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06화
제 362 장 검기무쌍(劍氣無雙) (2)
궁해 또한 조금 전과는 달리 전신에서 조금씩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연히 내 혈해반이겠지. 검정중원이 소문대로의 절학이라면 내 혈해반만이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선택은 어디까지나 신검무적에게 달려 있소. 그를 만나면 전적으로 그의 선택에 맡기기로 이미 약조하지 않았소?”
“아네. 다만 나는 그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주고자 하는 것뿐일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으나 장내의 누구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말로 투닥거리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전신에서는 점점 더 가공할 기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각기 다른 기운들이 점차 장내를 장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들의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산월이 그때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검정중원을 보고 싶소?”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그 순간 주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기운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궁해와 공태는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야 이를 말인가?”
진산월은 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용영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먼저 이 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거요.”
의미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궁해는 표정이 살짝 변했다.
“자격 시험이라도 보겠다는 말이냐?”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내 검을 상대하다 보면 자연히 볼 수 있을 거란 의미요.”
궁해의 준수한 얼굴에 한 줄기 실선이 그어졌다. 무섭도록 차갑고 냉혹한 웃음이었다.
“네 검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검정중원을 볼 자격이 된다는 말이지? 건방져. 너무 건방져서 화가 나야 하는데,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군. 우리가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게 대체 언제였지?”
웃고 있는 궁해와는 달리 공태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주름살이 가득했던 공태의 얼굴은 오랜 풍상(風霜)에 시달려온 고목나무를 보는 것처럼 쭈글쭈글해져 보기 흉할 정도였다.
“내 기억에는 없었던 일이오.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나이를 먹은 것 같소. 새카맣게 어린 후배에게 이런 말까지 들을 정도이니…….”
“역시 말로 주절거리는 이런 고리타분한 방식은 나하고는 맞지 않아.”
궁해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도 느낄 수 없는 극도의 냉정하고 무심한 얼굴이 나타났다. 천산이괴의 첫째이며 서장 무림에서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해 온 천살 궁해의 본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선택권을 주겠다는 말은 취소다. 먼저 내 손에서 살아남아라. 그러면 네가 검정중원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궁해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진산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중인들은 무언가 눈앞에서 희끗한 것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부릅뜨고 정신없이 전면을 바라보았다. 당금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세고수들이 펼치는 놀라운 싸움이 그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궁해의 손은 정말 빨랐다. 그동안 강호의 절정고수들과 적지 않은 혈투를 벌여왔던 진산월이었지만, 속도만 놓고 보았을 때는 궁해의 공격이 가장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수공(手功)에 관한 한 절대적인 존재였던 음양신마 복양수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진산월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궁해의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없어서 용영검을 뽑아들지 못했다. 검을 뽑을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을 만큼 궁해의 손은 무서운 위세와 가공할 속도로 그의 전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펼치는 공세 안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괴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피하는 것조차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쏴아아아!
지금도 커다란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진산월의 미간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다. 분명 똑같은 사람의 손바닥임에도 거대한 석상(石像)의 손이 휘둘러오는 것처럼 압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손바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에 이미 손바닥은 진산월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진산월로서는 그저 옆으로 몸을 회전시켜 그 가공할 손바닥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의 몸이 채 회전을 멈추기도 전에 또 다른 손바닥이 그의 옆구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이어룡 신법을 이용해 일 장 옆으로 이동했으나, 여전히 궁해의 공세를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국 와선보까지 펼치며 다시 삼 장 밖으로 몸을 날린 다음에야 간신히 궁해의 손바닥 권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와선보를 시전하느라 흔들리던 진산월의 신형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손바닥이 허공에 불쑥 나타나 진산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홀연히 나타난 손바닥이 진산월의 머리 위로 천지사방을 쪼갤 듯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중인들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진산월의 머리통이 그 가공할 손바닥에 박살 나는 처절한 장면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인간의 손은 분명 두 개뿐인데, 세 번째 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손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뇌리에 떠오르기도 전에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파아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산월의 머리가 있던 공간을 막강한 기운이 휩쓸고 지나갔다.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실로 모골이 송연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이었으면 무엇이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머리통이 그 가공할 기운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진산월의 상황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 문파를 이끄는 장문인의 신분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나려타곤(懶驢打滾) 수법까지 사용해야 했으니 창피막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덕분에 진산월은 처음으로 궁해의 공세에서 벗어나 검을 뽑아들 수 있게 되었다.
팟!
우윳빛 검광이 허공에 흐르면서 막 다시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려던 궁해의 신형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졌다.
쫘아악!
그와 함께 그의 앞 공간이 시퍼런 검기에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궁해가 무심코 앞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면 그 검기에 그대로 격중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궁해도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철갑을 두른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단 진산월의 손에 검이 쥐어지자 장내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바뀌었다. 궁해는 여전히 전신에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조금 전처럼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궁해뿐 아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공태의 얼굴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검을 쥔 진산월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단순히 손에 검 하나를 쥐었을 뿐인데도 그의 전신에는 어떠한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검이 된 것처럼 보는 이의 심혼(心魂)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검귀(劍鬼)로구나……!”
공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진산월은 무심한 얼굴로 수중의 용영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우우웅…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음향과 함께 새하얀 검광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검광은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더니 삽시간에 궁해의 전신을 에워싸 버렸다. 그 검광의 한가운데 위태롭게 서 있는 궁해의 몸은 금시라도 갈가리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궁해는 진산월이 검을 들었을 때부터 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산월이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을 피하기만 급급해 할 때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짙은 실망감과 분노가 솟구쳐 오르기도 했었다. 특히 당대 제일고수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바닥으로 몸을 굴려 자신의 공세에서 벗어났을 때는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일단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자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섣불리 손을 내뻗었다가는 예리한 칼날에 손이 잘라질 것 같은 느낌에 쉽사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방심한 듯 서 있는 진산월의 자세는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아서 더욱 손을 쓰기 어렵게 했다.
잠깐 주춤하는 사이 진산월의 수중에 들린 검이 움직이더니 이내 자신의 몸은 수많은 검광 속에 휘말려 버렸으니, 궁해로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뒤집힌 장내의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서장무림 제일의 고수라는 위명답게 이내 평정심을 회복한 그는 양손을 움직여 크게 원을 그렸다. 그가 허공에 그려 놓은 무형(無形)의 원에서 노도와 같은 경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파파파팡!
검광과 경기가 수십 번이나 부딪히면서 세찬 경력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근처에 있던 중인들이 허겁지겁 그 여파를 피하는 사이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천하에 명성이 높은 유운검법을 사용했고, 궁해 또한 자신의 성명절기와도 같은 천마대산수(天魔大散手)를 펼쳐 맞서왔다.
궁해는 천마대산수 외에도 적혈수와 환천멸겁장을 주로 사용했는데, 조금 전에 진산월로 하여금 바닥을 구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수법이 바로 환천멸겁장 중의 절초인 삼안마겁(三眼魔劫)이었다.
천마대산수는 궁해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난해한 수법이었다. 궁해가 강맹한 위력의 적혈수나 빠르고 괴이한 환천멸겁장 대신 이 천마대산수를 펼친 것은 무궁무진한 변화를 자랑하는 유운검법에 정면으로 맞서서 꺾고야 말겠다는 투쟁심의 발로였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싸움은 다채롭고 화려해서 언뜻 보기에는 서로의 무공을 자랑하는 비무(比武)를 하는 것 같았다.
하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한 수 한 수는 하나같이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단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릴 만한 무서운 수법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고받는 초식들이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당장이라도 둘 중 누군가는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 것 같았다.
공태는 한쪽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의 싸움을 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진지함을 넘어 심각한 얼굴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팽팽하게 진행되던 승부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진산월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원래 궁해의 천마대산수는 변화무쌍함 속에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치명적인 살수들이 잔뜩 숨어 있는 무공이었다. 그래서 자칫 그 변화무쌍함에 눈이 팔렸다가는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진산월이 펼치고 있는 유운검법의 변화가 너무도 다양하고 무궁무진해서 천마대산수의 변화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 대 변화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으니 변화 속의 살초들이 온전히 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팽팽하게 맞설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궁해가 천마대산수의 초식을 완벽하게 전개하지 못하고 중간에 변초(變招)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호승심에서 진산월의 변화무쌍한 검법에 정면으로 맞서갔던 궁해는 천마대산수의 절초 중 하나인 천마광희(天魔狂?)를 끝까지 펼치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다음에야 비로소 변화의 싸움에서는 자신의 무공이 진산월의 검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의 유운검법에 대한 경지는 극에 달해 있었고, 유운검법 자체도 새로운 변화가 가미되어 있었다. 그동안 진산월이 고심해서 수련해온 절학에서 파생된 다양한 변화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종남의 문하라 할지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유운검법과 같은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야말로 진산월만의 유운검법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진화되어 있는 것이다.
궁해는 이런 식의 싸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천마대산수만을 고집하던 방식을 바꿔 다른 무공들을 섞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본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는 제대로 된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