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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00화


제 360 장 암도진창(暗渡陳倉) (2)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양손을 휘둘렀다.

파아아…

그들이 연거푸 손을 쓰자 무너진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되며 철문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굳게 닫힌 철문은 아직도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일염은 탁세호보다 한발 앞서서 철문으로 다가가 예리한 눈으로 철문 주위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언뜻 보기에도 철문은 석벽을 파고들 듯이 세워진 것이어서 대청에서처럼 문틀을 부수는 방법으로는 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문틀은커녕 석벽과 철문 사이가 연결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붙어 있어 석벽 전체를 부수지 않는 한 철문을 쓰러뜨리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비일염은 대청에서의 일도 있어서 이번에는 스스로의 위신을 세울 겸해서 먼저 나선 것인데, 당장 해 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모양새가 우습게 되어 버렸다.

불쑥 화가 치민 비일염은 철문을 향해 강력한 일장을 날렸다.

쿵!

요란한 굉음이 나고 돌먼지가 피어오르기는 했으나,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일염은 손바닥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제길. 철문 두께가 적어도 한 자는 넘는 것 같구나.’

비일염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탁세호에게로 돌아갔다. 때마침 탁세호가 성큼 앞으로 다가오자, 비일염은 ‘탁 형도 별수 없을 거요.’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탁세호의 다음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탁세호는 조금 전에 비일염의 장력이 닿은 부분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슬쩍 손을 대어보고는 이내 손을 거두어들였다.

“정말 대단한 열기로군. 이 정도 열기라면 이 안에 누가 있든 살아남을 수 없을 걸세.”

비일염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무작정 열기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오?”

“우리가 화공을 펼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금우신군이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대청에 뚫려 있는 암도가 이곳으로 이어지는 건 탁 형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소?”

탁세호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금우신군이 이 안으로 들어갔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가 굳이 제 발로 저승길을 택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세. 뿐만 아니라 그 대단한 이정문이 저 방에 스스로 갇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일세.”

탁세호의 말을 듣고 보니 비일염도 확실히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탁 형의 생각은 뭐요?”

“저 석실에 다른 출입구가 있는 아닐까 하네.”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소?”

“그래서 저 철문을 빨리 열어야겠네.”

비일염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말이오? 아무리 봐도 철문 두께가 한 자는 될 것 같은데…….”

탁세호가 손으로 철문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자네가 장력을 날렸던 부위를 자세히 보게.”

비일염이 바짝 다가가 시력을 돋우어 보니 철문의 한 부분이 아주 살짝 벌어져 있었다. 너무 미세하여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기 전에는 찾기 힘들 정도였다.

비일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전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이렇게 두꺼운 철문을 부수거나 찌그러뜨릴 위력은 되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탁세호의 다음 말이 그의 머릿속에 든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아무래도 열기 때문에 철문 안쪽의 자물쇠 부분이 녹거나 헐거워진 모양일세.”

비일염은 정신이 번쩍 들어 탁세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비켜 보게.”

비일염이 재빨리 몸을 비키자 어느새 오른손을 쳐든 탁세호가 전신으로 맹렬한 기세를 일으키며 오른손을 앞으로 세차게 내뻗었다.

비일염은 순간적으로 탁세호의 오른손에 희끗한 청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의 독문무공인 대청마력(大靑魔力)을 끌어올린 것임을 알아차렸다.

콰아앙!

조금 전 비일염이 장력을 날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철문과 석벽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철문 한쪽이 움푹 파인 것을 발견한 비일염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탁가의 내공은 정말 심후하구나. 그가 내가 공력만으로는 능히 서천노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무심코 철문에 선명하게 새겨진 손자국을 보고 있던 비일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손자국 옆 부분이 찢어지며 틈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급히 다가가서 그 부분을 살핀 비일염은 탁세호가 새겨놓은 장인이 철문의 손잡이 부분을 정확히 가격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그의 정교한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손잡이 부분은 전혀 돌출되어 있지 않아 겉으로 보아서는 여타 부분과 전혀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철문 뒤편의 자물쇠 부분이 열기로 반쯤 녹은 데다 탁세호의 가공할 장력이 정확하게 그 부분을 강타하여 문틈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비일염은 파여 들어간 부분에 손을 대고 힘껏 밀어보았다.

끄그긍!

둔중한 소리와 함께 굳건하게 잠겨 있던 철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비일염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쿠웅!

마침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활짝 열렸다. 그와 함께 뜨거운 열기를 담은 공기가 화악 밀려 나왔다.

비일염은 열려진 철문 반대쪽의 자물쇠 부분이 거의 파괴된 채 간신히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새삼 탁세호의 안목과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이 열린 석실 안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비일염은 잠시 뜨거운 공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탁세호를 돌아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겠소.”

비일염은 성큼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석실 안은 아직도 열기로 인해 숨을 쉬기 힘들 만큼 후끈했고, 칠흑같이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조광(照光)만 없었다면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비일염은 잠시 입구에 우뚝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실내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창문도 없고 별다른 장식물도 달려 있지 않은 석실 안은 중앙에 수북한 잿더미만이 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어 휑한 느낌마저 주었다.

그 잿더미의 흔적으로 보아 원래는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새카맣게 탄 잔해만 남아 있으니 조금 전의 화재 당시에 이 석실 안이 얼마나 뜨거웠을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던 대로 금우신군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의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비일염의 눈에 탁자 너머 석실의 반대편에 나 있는 작은 문이 들어왔다. 비일염은 단숨에 석실 안을 가로질러 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었다. 퀴퀴하고 후덥지근한 석실의 탁한 공기와는 다른 서늘하고 눅눅한 공기가 느껴졌다.

비일염이 무심코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등 뒤에서 탁세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게!”

비일염은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파앗!

열려진 문밖에서 쏘아져 온 비수 하나가 그의 목덜미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비일염은 자신이 조금만 멈칫했어도 그 비수에 그대로 목덜미를 관통당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하나 그도 평생을 강호에서 살아온 인물이었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몸은 어느새 벽을 박차고 문밖으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 동작이 어찌나 매끄럽고 유연했던지 한 마리 비조가 허공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무영천자라는 외호가 부끄럽지 않은 신묘한 동작이었다.

다시 하나의 비수가 날아왔으나, 미끄러지듯 허공을 움직이는 비일염의 몸을 격중 시키지는 못했다.

비일염은 거의 사오 장을 날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바닥에 내려앉았다.

석실 밖은 제법 넓은 통로였다. 십여 장이나 길게 이어진 통로의 끝은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었는데, 막 하나의 신형이 그 구부러진 통로로 사라지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비일염은 냉소를 날리며 눈부신 속도로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단숨에 직각으로 꺾어진 통로를 막 지나려던 비일염이 황급히 몸을 멈춰 세웠다.

파악!

비수 하나가 예리한 광망을 번뜩이며 그의 코앞을 지나갔다.

비일염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신형을 날렸다. 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비상한 비일염이 다시 천장으로 솟구쳤다가 꺾어진 통로를 돌았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다시 길게 이어진 통로와 막 통로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인물의 뒷모습뿐이었다.

“이런 제길!”

비일염은 재차 몸을 날려 그 인물의 뒤꽁무니를 잡으려 했다. 하나 이리저리 꺾어지는 통로와 교묘하게 날아드는 비수 때문에 좀처럼 인영의 뒤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춤추듯 몸을 움직이며 다섯 번째로 꺾어지는 통로를 돌아 나온 비일염의 눈에 막 닫히고 있는 하나의 문이 들어왔다.

탁!

그는 더욱 빨리 신형을 날렸으나, 문은 얄밉게도 그의 코앞에서 굳게 닫혀 버렸다.

‘제길. 웬 놈의 문이 이렇게 많은 거야?’

비일염은 기분 같아서는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으나, 조금 전의 습격이 뇌리에 떠올라 선뜻 문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때마침 그의 뒤를 따라오던 탁세호와 세 명의 죽립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비일염은 턱으로 눈앞의 문을 가리켰다.

“나를 습격한 놈이 이 안으로 들어갔소. 아무래도 이제 그놈들의 꼬리가 보이는 것 같소.”

문으로 다가간 탁세호가 문을 만져보더니 슬쩍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굳게 닫힌 문이 너무도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닌가?

비일염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탁세호를 따라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안은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이리저리 돌아간 통로 때문에 화재현장에서 멀리 떨어져서인지 열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청명한 공기가 느껴졌다.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던 비일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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