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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80화


제 352 장 수구초심(首丘初心) (3)

유난히 새하얀 얼굴에 짙은 검미, 그리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준수한 용모의 그 청년은 다름 아닌 두기춘이었던 것이다.

종남파를 배반하고 화산파의 일대제자가 되었던 두기춘이 왜 종남파의 지척에서 황하삼흉과 혈전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소지산은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두기춘의 모습에 묘한 감흥과 울컥하는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녀석. 많이 컸구나.’

종남파에 있을 때 워낙 친하게 지내던 사이여서인지 문파를 배신한 배반자임에도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그리움의 감정이 먼저 솟구쳤던 것이다.

앳된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던 예전에 비해 외모는 한결 성숙해져 있었고, 체구 또한 건장해져 있었다.

무공실력은 어떠한가? 종남파 제자들 중에서 진도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던 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건만, 지금 그는 악명이 자자한 그 유명한 황하삼흉 중의 두 사람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늦은 진경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왔던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소지산으로서는 뒤늦은 그의 성장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나 현재의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두기춘은 비록 황하삼흉과 맞서 선전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들보다 결코 우세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황하삼흉 중 한 명을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황하삼흉은 화산파의 일대제자 출신으로, 비록 거친 성정 때문에 오래전에 파문(破門)을 당하고 화산을 쫓겨나 황하 일대를 횡행하는 흑도의 무리가 되었으나 그 무공실력만큼은 강호의 절정고수들에 못지않았다.

두기춘은 방취아를 따라잡고 그녀를 욕보이려는 황하삼흉의 뒤를 따라가 방심한 사이 그들 중 한 명을 암습으로 제거했으나, 다른 두 명의 합공에 밀리면서 조금씩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황하삼흉은 이번 일의 책임자로 선정되었던 두기춘이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하고 있다가 불의의 일격을 받고 형제 한 사람을 잃었기에 분노와 살심이 거의 폭발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두기춘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는 셋째인 색흉(色兇) 막기문(莫紀門)이었다. 막기문은 별호 그대로 이쁜 여인만 보면 음심(淫心)을 이기지 못하는 희대의 색마로, 이번에도 방취아의 미색에 끌려 그녀를 외딴곳으로 몰고 가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두기춘의 공격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실로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두기춘이 갑작스럽게 암습했다고 해도 그가 색정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그토록 맥없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하삼흉의 다른 두 사람은 대흉(大兇) 막기홍(莫紀洪)과 간흉(奸兇) 막기선(莫紀宣)인데, 그들은 항렬로 보면 검단현과 같은 배분이었다. 실제로 화산파에 있을 때는 검단현과 함께 장차 문파를 이끌 인재로 주목받을 정도였으나, 곧 그들의 간악한 성품과 잔인한 면모가 드러나면서 결국 화산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화산파에서는 높은 무공을 지닌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아쉬워서 그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종남파를 습격하는 일에 기용된 고수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겉으로는 화산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은연중에 연줄이 닿아 있는 인물들이었다.

화산파 뿐 아니라 대부분의 명문정파에서는 이와 같이 문파의 비밀스런 일을 처리해주는 자들이 존재했다. 심지어는 일부러 멀쩡한 제자를 공개적으로 파문시키고 사실은 은밀히 사주하여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두기춘은 자신이 한때 믿고 의지했던 소지산의 연인인 방취아가 황하삼흉의 공격에 빈사지경에 처해 있는 걸 보고는 막기문을 암습하여 살해하고 그녀를 간신히 구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의 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의식을 잃은 그녀를 절벽 한쪽의 작은 동굴에 내려놓고 그 앞을 막아선 채 황하삼흉의 다른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그들의 공세에 맞설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정이 악화되어 지금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막기홍과 막기선은 막내인 막기문의 죽음에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기에 두기춘은 그들을 상대하는 데 더욱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 명이었다면 흥분한 상대를 오히려 쉽게 제압했을지 모르나, 두 명의 공세가 쉴 새 없이 이어지자 막는 것에만 급급하여 제대로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두기춘은 막기선의 살인적인 일격을 간신히 피해냈으나, 뒤이어 날아오는 막기홍의 날카로운 일검에 결국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큭!”

차가운 검날이 자신의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오는 섬뜩한 촉감에 두기춘은 눈을 부릅떴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막기홍을 향해 일검을 내뻗었다.

막기홍은 그 검을 피하면서 옆구리에 찔러 넣은 장검을 교묘하게 비틀어 뺐다. 막기홍의 검은 끝이 살짝 구부러진 기형검이어서, 그 바람에 옆구리의 상처가 쩌억 벌어지며 시뻘건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옆구리가 갈라지는 지독한 통증에 두기춘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막기선이 두기춘의 목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왔다.

마침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소지산이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 속으로 터져 나오는 외침을 집어삼켰다.

‘안돼!’

두기춘은 사력을 다해 목을 비틀었으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팟!

선혈이 하늘 높이 솟구치는 가운데 두기춘이 목을 부여잡고 주춤 물러서는 순간, 막기홍의 기형검이 그대로 그의 배를 파고 들어갔다.

“헉!”

두기춘의 준수한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자신의 배를 관통한 기형검을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막기홍은 그런 두기춘의 얼굴을 노려보며 살기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맛이 어떠냐?”

그는 두기춘의 배를 뚫고 들어간 검을 다시 비틀어 잡아 뽑으려 했다. 그렇게 되면 끝이 구부러진 기형검의 특성상 두기춘의 내장은 벌어진 상처와 함께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소지산이 장내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날아온 소지산은 아직도 두기춘의 배에 검을 쑤셔 넣고 있는 막기홍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파파파팍!

뒤늦게 소지산의 출현을 알아차린 막기선이 그를 제지하려 검을 날렸으나, 소지산은 그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막기홍을 향해 있는 전력을 기울여 살초를 펼쳤다.

황급히 두기춘의 배에서 검을 뽑아 대항하려던 막기홍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배를 관통당한 두기춘이 양손으로 그의 검날을 꼬옥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검을 잡아 뽑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 빌어먹을!”

막기홍은 검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손을 놓고 물러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소지산의 검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훑고 지나간 후였다.

파악!

“크악!”

상반신이 온통 피범벅이 된 막기홍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소지산 또한 완전히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막기홍을 공격하느라 막기선의 검을 막지 못했기에 등에 일검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 소지산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막기홍을 쓰러뜨린 여세를 몰아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막기선은 소지산이 자신의 공격은 무시한 채 형인 막기홍을 베어 넘기자 이를 부드득 갈며 재차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나 그 순간, 눈앞에 섬광이 번쩍하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인후혈을 파고드는 느낌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비명도 없었다. 목을 검에 관통당한 자세로 막기선은 소지산을 노려보고 있다가 검이 뽑혀 나오자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종남파의 비전인 색혼검결로 단숨에 막기선을 제거한 소지산은 등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기춘에게로 달려갔다.

두기춘은 막기홍이 쓰러진 다음에야 비로소 검을 움켜쥔 손을 놓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직도 그의 배에는 막기홍의 검이 등 뒤까지 삐져나와 있었으나, 소지산은 그 검을 함부로 뽑을 수가 없었다. 검봉이 구부러진 기형검의 모습을 보고 그 검이 뽑혀지면 어떠한 참상이 벌어질지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등 뒤로 삐져나온 검 때문에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 두기춘의 몸을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사제!”

그의 애타는 음성을 들었는지 감겨져 있던 두기춘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소지산의 얼굴을 확인한 두기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소 사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두기춘의 얼굴에는 거무스름한 빛이 가득했다. 소지산은 그것이 죽음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지금의 그가 두기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속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두기춘의 상세가 너무나 극심했던 것이다.

“사제.”

“방 사매는 무사해……. 내가 뒤쪽의 동굴에 데려다 놨거든…….”

소지산은 입으로 시커먼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웃고 있는 두기춘을 향해 고마움의 감정이 진하게 담긴 음성을 토해냈다.

“잘했다.”

두기춘의 눈에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이렇게 사형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항상 사형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두려워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소지산은 그 말에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기춘은 귀공자같이 수려한 용모와는 달리 홀어머니 밑에서 모진 고생을 하며 자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결국 그 때문에 진산월이 먹어야 할 만년삼정까지 훔쳐 달아난 문파의 배반자가 되기는 했으나, 그전에는 누구보다 충실한 종남파의 제자였다. 특히 소지산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메어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때……. 내가 종남산을 찾아갔을 때……. 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어.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거야. 거기서 사형들 중 한 사람을 쓰러뜨려야만 화산파에 정식으로 입문시켜 주겠다고 한 거지. 난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어……. 매 사형한테 정말 미안했다고 전해줘.”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아. 너는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니었지. 모두 알고 있을 거야. 매 사형도 틀림없이…….”

그 말을 하면서 소지산은 조금 전에 보았던 괴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헤어진 지 삼 년이 넘었다고 해도 친형제보다 더욱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거늘.

두기춘은 소지산의 손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나 이제 정말 죽는 건가? 내가 죽으면…… 기억해 줄 거지? 비록 나쁜 놈이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친한 사이였다고 생각해 줄 거지?”

“넌 나쁜 놈이 아니야. 그건 나도 알고 있지.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어. 단지 너는 길을 잘못 들어섰을 뿐이야.”

두기춘의 눈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이제 사형 얼굴도 잘 안 보여……. 사형. 날 미워하지 마.”

“물론이지. 누가 뭐래도 넌 내 사제야.”

“그렇지?”

두기춘은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싸늘히 식어가는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소지산은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때 두기춘의 나이는 불과 스물셋.

종남파를 뛰쳐나와 화산파의 일대제자가 된 후 뛰어난 외모와 무공에 대한 탁월한 재질로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채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결국 종남산의 이름 모를 산자락에서 차디찬 시신이 되어 스러지고 말았다.

훗날 그는 진산월에 의해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로 정식으로 인정받았으며, 비로소 종남파의 뒷산에서 편히 몸을 뉘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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