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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66화


제 347 장 명문제자(2)

종남파의 일승일무로 끝난 두 번의 비무 결과는 중인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종남파를 지지하고 있는 무림인들은 처음부터 종남파가 화산파를 앞서나가자 표정이 한결 밝아지면서도 이런 상승세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미심쩍어했다. 반면에 화산파를 지지하는 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앞으로 나올 화산파의 고수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다.

화산파 진영은 의외로 덤덤한 모습들이었다. 비록 두 번의 비무에서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그 때문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없는것 같았다. 검단현만 해도 평수형이 무승부를 이루고 물러나자 잠시 표정이 좋지 않았으나,이내 평상시의 신색을 회복했다.

그 원인은 남은 고수들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두 번 연속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에 비해 막상 화산파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회람연의 비무는 단순히 누가 더 많이 승리했느냐를 따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서 있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최종 승부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섯 번의 비무 중네 번을 거푸 패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출전자가 상대편을 모두 꺾는다면 승리는 그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긴 사람의 숫자보다 남은 사람의 숫자가 더 중요한 셈이었다.

승패와 관계없이 종남파와 화산파는 각기 세 사람의 출전자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화산파가 전혀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연승식을 택한 노해광의 선택은 현시점에서 판단착오였음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면 종남파의 운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던지.

검단현은 어떤 것이든 종남파의 승리는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종남파에서 줄전하는 인물은 검단현의 예측대로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은 종남산에서만 주로 머물러 있어서 강호무림에는 그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서 안 일대에서는 대해검이라는 명호로 불릴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검단현은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입수해 둔 상태였다.

소문으로는 신검무적이 문파를 비울 때마다 문파의 안위를 맡길 정도로 가장 신임하는 사제라고 했다.

성격이 충직하고 입이 무거워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무공 또한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검단현은 그에 대한 일말의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대세를 바꿀 정도로 강력한 패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종남파의 면면을 볼때 가장 경계해야 할 자는 누가 뭐라 해도 전풍개였으며,그다음으로 노해광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 노해광의 무공은 수준급이기는 하나 절정고수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은 되지 못했다.

결국 지금 출전하는 소지산만 꺾게 되면 화산파의 고수를 막아설 인물은 전풍개뿐이므로,검단현은 더욱회람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지산의 상대로 검단현이 지목한 사람은 매화사절 중의 최고수이며 일대제자 중에서도 유장령과 함께 최고의 인재로 꼽히는 매향 송인혁이었다. 장로급 고수를 출전시켜서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송인혁이 라면 충분히 소지산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신검무적의 사제라고는 해도 아직젊은 나이의 소지산을 상대로 화산파의 장로를 내보내기에는 주위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고,그건 다시 말해서 아직 검단현에게는 남들의 평판을 신경 쓸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송인혁은 자타가 공인하는 현재 화산파의 젊은 층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그의 사부는 화산파의 수석장로인 십자매화검 선우정이었고,선우정은 송인혁을 제자로 거둔 후 더 이상의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송인혁은 비단 무공뿐 아니라 인물됨이 헌앙하고 기질이 빼어나서 흠모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도 머리에 백건을 두르고 하얀 장삼을 입은 채 단정하면서도 품위 있는 자세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임풍옥수(臨風玉樹),그 자체였다.

그에 비해 소지산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반쯤 덮은 모습이었고,걸음걸이 또한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도 그리 준수하지 않았고기질도 특출나 보이지 않아서 외모만으로는 평범한 강호의 여느 무사와 다름이 없었다.

송인혁과 소지산은 일 장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 본 채 잠시 그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송인혁은 별처럼 빛나는 시선으로 소지산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했다.

“나는 화산파의 이십칠 대 제자인송인혁이라 하오. 십자매화검 선우정을 사사했소.”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부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소지산의 반응은 평범했다.

“종남파의 이십일 대 제자인 소지 산이오. 선사께선 태평검객 임장홍이라 하오.”

태평검객 임장흥!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이제는 잊혀져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한때는 종남파의 장문인으로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모르는 자가 없었다. 비록 명문정파의 장문인답지 않은 변변찮은 무공때문에 적지 않은 조롱을 받기도 했으나,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정말 훌륭한 품성의 무인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었다.

신검무적이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친이후,그의 이름은 간간이 사람들사이에서 거론되기도 했으나 대다수사람들에게는 기억 저편에 묻어둔잊힌 존재였다. 그런 임장홍의 이름이 소지산에게서 나오자 몇몇 사람들의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특히 임장홍과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던 금륜존자 고소명과 일도풍뢰 단리정천은 새삼 그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 기억나는지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살아있을 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그가 이제는 신검무적과 옥면신권을 비롯한 강호를 호령하는 불세출의 고수들을 키운 사부로서 재조명받는 인물이 되고 있었다.

인심의 변화무쌍함을 탓해야 할지 명성의 덧없음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지만,살아생전보다 죽은 후에 더욱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 임장홍의 모습은 왠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었다.

송인혁은 담담한 얼굴로 천천히 장검을 뽑아들었다.

“본 파의 매화검법으로 귀 파의 절학에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그의 검은 느릿하게 허공의 한 점을 찔렀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매개이도를 단순화시킨 매개일도(梅開一道)였다. 두 개의 각기 다른 검화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매개이도가 변화를 하나로 줄이고 속도를 늦추자 평범하면서도 격조 있는 예전초식으로 변했다.

소지산도 검을 들어 답례를 했다.

“본 파의 유운검법으로 귀하의 청에 응하겠소.”

검날을 비틀어 상대의 머리 위 허공을 노리는 유운출곡의 예전초식이었다.

예전초식을 펼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좀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지루함을 느끼거나 의아해하지 않았다. 비록 검을 펼치지는 않았어도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맹렬한 공방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검은 든 상태로 멈춰 있는 것 같아도 가만히 살펴보면 두 사람의 검을 든 손의 위치와 자세가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몇몇 고수들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명문정파고수들의 대결을 볼 수 있겠구나.’

사실 앞선 두 번의 비무는 그다지 정상적인 대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비무는 변칙적인 공격으로 판가름이 난 뒷골목의 막싸움 같은 승부였고,두 번째 비무는 보는 사람조차 진이 빠질 정도로 끈적끈적하고 지부하기조차 했던 해괴한 승부였다.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양 파 사이의 비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여서 다소의 실망감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송인혁과 소지산은 아직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음에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풍기는 기세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훌륭한 보상을 받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사람이 거의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던 수준 높고 격조 있는 대결이 시작되 었다.

송인혁의 검은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부드럽게 소지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는데,그 동작이 어찌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던지 한바탕 춤사위를 보는 것 같았다. 매화검법 중의 매지만장이 이토록 유려한 초식인 줄은 화산파의 고수들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소지산의 검이 거의 동시에 송인혁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소지산이 펼친 것은 유운검법 중의 배운축월이었는데,빛살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초식이어서 마치 한 가닥 섬전이 쏘아져 오는 것만 같았다.

속도로만 보자면 송인혁의 검이 먼저 닿기도 전에 소지산의 검이 상대의 어깨를 뚫어버릴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검을 거두고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검이 자신의 목덜미를 날아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이마를 향해 거침없는 반격을 가하던 첫 번째 비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드럽고 유연한 대응이었다.

두 사람의 동작은 하나하나가 정교하면서도 부드러웠고,절대로 거칠거나 상식을 벗어난 난폭한 초식운용이 없었다.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를 직접적으로 노리거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공격만 하는 무모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치열함은 다소 떨어진 듯했으나,대신에 현란한 검의 움직임과 민첩한 몸놀림,그리고 시의적절한 초식운용으로 볼거리는 훨씬 더 많았다.

자연히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흥미진진함과 만족감이 어릴 수밖에 없었다.

유혈낭자하고 살벌한 싸움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조차 불안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이번 회람연은 비록 양 파에게는 커다란 비중이 있는 무대이 기는 했지만,명목상으로는 엄연한 비무전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피가 난무하고 생사를 오가는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잔뜩 기대를 가지고 양 파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에게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두 사람의 대결 모습은 눈을 만족시키면서도 마음의 부담까지 덜어주는 정말 바람직한 광경이었다.

송인혁은 당초의 말대로 매화검법만을 펼쳤다.

원래 매화검법은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각각의 초식이 세 가지의 변초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칠십이초로 된 검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칠십이 개의 변초에서 파생되는 변화는 거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화산파 제자들 사이에서는 매화검법을 완벽하게 익히는 건 세상의 모든 일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응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매화검법이었다.

화산파에서 매화검법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난매신검 해정설이었다. 해정설의 매화검법은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워서 그가 매화검법을 시전할 때면 마치 사방에서 매화꽃이 휘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하나 해정설의 검은 그 화려함에 비해 실속이 떨어져서 막상 다른 사람과 대결할 때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실제로 해정설은 검법에 비해 싸움 실력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매화검법 자체의 위력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자들이 많았다.

매화검법이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전에서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휩싸여 매화검법을 등한시하는 화산파의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 송인혁이 펼치는 매화검법은 해정설 같은 화려함은 없었지만,깔끔하고 정교해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도 송인혁은 앞으로 곧장 일검을 내지르고 있건만,소지산의 눈에는 수십 가닥의 검광이 자신의 상반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 줄기로 뻗어오는 듯 보이는 검의 끝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상반신 중 어느 부위로도 공격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함 속에 복잡하고 정교한 변화를 담고 있는 이 초식은 매염일선이라는 것인데,송인혁이 펼치자 천하의 어떤 절초에도 뒤지지 않는 무서운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같은 매염일선 초식을 해정설이 펼쳤다면 폭발하듯 화려한 검광이 수놓아지는 가운데 상대의 상체중 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려왔을 것이다. 해정설의 입장에서는 매염일선의 ‘염(離)’이 의미하는 바가 그러한 화려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자신이 펼치는 것이 매염일선의 진정한 묘의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송인혁의 사부인 선우정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염’ 한 글자만 볼 게 아니라, ‘매염(梅齡)’을 덧붙여 생각하면 결국 ‘매화의 요염함’이란 그러한 화려함이 아니라 은은한 가운데 풍기는 한 줄기 그윽함이라고 보았다. 직접적으로 상대의 눈을 현란하게 할 정도로 눈부신 공격을 가하는 것보다는 한 줄기 매화향처럼 미묘하게 움직여 상대로 하여금 어디를 노리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매염일선의 극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 중 누구 의견이 더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선우정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은 송인혁이 어떤 의도로 매염일선을 펼친 것인지는 이 자리의 누구라도 쉽게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훌륭하게 적중하고 있다는 것도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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