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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09화


제 363 장 괴인교리(怪人狡狸) (1)

궁해의 죽음은 장내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신검무적의 명성으로 보아 둘 중 누가 승리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승패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빨리 갈라진 데다 누가 보기에도 두 사람의 실력에 적지 않은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궁해는 신검무적의 검에 격중 되지도 않았는데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으니, 무공에 대한 안목이 높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나 마송일을 비롯해 지금 장내에 있는 자들 중 대부분은 강호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었기에 궁해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신검무적의 검법이 당대 제일을 넘어 모용 대협조차 능가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놀랍구나. 천산이괴의 첫째인 천살 궁해가 단 한 번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진기의 과다한 사용으로 죽고 말았으니……. 과연 모용 대협이라 할지라도 신검무적의 저 가공할 검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구나.’

신검무적의 검술을 실제로 눈앞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몇몇 사람들은 진지하게 모용 대협과 신검무적의 검을 비교하면서 전율을 금치 못했다.

궁해의 시신을 안고 있던 공태가 궁해의 시신을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진산월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진산월을 바라보는 공태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또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 주름살 가득한 눈두덩 깊숙한 곳에 자리한 두 개의 눈동자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괴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에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정말 잘 보았네. 강호의 소문은 왕왕 와전되기 마련인데, 자네의 검은 소문을 오히려 능가하는군. 이 나이가 되어서 이제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나를 거듭 놀라게 했네.”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운이 좋았소.”

“그런 말은 하지 말게. 그건 내 의형에 대한 모욕일세. 평생을 바쳐 완성한 무공이 한갓 운 때문에 꺾였다는 건 의형에게는 너무도 수치스런 일일세.”

진산월은 공태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소. 조금 전의 싸움은 나로서도 전력을 기울인 것이었소.”

공태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정도 대답이라면 궁 형도 만족했을 걸세. 내게도 그런 만족감을 주기 바라네.”

공태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열 손가락은 활짝 벌어진 채 엄지와 중지가 맞닿은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공태의 벌려진 손가락 사이로 거무스름한 기운이 몰려오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꼭 해야겠소?”

공태의 주름진 두 눈에 한 줄기 신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천지망이 궁 형의 혈해반에 뒤진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모쪼록 나에게 모욕감을 주지 말기 바라네.”

공태의 음성은 여전히 평온했으나 그 속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결연함과 비장한 각오가 진득하게 담겨 있었다.

천산이괴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서장 무림 최고의 고수들이지만, 그들 중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은 첫째인 궁해였다. 궁해는 공태보다 나이도 더 많았고, 무공실력도 더 높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궁해가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하고서도 진산월에게 별다른 타격도 주지 못하고 역류한 진기로 인해 심맥이 끊어져 죽고 말았는데, 공태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궁해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공태 자신도 다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태는 진산월에게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죽음 따위는 이미 벗어버린 듯한 그의 단호하면서도 초연한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진산월도 한 자루 검에 모든 것을 의지해 온 무림인으로서 공태의 이런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진산월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공태는 그가 자신의 도전을 받아주지 않으려는 것으로 알고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그를 따라 시선을 천장으로 움직였다.

언제부터인가 구멍 뚫린 천장에서 하나의 얼굴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시중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얼굴이었고, 눈빛 또한 특별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였다.

진산월은 기억을 떠올려 보았으나 특별히 기억나는 이름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공태의 표정이었다. 중년인을 본 공태의 얼굴에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괴이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중년인은 공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돌연 훌쩍 몸을 날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추락하듯 내려오던 중년인의 신형은 바닥에 닿기 직전에야 겨우 한 바퀴 회전하여 제대로 내려설 수 있었다.

자칫 머리를 바닥에 부딪힐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동작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장내의 누구도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바닥에 내려오는 내내 중년인의 표정이 너무도 평온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엿차!”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바닥에 내려선 중년인은 이내 진산월을 향해 예의 특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높이가 애매해서 위에서 내려오는 게 보기보다 쉽지 않군. 별생각 없이 뛰어내렸다가는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겠소.”

중년인의 말마따나 천장에서 바닥까지의 높이가 너무 낮지도, 그렇다고 너무 높지도 않았다. 단순히 이 정도 높이라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어렵지 않게 뛰어 내려왔겠지만,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몸을 날린 경우라면 자칫 애를 먹을 수도 있었다.

웬일인지 진산월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묵묵히 중년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중년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청객이 찾아왔으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는 척이라도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소?”

진산월은 그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구요?”

중년인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교리라는 무명소졸이오.”

“처음 듣는 별호로군. 본명은 어떻게 되오?”

“별로 대단치 않은 이름이라 굳이 공개하고 싶지는 않구려. 그냥 교리라고 불러주시오.”

진산월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중년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고, 눈빛 또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교리는 진산월의 그런 모습이 내심 부담스러운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천하에 이름 높은 신검무적이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니 공연히 두려운 생각이 드는구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요?”

진산월은 어느 때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었소.”

“방금 말해주지 않았소? 나는 교리라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오.”

교리의 천연덕스러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산월은 자신이 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조금 전에 살짝 내보였던 무형지기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소. 내 생각에 강호에서 이 정도의 무형지기를 흘려낼 수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을 넘지 않을 것이오.”

교리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어른거렸다.

“그들이 누구요?”

“한 사람은 조익현이란 인물이오. 나는 예전에 그를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나로서도 무공수준을 측량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소.”

진산월의 입에서 조익현이란 이름이 거론되자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교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를 만났다니 내가 조익현이 아니란 건 알겠구려. 다른 두 사람은 누구요?”

“또 한 사람은 석동이란 인물이오. 나는 그를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 그가 조익현에 필적하는 고수라는 말을 들었소. 당신은 석동이오?”

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석동이 아니오.”

어찌 된 영문인지 진산월은 마지막 세 번째 인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교리는 한동안 그의 말을 기다렸으나 진산월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지막 한 사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 거요?”

진산월은 무심한 눈으로 교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소?”

교리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갑자기 알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지고 말았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고졸(古拙)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뀌었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해야겠소.”

교리는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약간은 날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요?”

“내가 아는 건 그 사람의 이름뿐이오.”

“그게 누구요?”

“그 사람은 교리라 하오.”

교리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내 이름이 바로 교리요.”

“그렇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교리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군. 내가 바로 당신이 말한 세 번째 사람이로군. 나도 이제 비로소 알았소.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요?”

“본인이 앞에 있는데, 굳이 말을 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소.”

“그렇군. 확실히 현명한 생각이오.”

“꼬리를 감춘 신룡처럼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던 당신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위태심 때문이오, 아니면 천산이괴 때문이오?”

진산월의 마지막 물음에 교리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둘 모두라고 해야겠지. 위태심은 내가 아끼는 몇 안 되는 아이이고, 쌍노는 내가 존중하는 유일한 선배들이오. 위태심은 영특하고 재주가 비상한 아이이고 쌍노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고수들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나로서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소. 가급적이면 내가 나서는 일은 없으려고 했는데, 너무 뜸을 들이는 바람에 쌍노까지 피해를 입게 만들고 말았구려.”

교리의 시선이 한쪽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궁해의 시신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당신의 그 검정중원을 보고 싶다는 욕심에 그만 궁 노인을 제때에 제지하지 못했소. 그러니 더 후회하기 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소.”

언뜻 진산월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내 검정중원은 왜 보려고 했던 거요?”

다시 진산월을 돌아보는 교리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무겁고 어두웠던 표정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교리는 예의 괴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의 검정중원은 누가 무어라 해도 중원을 대표하는 최고의 무공이오. 그러니 나로서는 그 무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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