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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81화


제 353 장 모옥괴인(茅屋怪人) (1)

북망산 위에 줄지어 늘어선 무덤들은

오랜 옛날부터 낙양성을 마주 보고 서 있네.

성안에는 밤낮으로 노래와 종소리가 울리는데,

산 위에는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리는구나.

北邙山上列墳塋 萬古千秋對洛城,

城中日夕歌鐘起 山上惟聞松柏聲.

북망산은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그리 크지 않은 작고 평범한 산이었는데, 후한(後漢) 이후 많은 왕족과 명사들이 이곳에 묻히면서 언제부터인가 무덤과 죽음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대낮의 북망산은 유람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인적마저 끊겨 다소 황량해 보였다.

그런 북망산의 동쪽 기슭을 거침없이 오르는 한 인영이 있었다.

한쪽 허리춤에 고색창연한 장검을 꽂고 있는 그 사람의 몸놀림은 유유자적한 듯하면서도 빠르고 경쾌해서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았다. 훤칠한 키에 고적한 눈빛, 왼쪽 뺨의 흉터가 인상적인 그 사람은 당금 강호 제일의 고수로 불리고 있는 신검무적 진산월이었다.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거대문파로 떠오르고 있는 종남파의 장문인이면서 또한 중원 무림의 선봉 격인 선반을 맡고 있는 그가 인적이 드문 북망산에 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당산을 떠난 후 진산월이 이곳에 오기까지는 육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진산월은 맹가루의 팽가고택에서 적금쌍마를 제거한 것 외에도 두 군데를 더 돌아다니며 서장 무림과 연관이 있는 자들을 제거해 왔다. 그중에는 신강에서 명성을 날리던 십육사의 고수도 있었고, 서장 무림의 끄나풀이 되어 강호에서 암약하고 있던 자도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상당히 빡빡하고 고된 여정이어서 동행했던 마적풍은 물론이고 강철 같은 체력을 지닌 전흠조차 최근에는 다소 지친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진산월은 피곤해하는 마적풍과 전흠을 쉬게 하고 혼자 북망산을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진산월이 북망산에 온 이유는 차복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무당산을 떠날 때 차복승은 북망산에서 한 사람을 만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대신 유중악의 행방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오늘 저녁에는 낙양에서 이정문을 비롯한 선반의 고수들을 만나기로 했기에, 지금이 아니면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만남 이후에는 흑갈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기에 지금보다 더욱 힘든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차복승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이번 일 자체에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저녁에 이정문을 만나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북망산의 제법 아름다운 절경도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북망산의 동쪽은 다른 곳에 비해 산세가 가파르지는 않았으나 대신 수림이 짙게 우거져서 상당히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나 산기슭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주위의 지세가 급격히 험해지며 제법 가파른 벼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벼랑들 사이로 하나의 작은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십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찔한 절벽 사이에 숨듯이 자리한 그 계곡은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며 따사로웠던 공기가 급격히 서늘해졌다.

계곡은 폭이 그리 넓지 않아서 장정 두 사람이 간신히 어깨를 맞대고 들어갈 정도였는데, 주위의 수림이 워낙 울창해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계곡을 십여 장쯤 들어가자 조금씩 폭이 넓어지더니 급격하게 구부러진 경사로를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제법 넓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터 뒤쪽에는 가파른 절벽이 삥 둘러있어 이 일대는 자연스레 작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중앙에 모옥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그토록 짙게 우거져 있던 수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낮게 자란 풀밭 한가운데 작은 모옥이 자리하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세외의 선경(仙境)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모옥은 방 한 칸과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는 아주 작고 초라한 것이었으나, 일대의 경관이 워낙 깔끔하고 수려해서인지 다른 어떠한 고루거각보다도 주위의 풍광에 더욱 어울려 보였다.

진산월이 모옥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모옥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데, 어느 고인이 이 외진 곳까지 오셨소?”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말꼬리가 분명하고 음성 자체에 기이한 힘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귀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차씨 성의 노인께 부탁을 받고 온 진모라 합니다.”

굳게 닫혀 있던 모옥의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무척이나 체구가 건장한 노인이었다.

나이는 육십 대쯤 되었을까? 꼿꼿하게 곧은 자세에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젊은 나이에는 적지 않은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반백의 머리카락에 눈가에는 잔주름이 살짝 있지만, 눈빛이 맑고 깨끗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노인은 진산월의 전신을 찬찬히 훑고는 이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언뜻 노인의 주름진 눈에 경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기도가 뛰어난 젊은이는 정말 모처럼 보는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알 수 있겠나?”

노인의 행동거지나 말투 하나하나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아함과 고상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거나 일부러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노인이 호감을 표하는데 굳이 정체를 숨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종남파의 진산월이라 합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이내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군. 자네가 바로 종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이라는 바로 그 친구였군.”

진산월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된 지는 벌써 사 년이 되었다. 그런데 노인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노인은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듯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벌써 상당한 시일이 흐른 게로군. 이해하게, 이곳에 홀로 있다 보면 종종 세월의 흐름을 잊게 된다네.”

노인의 말에서 진산월은 이 노인이 적어도 자신이 종남파의 장문인이 된 후에 이 모옥에 기거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는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비록 경관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절경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는 노인이 이런 외진 곳에서 삼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이내 손으로 안을 가리켰다.

“내 정신 좀 보게,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계속 밖에 세워두고 있었군. 안으로 들어오게. 괜찮다면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세.”

“폐를 끼치겠습니다.”

“폐라니 당치 않네. 나는 자네 같은 친구가 오기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네.”

“그 말씀은…….”

진산월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노인은 모옥의 하나뿐인 방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방은 단출했고, 별다른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 십여 권의 서책만이 있을 뿐이었고, 잘 개어놓은 침구와 작은 다탁(茶卓)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은 능숙한 솜씨로 다탁에 있는 주전자에 차를 우려내고는 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이 계곡 뒤편에서 따낸 어린 싹을 우려낸 것일세. 이름은 없지만, 그런대로 마실 만할 걸세.”

진산월은 차분한 태도로 그가 내민 차를 마셨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기가 무척이나 단아하면서도 정갈하여 마음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했다.

“좋은 차로군요.”

노인은 주름진 눈에 살짝 미소를 그려냈다.

“천하일미(天下一味)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곳에서 맛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것이지. 이 차가 아니었으면, 이곳 생활이 무척이나 무미건조했을 걸세.”

“한 잔 더 마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노인은 진산월이 내민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주었다.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몇 번이나 차를 마신 다음에야 노인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혼자 마시는 차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차는 더욱 좋군.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서 더 그런가 보네.”

“정말 잘 마셨습니다.”

진산월이 찻잔을 내려놓자 노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한동안 의미를 알기 어려운 투명한 시선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침착한 젊은이로군. 자네 같은 나이에 그러한 정력(定力)을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일세.”

“과분한 말씀입니다.”

“빨리 용건을 말하고 내 정체에 대해 묻고 싶었을 텐데, 오히려 내가 조바심을 느낄 정도로 차분하니 나로서는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일세.”

“별말씀을. 모처럼 좋은 차를 마셔서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말해보게. 차 대협이 자네에게 무슨 부탁을 했나?”

“말씀 한 마디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게 무언가?”

“차 대협께선 ‘결정했다’라는 한 마디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노인의 눈꼬리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결정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굳게 닫힌 그의 눈꺼풀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단정하게 앉은 채로 묵묵히 노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노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때 그의 눈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하고 미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노인은 그러한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 줄 아나?”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말을 전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서로 주고받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흐음!”

노인은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인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왔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자네의 입에서 그 말을 듣게 되니 마음속의 격동을 참기 힘들군. 자네는 그 짧은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걸세. 그리고 내가 그 말을 듣게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해 왔는지도.”

“…….”

“그것은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오랜 숙원(宿願)이 해결되었다는 소리일세. 그리고 내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며, 아울러 그 짐을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산월의 반문에 노인은 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노인은 나직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모용단죽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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