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412화


제363장 괴인교리(怪人狡狸)(4)

백모란은 석동의 연인이었고, 천봉궁의 창시자였으며, 칠음진기를 익힌 절세고수이기도 했다.

칠음진기는 천하의 신공이지만, 태음신맥을 지닌 여인만이 절정에 오를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칠음진기에 대한 비밀을 이야기 해주던 강일비는 비선 조심향 이후에 칠음진기를 완성한 사람이 한 명 있다고 말했다. 강일비는 비록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진산월은 후에 모용단죽에게서 경성홍안 백모란이 칠음진기의 주인임을 전해 듣게 되었다.

석동이 백모란과 함께 있다는 교리의 말은 새삼스러울 게 없어 보였다.

하나 석동이 부상치료 때문에 백모란의 곁에서 열흘 거리 내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곧 백모란을 만나기만 하면 석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모란은 음양쌍반진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산월을 만나려 할 것이다. 굳이 진산월이 찾지 않더라도 그녀가 먼저 진산월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산월이 석동을 만나는 것은 필연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리는 이 모든 일들을 예측하고 진산월에게 석동을 맡아달라고 한 것일까?

만약 석동을 만난다면 진산월은 과연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만 석동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까?

교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석동 같은 인물을 물리적인 충돌 없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석동과 검을 겨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진산월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지나갔다.

하나 어찌 되었건 결론은 하나였다.

교리의 말대로 조익현과 석동이 더 이상 강호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 세월 그들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받아온 강호인들과 종남파를 위한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교리는 진산월의 표정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조익현과 석동을 막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그들만 제어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강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될 거요.”

“어떤 세계 말이오?”

교리는 진산월을 향해 웃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미소였다.

“그건 그때 가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요.”

“조익현과 석동이 없어지는 것으로 강호의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오?”

교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게 굴러간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오.”

“그렇다면 그들이 사라진 후에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교리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지며 평소와는 다른 삼엄한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당연히 당신과 내가 자웅을 겨루어야겠지.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는 필요치 않으니까.”

진산월은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담담한 눈으로 교리를 응시하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조익현이나 석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니겠소?”

교리는 주저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다르오.”

“무엇이 말이오?”

“그들은 백 년 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끝없이 싸웠지만, 우리는 단 한 번만으로 확실하게 판가름이 날 거요.”

“나를 이길 자신이 있단 말이오?”

“누가 이길지를 어떻게 알겠소? 다만 내가 이기든 당신이 이기든 단 한 번의 승부만으로 분명하게 결정이 될 거라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진산월은 교리가 단 한 번의 승부를 강조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나 지금 그가 하는 말이 단순한 허언이나 농담이 아니라 그의 확신이 담긴 진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교리의 표정만 보아도 누구라도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번의 승부로 우리 사이에 분명한 우열이 판가름 난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 한 번의 승부!

진산월은 교리가 내뱉은 그 말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서로 간에 더 이상의 충돌은 자제했으면 하오.”

진산월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정문을 비롯한 성숙해의 인물들과 위태심 등 흑갈방의 인물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대치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진산월과 교리에 집중되어 두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탁세호만이 그들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한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부상당한 양손에서 치밀어 오는 고통 때문인지 얼굴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진산월은 위태심을 마지막으로 시선을 거두어 들여 다시 교리를 쳐다보았다.

“오늘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자는 거요?”

“싸우는 것도 시기가 있소. 지금은 이미 싸울 시기를 놓쳐버렸소. 게다가 쌍방 모두 기세가 꺾여 버렸지. 그러니 더 이상 쓸데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소?”

교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장내의 상황은 조금 전처럼 살기가 충만하고 혈운이 감돌던 것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죽은 사람도 천살 궁해 뿐이고, 그 또한 진산월과의 정당한 승부에서 패한 결과 일 뿐이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지선 공태를 향했다.

“공 대협의 생각은 다를 듯 한데…….”

“공 노인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교리가 돌아보며 묻자 공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위태심과 이정문 또한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교리는 찬찬한 눈길로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아무도 거부하는 사람이 없자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한 가지 뿐이로군.”

“그게 무엇이오?”

“우리의 승부를 언제 벌이느냐 하는 것이오. 무작정 기한을 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에는 가는 세월이 너무 빠르지 않겠소?”

“언제가 좋을 것 같소?”

“마침 내게 적당한 날자가 떠올랐소.”

“그것이 언제요?”

교리는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무심한 두 눈에 별다른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은 그 활짝 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돌아오는 중추절에 나는 모용봉과의 결전을 약조했소. 하지만 모용봉은 이미 날개가 꺾여 내 적수가 되지 못하오.”

“…….”

“솔직히 중추절의 약속은 그의 약진을 기대하며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지만,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상태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지. 그러니 그날이 가장 적당하지 않겠소?”

진산월은 묵묵히 교리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꼼짝도 않고 있던 진산월은 문득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중추절의 약속은 이미 천하무림에 널리 퍼져있고, 모용봉은 지난 세월동안 그 약속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소. 그런데 그 약속이 일방적으로 깨어진다면 과연 모용봉이 그걸 납득하겠소?”

교리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납득할거요.”

“왜 그렇게 생각하오?”

언뜻 교리의 입가에 한 가닥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차갑고 비정한 가운데 강철 같은 의지가 담긴 서늘한 웃음이었다.

“조익현의 마수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교리의 확신에 찬 음성을 듣자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뻔 했다.

‘당신은 정말 조익현을 꺾을 자신이 있소?’

진산월과 교리의 중추절 약속을 위한 선결과제는 조익현과 석동의 제거였다.

교리는 그것을 위해 반드시 조익현을 없애려 할 것이다.

교리는 과연 이백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던 태을검선 매종도가 남긴 대라삼검을 모두 습득한 조익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은 석동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모용단죽의 스승이며, 조익현의 숙적이고, 또한 태을검선이 창안한 천양신공을 완벽하게 익혀 그 안에서 구양신공을 복원하기까지 한 절대의 천재를 이길 수 있겠는가?

만약 진산월이나 교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실패한다면 중추절의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나 교리가 다음과 같이 물었을 때, 진산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중추절의 약속을 승낙하겠소?”

“그렇소.”

교리는 위태심을 비롯한 흑갈방의 고수들을 대동하고 떠나갔다.

특이한 건 흑갈방의 배반자인 탁세호도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탁세호는 교리에 의해 끌려간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교리의 부름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따라가는 탁세호의 모습은 어색함을 넘어 기이하기까지 했다.

양 팔을 부상당한 몸으로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탁세호의 모습은 혼천마군이라는 위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장내의 누구도 탁세호가 감히 교리의 지시에 반항하지 못하는 장면을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리야 말로 서장 무림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사실상의 지배자인 야율척이었기 때문이다.

야율척이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강호를 유랑하듯 떠돌아다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의 뇌리에는 그런 야율척과 한때나마 동행했다는 귀호라는 이름의 인물에 대한 의문이 더욱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예상치 못하게 풀리게 되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