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03화
제 361 장 천산이괴(天山二怪) (1)
손은 크고 두툼했다. 퍼런 힘줄이 손등에 솟아있고, 털이 수북한 그 손은 푸르스름한 강기에 덮여 있어, 얼핏 보기에도 가공할 힘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손을 보는 중인들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탁 형! 이게 무슨 짓이오?”
비일염이 버럭 노성을 지르며 금시라도 앞으로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하나 막상 손의 주인이 돌아보자 비일염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의 주인은 한 손은 위태심의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자연스럽게 위태심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있는데, 누구라도 그가 조금만 힘을 쓴다면 위태심은 목뼈가 부러지거나 척추가 으스러지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위태심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정문과 말을 나누던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정문은 위태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특유의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이 정도의 수라면 위 방주를 실망시키지는 않으리라 보는데, 어떻소? 지금도 실망스럽소?”
위태심은 목을 완벽히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확실히 이번 수는 놀라웠소. 설마 총호법에게까지 당신의 손이 닿아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려.”
“운이 좋았소.”
“운만으로 될 일은 아니지. 대체 총호법은 어떻게 포섭한 거요?”
이정문의 메마른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냉정하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오. 신군이 오가장을 세울 때 축하해 주러 왔다가 우연히 멀리서 한 사람의 얼굴을 보았소. 그 얼굴이 말로만 듣던 누군가를 연상케 해서 은밀히 조사해 보았소.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지.”
“그게 몇 년 전의 일이오?”
“육 년쯤 되었을 거요.”
위태심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라면 아직 우리와는 특별한 적대관계도 아니었는데, 단지 멀리서 힐끗 본 것만으로도 총호법의 정체를 알아차렸단 말이오?”
이정문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때 나는 아버님의 명으로 서장에서 중원으로 오는 지역에 은밀한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었소. 그래서 필연적으로 중원과 가까운 곳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서장의 고수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소. 그중에서도 혼천마군은 특급 경계대상이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거요.”
“총호법 또한 그때는 중원에 대한 전초를 세우려고 보운사를 암중에 점거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즈음인데, 하필이면 당신 눈에 띄어서 정체를 발각당하고 말았으니 그 정도면 확실히 운이라는 게 없다고 할 수는 없겠군.”
이정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당시에 중원을 침투하는 거점을 확보하는 일은 귀 사부의 둘째 제자인 상관욱이 담당했을 텐데, 위 방주도 그때의 일을 잘 알고 있구려?”
“그때 마침 나는 사부의 명으로 둘째 사형을 후원하는 일을 맡고 있었소. 그래서 총호법이 하는 일을 대략 알고 있었던 거요.”
“그렇군. 위 방주의 지원이 너무 완벽해서 덕분에 상관욱을 상대하는 데 아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오.”
“그나저나 총호법이 비록 정체를 발각당했다고 해도 쉽사리 마음을 바꾸거나 흔들릴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를 포섭했던 거요?”
이정문은 히죽 웃으며 턱으로 위태심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위태심은 목을 제압당해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까닥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눈만 살짝 치켜떴다. 그럼에도 손의 주인은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두꺼운 손으로 잡은 채로 낮은 음성을 내뱉었다.
“이 공자도 짓궂은 사람이군. 방주는 나의 부끄러운 일을 굳이 알아야겠소?”
위태심은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런 배반이 부끄러운 일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손의 주인, 혼천마군 탁세호는 의외로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내가 부끄러운 건 방주를 배반했기 때문이 아닐세.”
“그럼 무엇 때문이오?”
“육 년 전에 나는 이 공자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네. 이 공자의 수하들이 내 뒤를 조사했을 때, 나도 누군가가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지.”
“그럼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소?”
“나는 내가 충분히 그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네. 이 공자를 상대하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거지.”
“그런데 그러지 못했구려.”
“그렇다네. 이 공자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었네. 내가 부끄럽다고 한 건 이 공자를 잘못 판단한 당시의 내 자신에 대해서일세.”
위태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사로잡힌 것이로군. 그의 측근에는 당신의 무공을 당해낼 자가 뚜렷이 없을 텐데, 누구에게 당한 것이오?”
탁세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닐세. 방주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군. 내가 단순히 그에게 사로잡혀서 그에게 포섭된 것인 줄 아는가 본데, 나는 쉽사리 남에게 굴복하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아닐세.”
위태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의 품에 들어갔단 말이오?”
“이 공자는 단지 내게 제안을 했을 뿐이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고.”
“그가 무슨 제안을 했단 말이오?”
“나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지.”
“그게 무엇이오?”
탁세호의 얼굴에 의미를 알기 힘든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허공을 웅시하더니 이내 다시 빙긋 웃었다.
“말했지 않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그렇게만 알고 있게.”
위태심은 그의 말이 조금 전과는 약간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에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한 것이다. 비슷한 말이었으나, 그 속에 포함된 의미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위태심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문득 떠오른 듯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총호법은 지난 육 년 동안 그를 위해서 일했단 말이로군. 어쩐지 요즘 본 방의 비밀거점들이 계속 선반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의아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어떻게 비밀거점의 위치를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알겠군.”
“약소한 일일세. 솔직히 나로서는 방주의 행사가 너무 비밀스럽고 은밀해서 총호법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본 방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알기 힘들다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랐네. 그래서 한때 방주가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었지.”
“나는 단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일을 벌이는 데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그러한 신중함 덕분에 내가 별로 활약할 여지는 없었네. 그래서 이러다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지.”
위태심은 조소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 일 하나로 총호법의 가치는 최고로 올라갔을 거요.”
탁세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중요한 순간에 나를 찾아와준 방주의 선택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네.”
위태심은 더 이상 그에게는 할 말이 없는지 다시 이정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의 수법은 잘 보았소. 확실히 산수재다운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구려.”
이정문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실망하지는 않았소?”
“전혀. 이번 일의 준비가 이미 육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그렇게 보아주니 고맙소.”
“당신의 수법을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소.”
“그게 무엇이오?”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이 사 년 전에 사부가 당했을 때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오.”
이정문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탁 쳤다.
짝!
“하하……! 기어코 알아차렸구려.”
위태심은 이를 드러내며 얄밉도록 환하게 웃고 있는 이정문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를 수가 없지. 우리 편의 인물을 포섭하여 그를 이용해 상대를 제거하는 것은 당신의 고명수법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이정문은 여전히 웃음을 그치지 않으며 조롱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당시의 일은 나로서도 심혈을 기울인 것이어서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알아냈구려.”
화를 내거나 분노를 느낄 법도 하건만 위태심의 얼굴은 갈수록 냉정해져서 거의 무심한 모습에 가까워졌다.
“사 년 전의 그 날 일을 우리는 몇 번이나 철저히 조사하여 사부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확실히 알아냈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사부의 죽음에 얽힌 모든 진상을 파악해 냈소. 그리고 당신의 모든 수법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을 했지. 결코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데도 이번에 또 똑같은 수법에 당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너무 실망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구려.”
위태심은 무심한 눈으로 이정문을 응시하며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요.”
위태심의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을 보자 이정문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무슨…….”
그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위태심을 제압하고 있던 탁세호가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크윽!”
이정문이 깜짝 놀라 보니 탁세호가 양팔을 옆구리에 낀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위태심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시뻘건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태심의 명문혈을 제압하고 있던 왼팔은 손목이 부러졌는지 힘없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탁세호는 양팔에 커다란 부상을 입었음에도 통증보다는 놀라움이 컸는지 뒤로 물러나면서도 자신의 오른손에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천공조(穿孔爪)……! 이제 보니 당신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