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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89화


제 356 장 전운밀포(戰雲密布) (2)

대청을 나온 비일염이 향한 곳은 건물 밖의 죽림이었다. 죽림을 나온 비일염의 신형이 갑자기 빨라졌다.

휙!

한 줄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죽림 밖의 담장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보운사의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아무런 현판도 달려 있지 않은 이 건물은 보운사의 주지인 명정(明靜)스님의 거처였다.

명정 스님은 원체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데다 불심(佛心)이 깊어서 불경을 읽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외부로의 출입은 물론이고 외인(外人)과의 접견도 거의 없어서 보운사의 승려들 외에는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보운사가 지금의 성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보운사의 경내에 있는 특이한 모양의 보운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물 앞으로 다가간 비일염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나요.”

지금까지 보였던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묵직하고 신중한 음성이었다.

“들어오게.”

비일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하나와 의자 서너 개, 그리고 한쪽에 작은 침상이 놓여 있는 아담한 방이었다.

의자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한쪽은 인자한 얼굴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승이었고, 다른 한쪽은 짙은 흑의를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었다. 흑의 청년의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두 눈이 유난히 맑고 차가워서 쉽게 다가가지 못할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노승이 조용히 웃었다.

“이 시각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을 보니 무언가 중요한 소식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온화한 웃음이었으나, 그것을 본 비일염의 표정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렇게 웃지 마시오. 당신의 조천소(嘲天笑)를 보는 날이면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란단 말이오.”

“허허……! 자네의 담이 그렇게 약한 줄은 미처 몰랐네. 앞으로는 자제하도록 하지.”

말과는 달리 노승이 더욱 환하게 웃자 비일염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노승은 보운사의 주지인 명정이었다.

하나 그의 진실한 신분은 서장 십이기 중의 일인인 혼천마군 탁세호였다. 탁세호는 온화하고 자상한 외모와는 달리 일단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무서운 손속의 고수였다. 그의 무공은 서장에서도 정평이 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십이기 중에서도 최고 수준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특히 그의 조천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심령을 뒤흔드는 절세의 마공(魔功)이어서 적지 않은 고수들이 무심결에 그 마공에 홀려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의 손에 비명횡사하곤 했다.

탁세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게. 주인 된 입장에서 손님을 서 있게 할 수는 없지.”

의자에 앉으면서도 비일염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십육사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일염은 십이기에게 은근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이를 알아차린 탁세호가 이런저런 수법으로 그를 자극하고는 했는데, 아직은 탁세호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 비일염으로서는 그의 도발에 그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사전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탁세호가 조천소를 펼치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자칫 무심코 있었으면 한바탕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특별한 원한이 없는 탁세호가 살수를 쓰거나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겠지만, 조천소에 홀려 커다란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짓을 벌인다면 그 창피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자리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일염의 시선이 그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흑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방주. 찾았소이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그 순간 흑의 청년의 두 눈에서 횃불 같은 신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이정문 말이오?”

“그렇소.”

“그가 어디에 있소?”

“이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오가장에 있다고 하오.”

이어 비일염은 자신이 이정문의 행방을 알게 된 경위를 소상하게 밝혔다.

흑의 청년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비일염은 은근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이정문의 멱줄을 딸 절호의 기회요. 그는 아마 자신의 행방이 우리에게 노출된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거요. 내게 맡겨준다면 오늘 밤 자정이 되기 전에 이정문의 머리통을 방주 눈앞에 가져다 놓겠소.”

흑의 청년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비일염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탁세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정문이라. 월척을 낚았군. 하나 고기가 너무 크면 오히려 낚시꾼이 먹히는 일도 종종 벌어지는 법이지.”

비일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힐끔거렸다.

“탁 형이 끼어들 일은 아니오.”

탁세호는 느긋하게 웃었다.

“허허. 내 직위가 총호법임을 잊은 모양이군. 총호법이란 방주를 대신하여 이런 일을 해결하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란 말일세.”

“이정문 정도 되는 고기라면 충분히 내 손으로 낚아 올릴 수 있소. 굳이 탁 형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오.”

탁세호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거야 자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그럼…….”

순간적으로 욱하여 그럼 누가 결정하느냐고 물으려던 비일염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또다시 탁세호의 격장지계에 빠질 뻔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정문과 관련된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 흑의 청년뿐이었다. 왜냐하면 흑의 청년이야말로 천애치수 단목초의 제자이며, 흑갈방의 방주인 흑의사신 위태심이기 때문이었다.

위태심은 단목초의 제자들 중에서도 단목초의 신임이 각별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단목초를 살해한 원흉인 이정문에 대한 원한이 다른 누구보다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정문의 행방을 찾았다는 비일염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위태심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묵묵히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돌로 된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것 같아도,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그의 두뇌가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순간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위태심은 전략의 천재로서, 계략을 꾸미고 작전을 짜는 일에는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사부인 단목초조차도 ‘일을 꾸미는 것에는 나도 그를 당하지 못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 위태심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는데, 머리를 굴릴수록 몸의 움직임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움직임이 적어져서 마침내는 지금처럼 꼼짝도 않고 상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비일염과 탁세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사색을 깨뜨리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없고 서장에서는 제왕과도 같은 존재로 군림하는 무영천자와 혼천마군의 이런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그만큼 위태심이 서장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위태심이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때까지도 비일염과 탁세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태심은 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또 두 분의 귀한 시간을 적지 않게 뺏은 모양이오.”

탁세호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말씀을. 방주께서 사색에 잠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서 아무리 보아도 지겨운 줄을 모르겠소.”

비일염이 뒤질세라 재빨리 입을 열었다.

“탁 형이 말씀이 맞소. 나도 방주께서 말하기 전에는 언제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젊은 여인도 아니고 나이 드신 두 분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구려.”

위태심의 농담에 탁세호는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허허. 방주의 입담이 갈수록 좋아지는구려. 그나저나 이번 일에 대해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소?”

“결정이랄 게 있겠소? 어차피 이정문의 행방을 안 이상 그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오?”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셨소?”

위태심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일이 과연 우연히 운(運)이 좋아서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잠시 고민을 했소.”

“또 다른 무언가라니?”

“어떤 일은 단순히 운이 좋다는 것만으로는 치부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 말이오.”

위태심의 말 속에 묘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탁세호가 은근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운이 아니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요?”

“우연(偶然)이 아니라면 필연(必然)이겠지요.”

탁세호의 얼굴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방주는 이번 일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거요?”

“그저 그럴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본 것뿐이오.”

탁세호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소?”

탁세호는 물론이고 비일염도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위태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위태심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운이 좋은 것이라면 모처럼 찾아온 그 운을 놓치지 않도록 꼭 움켜잡아야겠소.”

“운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그 또한 넓게 보면 운 좋은 일에 해당하는 일이오. 누군가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상대를 옭아맬 수 있으니 말이오.”

탁세호는 무릎을 탁 쳤다.

“결국 이번 일은 어떻게 보든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란 말이구려.”

위태심의 얼굴에 처음으로 엷은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야릇한 미소였다.

“그렇소.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단 행방을 알아낸 것만으로 우리는 무척 좋은 운을 가지게 된 것이오. 물론 이정문에게는 지독한 불운(不運)이 되겠지만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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