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02화
제 360 장 암도진창(暗渡陳倉) (4)
탁세호는 물론이고 비일염마저 흠칫하는 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칭좌는 십이비성 중에서 순수한 무공실력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절세의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다른 성좌들이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는 데 비해 천칭좌는 강호상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탁세호가 유심한 시선으로 백의 중년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당신이 바로 천추신도(天樞神刀) 마송일(馬松一)이오?”
백의 중년인은 짤막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바로 마송일이오.”
탁세호의 얼굴에 한 줄기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천추신도 마송일은 무림구봉중의 일인이었던 도봉 금도무적 양천해와 쌍벽을 이루는 절세의 도객(刀客)이었다. 주로 강남일대에서 활동했던 양천해와는 달리 마송일은 강북을 주무대로 삼았기에 그들을 남북쌍도(南北雙刀)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송일은 성숙해의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 강호상에서 그의 활약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도봉의 자리를 양천해에게 넘겨주어야 했지만, 그를 알고 있는 고수들은 그의 무공이 양천해에 조금도 못지않은 최고 수준에 올라와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런 마송일을 눈앞에 직접 보게 되니 담력이 크고 스스로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탁세호조차도 순간적으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송일과 금우신군이라면 아무리 탁세호와 비일염이 서장 무림의 절대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쉽사리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이정문이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있으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탁세호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정문을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마송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소. 아무래도 오늘은 여러모로 뜻깊은 날이 될 것 같구려.”
많은 의미를 담은 그의 말에 마송일은 무심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 또한 오늘의 만남에 적지 않은 기대를 하고 있소. 아무쪼록 내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허허. 마 대협의 입담도 보통이 아니구려. 마 대협이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그 기대에 벗어나더라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마 대협도 알겠지만, 강호의 일이란 왕왕 예상을 벗어나기도 하니 말이오.”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는군. 당신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거요.”
팽팽한 설전을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와 함께 실내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겉으로는 비록 웃고 있지만, 이미 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기운이 주위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금시라도 무언가가 터져나갈 듯 살벌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문득 이정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살기로 가득 차 있는 장내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비일염은 물론이고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는 탁세호마저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정문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허리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보다 못한 탁세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 거요?”
이정문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멈추었다.
“미안하오.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소.”
이정문은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히죽 웃었다.
“아, 모처럼 정말 시원하게 웃었군. 요새는 계속 복잡한 일이 많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정신없이 웃었더니 기분까지 상쾌해졌소. 정말 고마운 일이오.”
“나 때문에 웃었단 말이오?”
“엄밀히 말하자면 탁 대협이 아니라 흑갈방의 위 방주 때문이오.”
탁세호는 이정문의 강퍅한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본 방의 방주 말씀이오? 그분의 무엇이 이 공자로 하여금 웃게 했는지 모르겠구려.”
이정문은 여전히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위 방주가 나를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는 이미 익히 알고 있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위 방주가 막상 나를 앞에 두고도 입도 뻥긋 안 하고 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소?”
흑갈방의 방주인 위태심은 이정문의 암수에 빠져 비명에 사라진 천애치수 단목초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평소 사부인 단목초를 누구보다도 각별히 따랐던 위태심은 단목초가 이정문에 의해 살해된 걸 알게 되자 반드시 그의 수급을 잘라 사부의 영혼을 위로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탁세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거렸다.
“이 공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려. 본 방의 방주는 왜 이곳에서 찾는 거요?”
이정문은 다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승냥이 같아 보였다.
“아직도 시치미를 떼다니 탁 대협답지 않구려. 위 방주, 언제까지 나를 웃게 할 셈이오?”
웃고 있는 이정문의 시선은 탁세호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죽립인 중 한 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죽립인들은 탁세호와 비일염을 따라 오가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묵묵히 탁세호와 비일염의 뒤를 따르고 있기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는데, 이정문은 그중 한 사람이 흑갈방의 방주인 위태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정문의 시선을 받은 가운데에 서 있는 죽립인이 앞으로 나서며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을 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년은 무심한 시선으로 이정문을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소?”
이정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위 방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뿐이오.”
“내 입장에서?”
“내가 아는 위 방주의 성격이라면 철천지원수의 목을 따는 장면을 반드시 현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 직성이 풀릴 거요. 그렇지 않소?”
청년, 위태심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군. 확실히 나는 내 눈으로 보고 싶었소. 그리고 가급적이면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하고 싶었지.”
“그래서 나는 오늘 오가장을 찾아온 자들 중 위 방주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누구로 변신해있든 그들 중 한 사람은 위 방주라고 확신했지. 다행히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은 불과 다섯 명뿐이었고, 그중 세 사람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소. 마침 위 방주의 곁에는 늘 수신쌍위(修身雙衛)가 따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 세 사람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소.”
단목초는 죽기 직전까지도 늘 두 명의 호위를 데리고 다녔다. 그들을 수신쌍위라 불렀는데, 단목초가 살해당할 때 그들 또한 참변을 면치 못했다.
위태심은 나중에 흑갈방을 장악하면서 단목초를 기리는 의미에서 두 명의 믿을 만한 수하들을 모아 수신쌍위라는 직위를 복원시켰고, 외부로 나갈 때는 늘 그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위태심은 잠시 이정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더니 중얼거리듯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당신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오. 내 성격을 파악하고 내 정체를 알아낸 솜씨는 박수를 쳐줄 만하오.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다면 지금 이곳의 상황은 모두 당신이 예상한 것이겠구려?”
이정문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하. 역시 위 방주의 번뜩이는 재지는 놀랍구려. 위 방주의 말대로 아직까지는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소.”
그 말에 비일염은 물론 탁세호도 흠칫하는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위태심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우리로 하여금 이곳으로 오도록 유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소.”
이정문의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걸 알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단 말이오?”
“어쨌든 이 길을 따라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당신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했을 거요.”
“이거 위 방주의 말을 듣고 있으니 어째 내가 아니라 위 방주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 듯한 느낌이 드는구려.”
“그래서 불안하오?”
위태심의 물음에 이정문은 여전히 여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위 방주는 무언가 미심쩍은 걸 알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제거할 자신이 있어서 따라온 것이겠지만, 일단 이 안에 들어온 이상 위 방주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을 거요.”
위태심의 시선이 이정문의 옆에 있는 마송일과 오윤을 잠시 훑고 지나갔다.
“천추신도와 금우신군만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실망이오.”
이정문은 빙긋 웃었다.
“다행히 위 방주를 실망시킬 일은 없을 거요.”
위태심의 눈에 한 줄기 푸르스름한 광망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정문을 비롯한 두 명의 성좌를 앞에 놓고 몸을 완전히 한 바퀴 돌리면서까지 장내를 찬찬히 살피던 위태심이 다시 이정문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곳에 특별한 기관진식은 없는 듯한데…….”
“위 방주께서 단목 노사의 진전(眞傳)을 얻어 기관매복에 관한 한은 금우신군에 전혀 뒤지지 않는 서장무림의 최고 실력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소.”
“기관진식도 없고 달리 더 나올 사람도 없는 듯한데, 정말 저 두 사람만 믿고 나를 상대하려 한 것이오?”
이정문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위태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정말 내가 위 방주를 위해 준비한 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소?”
위태심은 이정문의 기광이 번뜩이는 눈을 보고서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에게 남아 있는 수가 어떤 것인지 정말 궁금하구려.”
이정문은 위태심의 무색투명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의 빛도 담겨 있지 않은 냉정한 눈을 빤히 보고 있다가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면 알려주겠소. 그건 바로 위 방주의 뒤에 있소.”
이정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위태심의 뒤에서 하나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위태심의 목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그 손길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기에 천하의 위태심도 꼼짝하지 못하고 그대로 목덜미를 제압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