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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86화


제 355 장 작전모의(作戰謀議) (1)

낙양의 밤거리는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등(燈)과 북적이는 사람들의 물결이 거리를 한층 더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낙양의 동쪽에 있는 불망원(不忘院)은 원래는 하(河)씨 성을 가진 부자의 별장이었다. 그 부자가 나이를 먹자 젊었을 때 사별(死別)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별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 사당(祠堂)을 짓고 별장 이름도 불망원이라고 바꾸게 되었다.

부자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건재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잘 관리가 되었으나, 손자 대에 이르러서 가세가 기울자 관리를 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폐가(廢家)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좀처럼 인기척이 없던 불망원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부터 한두 인영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밤이 깊어갈수록 점차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그들의 동작은 하나같이 은밀하고 신속했으며, 서로 안면이 있는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때면 소리 없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경(二更)이 가까워 올 무렵에는 그 수가 거의 서른을 넘을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떠들거나 시끄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 불망원 일대는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다시 어둠을 뚫고 하나의 인영이 불망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훤칠한 키에 새하얀 백삼을 입은 청년이었는데, 유난히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과 왼쪽 뺨의 깊은 흉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백의 청년은 잠시 불망원 주위를 둘러보더니 훌쩍 신형을 날려 불망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표홀하고 날렵했던지 그의 몸이 불망원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아무런 소리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백의 청년이 나타나자 불망원의 여기저기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진 장문인?”

백의 청년은 다름 아닌 당금 무림의 제일검객으로 명성이 높은 신검무적 진산월이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선반의 집결지가 바로 이 불망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도착해 있던 선반의 고수들이 앞을 다투어 인사를 하자 진산월은 짧게 답례하고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두 도착했소?”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선반의 부반주를 맡고 있는 산수재 이정문이었다.

“현조의 조장인 복호도 팽 소협을 제외하고는 모두 왔소.”

언뜻 진산월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진산월이 복호도 팽철영을 본 것은 선반의 출정식이 처음이었으나, 잠깐 만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충후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인물인지 알 수 있기에 설마 그가 약속을 어기고 모임 장소에 나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팽 소협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현조의 다른 고수들과 함께 낙양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는데, 오늘 오후에 가문의 급한 연락을 받고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오.”

진산월은 이정문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기에 재차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알고 있소?”

이정문은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사실은 요즘 흑갈방이 검보에 이어 하북팽가의 영향권까지 동시에 건드리고 있어서 두 문파 사이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소.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하오.”

“팽 소협을 다시 팽가로 불러들이려는 거요?”

“그보다는 좀 더 큰 걸 바라는 것 같소.”

이정문은 에둘러 말했으나,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선반의 힘을 빌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거로군.’

선반은 진산월 한 사람만으로도 능히 천하의 어떤 세력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설사 그를 제외한다 해도 선반의 서른세 명 중 누구 하나 뛰어난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고, 한 문파의 기대주이거나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들이었으니 그 힘은 어떤 문파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팽철영 한 사람의 힘은 미비하지만, 그를 통해서 진산월이 이끄는 선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하북팽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산월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팽철영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일단 다른 조의 조장들을 불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로 했다.

무당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육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중원무림과 서장무림 간의 충돌이 조금씩 격화되어 세상의 분위기는 상당히 뒤숭숭해져 있었다. 게다가 선반이 무당산에서 낙양까지 이동하면서 중원의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던 서장무림의 무리들을 색출하면서 적지 않은 소요가 일어났기에, 이제는 누구라도 조만간 서장무림과 거대한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산월은 각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소신승 정화와 창천신룡 남해일, 옥검랑군 마종의에게서 각 조가 무당산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올 때까지의 과정을 전해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서장무림에 포섭된 것으로 의심되는 문파를 한두 군데씩 지나쳐 왔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실제로 서장무림과 연결될 것으로 확인되어 한바탕 혈전을 벌여야 했다. 그 와중에 죽거나 크게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으나, 서장무림의 마수(魔手)가 중원의 곳곳에 뻗쳐 있음이 확실해졌기에 자연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수인(下手人)들을 제거해 봐야 어차피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문제는 그 근본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서장과 중원은 그 지리적 여건이나 문화의 차이로 인해 그동안 크고 작은 싸움을 벌여왔다. 하나 그 충돌이 이토록 심화된 것은 아난대활불이 천룡사의 무리들을 이끌고 중원을 쳐들어온 후부터였다.

아난대활불은 조익현의 제자였으므로 결국 그는 조익현의 사주를 받고 중원을 침공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조익현을 제거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일까?

지금 서장 세력을 이끌고 있는 자는 아난대활불의 후예로 알려진 야율척이었다.

하나 이상하리만치 야율척과 조익현과의 관계는 강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익현과 야율척의 그간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묘한 엇갈림과 비틀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그것이 단순히 야율척과 조익현의 강한 개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 사이에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과연 조익현이 제거된다면 야율척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반대로 야율척이 쓰러진다면 그 후에도 조익현은 여전히 중원을 노릴 것인가?

처음으로 진산월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의구심을 느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정말 중요한 무언가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장 무림의 전초세력은 흑갈방이다. 단순한 전초세력 정도가 아니라 서장의 고수들이 대거 투입되었기에 ‘작은 서장무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만약 흑갈방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서장무림에 커다란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중원을 노리는 야율척의 야심도 적지 않게 뒤흔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정문은 자신이 조사한 흑갈방의 정보와 그들의 수뇌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현재 흑갈방은 검보는 물론이고 하북팽가의 세력권까지 같이 넘보고 있소. 두 문파가 모두 하북성에 있을 뿐 아니라 친분이 두터운 편이기에 함께 상대하려는 모양인데, 그 때문에 하북성 전체가 크게 요동을 치고 있소.”

진산월은 물론이고 다른 조장들 또한 눈을 빛내며 이정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흑갈방의 방주는 흑의사신 위태심이란 자인데, 한때 서장제일의 지자로 불렸던 천애치수 단목초의 제자이며 또한 최고의 전략가로 알려진 인물이오. 부방주는 그와 마찬가지로 단목초의 제자이며 또한 그의 사제인 화면신사 백석기라는 자요.”

이정문은 두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흑갈방에는 천지쌍노라 불리는 두 명의 봉공이 있는데, 그들은 개개인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지닌 절세의 고수들이오. 그들 중 한 명에게 검보의 전대보주였던 검왕 서문 노선배께서 패했다고 하니 얼마나 가공할 실력을 지닌 자들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요.”

서문동회가 흑갈방의 봉공 중 한 사람에게 패했다는 말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진산월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문동회는 전성기 시절에는 강호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검객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검법의 소유자였기에 그들은 새삼 흑갈방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무공 흔적으로 보아 우리는 그들이 야율척의 등장 이전에 서장의 최고고수로 군림했던 천산이괴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소.”

“……!”

“그들 외에 여섯 명의 호법과 열두 명의 순찰이 있는데, 모두 뛰어난 실력자들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우두머리인 수석 호법과 총순찰이 요주의 인물들이오. 수석 호법은 혼천마군(混天魔君) 탁세호(托世虎)란 자인데 십이기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서운 고수이고, 총순찰은 십육사에서도 첫째둘째를 다투는 무영천자(無影天子) 비일염(費一炎)이오. 호법들 중에는 팔황일독 표성락과 낭아신검 채병익이 경계해야 할 자들이고, 순찰 중에는 혈전사마 노씨형제를 주의하면 될 거요.”

이정문이 하나둘씩 흑갈방 수뇌들의 정체를 밝힐 때마다 중인들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들 개개인의 면면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과연 자신들의 힘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본 듯 이정문이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무공실력만 놓고 본다면 천지쌍노 외에는 우리가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소. 그리고 천지쌍노를 상대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들로 인해 너무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소.”

그 말에 중인들은 퍼뜩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고는 이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진산월은 그들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이정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번에 무당산의 집회가 끝난 후 그들 중 상당수가 한 곳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소. 아마 무림맹에서 자신들을 노린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전에 먼저 검보와 하북팽가를 공격할 속셈인 듯하오.”

알려진 면면으로 보아 만약 흑갈방의 수뇌들이 모두 모인다면 검보와 하북팽가로서는 절대로 그들의 공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절로 마음이 급해진 창천신룡 남해일이 급히 물었다.

“그들이 모인다는 곳이 어디요?”

“하북성 형수(衡水)요.”

형수라면 검보가 있는 보정의 지척이었다.

“그럼 큰일 아니오?”

남해일이 다급한 표정으로 묻자, 이정문이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아직 그들 수뇌가 모두 모이려면 이삼일의 시간이 있소. 게다가 그들이 모두 모인다 해도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려면 며칠 더 시간이 소요될 거요. 이곳에서 부지런히 말을 달리면 늦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낙양에서 형수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제야 남해일을 비롯한 중인들의 굳었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이정문은 그런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작정 안심할 수만은 없소.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아무리 진 장문인이 있다 해도 우리의 전력만으로 흑갈방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소. 우리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모두 모이기 전에 수뇌들만을 각개격파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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