히 고생했을 거예요.”

그 말에 손풍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지 다시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렇다면 꼬마 사형은……

“다행히 내가 익힌 내공에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수습할 수 있었어요.”

“휴우. 난 또 꼬마 사형에게 무슨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누산산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던 손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사람마다 익히는 내공의 기운이 달라서 쉽게 섞이거나 간섭하지 못한다고 들었는 데,용케도 꼬마 사형의 체내에 있는 음기를 다스릴 수 있었구려. 꼬마 사형의 운이 좋았던 모양이오.”

누산산의 얼굴에 한 줄기 묘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운이 좋았다고 하기보다는…… 애초에 유 소협의 몸속에 음기를 넣은 사람의 의도가 적중했다고 봐야 옳겠죠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음기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궁의 고수라면 어렵지 않게 해소할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어요. 유 소협의 몸에 음기를 넣은 사람은 필시일이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유소협에게 손을 쓴 것임이 분명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손풍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자 누산산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감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단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

“유 소협에게 손을 쓴 사람은 아마도 임 소저일 거예요. 그녀는 내가 이 근처에 와 있음을 알고,나라면 유 소협의 몸을 충분히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거예요.”

손풍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병상에 누워 계시는 사고께서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오?”

“유 소협이 이런 꼴이 되었으면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유 소협을 나에게 데리고 왔을 거 아니에요? 당신 같은 사람도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 찾아왔는데,그녀가 모를 리있겠어요?”

“나 같은 사람이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녀의 눈에 섬뜩한 빛이 어른거리자 손풍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그보다 사고께서 왜 꼬마사형에게 손을 쓰겠소?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소저를 떠올리지 못했으면 사형은 영영 이런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그분이 그걸 알고도 손을 쓸 리가 있겠소?”

“어쨌든 당신은 나를 찾아왔잖아요. 그리고 임 소저가 유 소협에게 손을 쓴 이유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그녀는 필시 강적을 눈앞에 둔 상태였을 거예요. 그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당신이 알지 모르지만 그녀의 체내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한기가 가득 담겨 있어요. 그러니 그 기운을 최대한으로 발출했다가는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에 유 소협이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미리 음기 한 가닥을 유 소협의 심맥에 심어 놓아 한 기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비한 걸 거예요.”

손풍은 누산산이 마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하자 반신반의하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계집이 비록 성질머리는 지랄같지만,그래도 명색이 강호의 고수이니 상황을 파악하는 눈은 나보다훨씬 뛰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계집의 말대로 사고께서는 두 복면 인을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꼬마 사형을 음기로 재워놓은 것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처음 발견했을 때 유소응의 몸이 이불에 감싸여 있었던것이 생각났다. 누산산의 말대로 임영옥이 유소응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쓴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임영옥과 두 명의 복면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란 말인가?

자신이 폭발로 잠깐 정신을 잃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것일까?

손풍이 복잡하게 떠오르는 상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누산산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아무튼 당신 말을 듣고 보니 종남파의 거처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군요. 내가 가보고 올 테니 이곳에서 기다려요.”

손풍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엉겁결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갈 테면 나도 데려가 주시오.”

누산산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를 떨쳐 그를 옆으로 비켜서게 했다.

“당신은 가봤자 짐이 될 뿐이니,이곳에서 기다려요. 잠시 후면 유소협이 뱉지도 모르니,그동안 그를 지켜보고 있기나 해요.”

“꼬마 사형이 멀쩡하다면 그것으로 되었소. 하나 본 파의 일에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소. 작은 힘이나마 거들 테니 나와 함께 갑시다.”

누산산은 벌컥 화를 내려다 평상시와는 다른 손풍의 진지한 모습에 잠시 화를 억누르고 타이르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문파를 위하는 당신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수준이 다른 문제예요. 유 소협을 내게 데려온것만으로도 당신은 해야 할 일을 다한 거예요. 엉뚱한 생각 말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손풍은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며 고운 두 눈에서 성난 눈빛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감히……!”

예전이라면 기겁을 하고 눈을 피했을 손풍은 정색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을 내뱉었다.

“누 소저. 당신이 나를 인간 이하의 쓰레기로 생각하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 또한 종남파의 문하요. 문파의 위기를 앞에 두고 남에게 일을 맡긴 채 뒤로 몸을 숨기는 졸장부가 아니란 말이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가 무릎을 꿇으면 다른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느냐고 했소? 본 파를 위해서라면 소저에게 무릎을 꿇는 일 따위는 아 무것도 아니오. 그보다 더한 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소. 남들의 시선 따위는 내게 있어 전혀 신경쓸문제가 아니오.”

누산산은 그의 기백 어린 말에 압도당한 듯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 무릎은 굽혀질지언정 마음속의 의기는 결코 굽히거나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소저는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나도 어엿한 무림인이란 말이오!”

두 눈을 이글거리며 열변을 토하는 손풍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산산은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자신의 방문이 단단히 닫힌 것을 확인한 누산산은 이내 퉁명스런 몇마디를 중얼거리고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몸을 날려 새벽의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갔다.

“멋진 척을 하긴. 그래 봤자 지금까지 한 추잡한 짓이 어디를 가겠어? 따라올 테면 따라 와 보라지.”

손풍은 순식간에 아득한 점으로 변해 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제길,안 통하네. 그나저나 이년이 끝까지 나를 희롱하려 하는구나.”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었는데,그 정도 사정했으면 데려갈 법도 하건만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말만을 남기고 혼자 횡하니 가버렸으니 손풍으로서는 바짝 약이 오를 만도했다.

하나 몸 튼튼하고 체질 건강한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진 적이 없는 손풍이 었다.

“좋다. 이 손풍 어르신이 얼마나대단한 근성과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겠다.”

이내 각오를 다진 손풍은 몇 차례팔다리를 움직여 보더니 이내 전력을 다해 자신이 떠나온 객잔을 향해달려가기 시작했다.

“동 사형,기다려! 내가 갈 때까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고함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외치며 미친 듯이 질주해가는 손풍의 모습은 선불 맞은 한 마리 멧돼지를 방불케 했다. 곧 그의 모습 또한 누산산과 마찬가지로 동터오는 여명의 햇살 속으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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