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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99화


제 360 장 암도진창(暗渡陳倉) (1)

비일염 일행이 후원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정점을 지나 조금씩 잦아들고 있을 때였다.

후원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처음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고, 매캐한 연기와 타오르는 불꽃 때문에 일대의 공기는 지옥처럼 뜨거웠다.

비일염은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빠르게 시신을 살피던 비일염은 시신들 중 고력기를 비롯한 청해삼수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청해삼수는 비록 아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은 아니었으나,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손발 노릇을 충실히 해준 인물들이었다. 특히 첫째인 고력기는 남들보다 눈치가 빠르고 두뇌가 비상하여 비일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 청해삼수가 비참한 몰골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널브러져 있으니 비일염으로서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왔던 탁세호가 고력기의 시신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가까운 사이에게 당했군.”

비일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직접 보면 알 걸세.”

탁세호의 말대로 고력기의 시신을 살펴본 비일염은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거친 음성을 내뱉었다.

“상대의 수공(手功)이 가슴을 뚫고 들어올 때까지도 공격당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군. 이런 한심한 놈! 명색이 강호에서 고수라고 행세하던 놈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장홍패와 탑소극의 시신을 마저 확인한 탁세호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이자들 말고 자네에게 속한 자들이 있지 않나?”

비일염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혈전사마 노씨형제요. 그자들 시신만 이곳에 없소.”

“그럼 이것은 노극량의 혈정수(血鼎手)에 당한 흔적이로군.”

“노극량이 고력기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살수를 써서 살해할 줄은 미처 몰랐소.”

“고력기 외에 다른 자들을 쓰러뜨린 흔적으로 보아 노극량뿐 아니라 다른 세 사람도 모두 솜씨를 부린 게 분명하네.”

비일염은 분기탱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노극량이 살심이 강하고 사소한 원한도 잊지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화를 참지 못하고 같은 편을 살해하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오.”

“단순히 화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탁세호의 시선이 바닥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훑고 지나갔다.

“시신들의 상태를 보니 살수를 쓸 때 추호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네. 뿐만 아니라 누구도 도망칠 수 없게끔 가장 멀리 있는 자부터 공격해서 쓰러뜨렸지. 그래서 단 한 명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 손에 당하고 만 걸세.”

비일염도 누구 못지않게 두뇌가 뛰어난 인물인 만큼 탁세호의 말에 담긴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탁 형의 말은 이것이 즉흥적인 살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란 말이오?”

“그렇게 보이는군.”

“노씨형제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그들은 오래전부터 방주의 사문과 친분이 있는 사이여서 방주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실히 노씨형제는 천애치수 단목초 어른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인물들이긴 하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위 방주보다는 방주의 사형이었던 감종간과 더 가까운 사이였네.”

비일염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감종간? 그 비열한 배역자 말이오?”

감종간은 천애치수 단목초의 대제자로, 흑갈방주인 위태심의 사형이었다. 그는 단목초가 가장 신임하는 제자였음에도 결국 이정문의 협박에 넘어가 이정문이 사부인 단목초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고 말았다. 자연히 그에 대한 서장 무림인들의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배역자와 친분이 있는 자들을 어찌 믿고 방주께서 받아들였단 말이오?”

“그들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으니 방주 입장에서도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 대신 그들에게 중책을 맡기는 일은 피했던 걸세.”

그제야 비일염은 자신에 비해서도 별로 뒤지지 않는 명성을 지닌 노씨형제가 왜 자신의 밑으로 오게 되었는지 숨은 내막을 알 수 있었다.

비일염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감종간은 이미 실종된 지 사 년이 넘어 존재조차 희미해진 인물이오. 노씨형제가 그의 지시를 받고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너무 과한 추측 아니오?”

“그렇긴 하지. 나는 다만 노씨형제가 사전에 무언가 획책하는 게 있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날에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획책이라…… 짐작 가는 일은 없소?”

탁세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았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잊지 말게.”

비일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설마 그들이 이정문을 구출하려고 한단 말이오?”

“이정문을 구하려는지 아니면 직접 처단하려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목적이 이정문에게 있음은 분명해 보이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오늘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걸세.”

비일염은 문득 생각이 난 듯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길은 이미 거의 꺼져 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는 불씨와 화끈한 열기 때문에 후원 일대는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저런 상태라면 설사 암실(暗室)이나 암도가 있다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군. 정말 이정문이 저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탁세호의 시선도 잿더미로 변한 후원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눈앞의 상황을 보니 믿음이 흔들리는군.”

탁세호는 서장 무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일 뿐 아니라 풍부한 강호 경험과 놀라운 심계로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해온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런 탁세호조차도 마음 한구석에 껄끄러움을 느낄 만큼 이정문은 서장 무림인들에게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를 천참만륙이라도 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그의 함정이나 귀계에 빠지게 될까봐 그를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피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정문이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화공에 당해 죽었다고 생각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비일염은 예리한 눈으로 후원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금우신군이 이쪽으로 움직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면 이정문은 바로 그곳에 있을 거요. 어떤 식으로든 금우신군의 행방만 찾아내면 이정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 내 생각이 어떻소?”

탁세호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생각일세.”

“그렇다면 역시 대청에 있던 암도를 따라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소?”

“그건 너무 위험천만한 일일세. 금우신군이 우리가 따라가기 좋게 순순히 암도를 뚫어두었을 리가 없지 않나?”

비일염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내키지 않은 눈빛으로 탁세호를 쳐다보았다.

“탁 형의 생각은 어떻소?”

“금우신군이 아무리 기관진식의 달인이라고 해도 대청과 같은 암도를 여기저기 뚫어놓았을 리는 없네. 그건 너무 대공사(大工事)가 될 테니 말일세.”

비일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 그렇게 되면 공사가 너무 커져서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을 거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후원의 중요성으로 보아 암도는 후원 쪽으로 뚫려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네.”

“탁 형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저 불구덩이 속을 뚫고 들어가 직접 확인해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비일염이 당신도 별수 없지 않느냐는 듯 살짝 비아냥이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으나, 탁세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어렵긴 하지만 확인해 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세.”

“그게 무엇이오?”

탁세호는 천천히 신형을 움직여 불이 꺼져 가는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후끈한 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접근이 불가능해지자 탁세호는 몸을 멈추고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후원의 초입에서 약간 우측으로, 다른 곳보다 약간 지대가 높아서 평상시라면 후원의 정경을 내려다보기 좋은 곳이었다.

탁세호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자 비일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탁 형, 그곳에서 대체 무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탁세호는 오른발을 번쩍 들더니 세차게 지면을 내리찍었다.

쿠웅!

굉량한 음향과 함께 근처의 땅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땅이 흔들리는 위력이 컸는지 멀쩡하게 서 있던 월동문의 담벼락이 절반 가까이나 무너져 내렸다. 실로 놀랍기 이를 데 없는 심후한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비일염은 탁세호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 움찔하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표정이 홱 변했다.

“탁 형은 혹시…….”

탁세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이 정도 불이라면 일대의 지반이 약해져 있을 뿐 아니라 암도 속의 공기 또한 잔뜩 팽창되어 있을 거요. 그러니 외부에서 적당한 자극을 가하기만 하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자욱한 연기와 함께 지면이 움푹 꺼져 들어갔다.

쿠르릉!

탁세호의 두 눈에서 횃불 같은 신광이 피어올랐다.

“땅 속에 숨어 있는 암도라 할지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거요.”

비일염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황급히 지반이 무너진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양손이 세차게 흔들리자 꺼진 지면 사이로 흘러나오던 연기가 사라지며 무너진 지면 아래의 모습이 자세히 드러났다.

“아!”

비일염의 입에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움푹 꺼진 지반 아래에 반쯤 부서진 암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암도에서 흘러나오는 후끈한 공기와 자욱한 연기가 암도 속의 상황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과연 탁 형의 혜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구려.”

은근히 탁세호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비일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탁세호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탁세호는 우쭐하는 기색도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성큼 앞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암도를 따라가 봅시다.”

비일염은 재빨리 탁세호보다 먼저 암도가 무너진 곳으로 가더니 근처의 땅에서 맹렬하게 발을 굴렀다.

쿠웅!

마치 탁세호에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듯 세찬 발구름 끝에 다시 암도의 한쪽을 무너뜨리자 비일염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이제야 비로소 이정문의 목줄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되었구나.”

비일염은 마치 자신의 공이라도 된 듯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계속 발구름을 하여 암도를 무너뜨리고 앞으로 전진해 갔다. 무영천자라는 외호대로 신법에 관한 한은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있는 비일염은 내공 또한 상당한 수준인 듯 내딛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이내 그들은 무너진 암도를 따라 후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미 불길은 모두 꺼져서 후원은 시커먼 잿더미와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들은 암도를 따라 채 열기기 식지 않은 후원으로 깊숙이 전진했다.

다행인지 암도는 후원의 외곽을 따라 우측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뜻 탁세호가 고개를 들어보니 암도가 향하는 곳에는 완전히 타버려 흔적만 간신히 남은 전각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붕과 기둥은 물론이고 문도 모두 소실된 전각은 벽의 일부만이 앙상하게 남아 조금 전의 화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쿠웅!

비일염이 다시 세차게 발을 구르자 암도는 물론이고 벽만 조금 남았던 전각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저기다!”

비일염은 그 무너진 잔해 한쪽에 살짝 드러난 거무튀튀한 철문을 보고는 쾌재를 부르며 그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탁세호 또한 주저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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