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13화
제364장 기인귀호(奇人鬼狐)(1)
그날 밤, 이정문이 은밀히 진산월을 찾아왔다.
“진 장문인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시오.”
이정문의 얼굴은 평상시보다 한결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강퍅한 외모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이정문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경직된 모습이었다.
이정문은 야율척이 등장했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특히 야율척의 입에서 귀호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는 입꼬리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진산월과 야율척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의 그런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진산월은 가끔씩 장내의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기에 이정문이 그런 흔들림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당시 이정문의 그런 모습에 대해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야율척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야율척이 거론한 귀호라는 인물이 어떤 식으로든 이정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진산월은 이정문의 굳은 표정만으로도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상당히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흔쾌히 만남을 승낙했다.
“모시고 오시오.”
이정문의 안내를 받으며 한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사람은 머리를 대충 빗어 아무렇게나 넘긴 중년의 인물이었다. 얼굴은 제법 준수했으나, 외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행색은 다소 남루해 보였다.
그럼에도 진산월은 그 중년인에게서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중년인의 두 눈이 이제껏 보지 못한 한없이 절제되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간혹 안광이 꿈틀거릴 때마다 더할 수 없는 총기와 영활함이 번뜩이고 있어 냉정함 못지않게 두뇌 또한 비상한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중년인이 눈짓을 하자 이정문은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 이 또한 지금까지의 이정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오.”
진산월이 인사를 하자 중년인은 담백하게 대꾸했다.
“밤늦게 불쑥 찾아와 미안하오. 나는 저 아이의 아비 되는 사람이오.”
진산월은 이정문의 태도를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입을 통해 확실한 정체를 알게 되자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정문의 아버지라면 무림구봉의 일인이며 강호제일의 신비인이라는 번신봉황 이북해를 가리킨다. 이북해는 행적이 신비롭고 사람 자체가 한 마리 신룡(神龍)과도 같아서 진실한 정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강호제일의 정보조직이라는 성숙해를 직접 만들었고, 신의 경지에 달한 변장술을 지녔으며, 강호의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그를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이라도 직접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나 막상 그를 만났다거나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산월조차도 그에 대한 소문만 익히 들었을 뿐,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런 이북해가 야심한 밤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진산월로서는 그의 의중을 알지 못해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번신봉황 이 대협이셨구려. 고명한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뵙게 되어 반갑소.”
진산월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이북해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명성이라면 나보다 진 장문인이 몇 배나 더 높을 거요. 내 이름은 그저 단순한 허명에 불과할 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확실히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북해가 아닌 신검무적 진산월이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무림구봉과 일령삼성을 넘어 오랫동안 천하무림의 제일고수로 군림해왔던 검성 모용단죽을 능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북해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가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강호제일의 신비인이라는 점이었기에, 무림인들 사이에 퍼져있는 인식이나 비중은 신검무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좌정하고 앉은 후 서로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성숙해 같은 신비스런 조직을 만든 이북해에 대한 호기심에서 그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고, 이북해 또한 젊은 나이에 당금 강호의 제일고수로 떠오른 진산월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기에 예리한 눈으로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진산월은 문득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북해의 얼굴이 그의 진짜 얼굴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알려지기로는 이북해는 번신봉황이라는 별호 그대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역용술을 지니고 있어 누구도 그의 진실한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얼굴에서 역용을 한 흔적이나 어색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진산월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 이북해는 그의 의중을 짐작했는지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얼굴이 진짜인지 궁금하시오?”
진산월은 솔직하게 말했다.
“강호에 퍼진 이 대협에 관한 소문이 사실인지 알고 싶었소.”
이북해는 목을 슬쩍 쳐들어 자신의 얼굴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소? 알아보겠소?”
“아무리 봐도 역용이나 분장을 한 것 같지는 않소.”
이북해는 다시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가며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러면 어떻소?”
이북해가 손을 내리자 진산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어느 새 이북해의 얼굴은 준수한 중년인에서 사납고 거칠게 생긴 흉한(兇漢)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단지 손을 얼굴에 댔다가 떼어낸 것만으로 사람의 얼굴이 완전히 변해 버렸으니 좀처럼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는 진산월조차도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북해는 다시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가 내렸다. 이번에는 비쩍 마르고 날카롭게 생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이북해는 왼손을 이마에 대고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처음의 얼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순간의 변화였으나 진산월로서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이건 천변공(千變功)에 몇 가지 잔재주를 덧붙인 것일 뿐이오. 대단치 않은 손장난으로 진 장문인의 눈을 어지럽힌 것 같구려.”
진산월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아니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이 대협의 솜씨를 직접 보게 되니 소문이 오히려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소. 오늘 이 대협 덕분에 크게 안계를 넓히게 되었구려.”
이북해의 역용술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말대로 잔재주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신묘한 솜씨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나 진산월 같은 절세의 고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것만으로도 능히 신공절학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이북해가 솜씨를 부린 덕분인지 장내의 분위기는 조금 전 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일전에 성숙해의 백양좌를 맡고 있는 위관 대협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었소. 늦게나마 당시의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소.”
진산월이 예전에 위관의 도움으로 흑갈방이 펼친 십방금쇄진을 벗어난 일에 대한 사례를 하자 이북해는 손을 내저었다.
“별말씀을. 나중에 위 노제에게 듣기로는 자신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도 진 장문인이 그들의 손을 벗어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고 했소. 오히려 이번에 내 아들녀석이 잔 머리를 굴리다가 위기에 처할 뻔 한 걸 구해준 진 장문인의 노고에 내가 감사드려야겠소.”
“이번 일은 이 공자가 나름대로 고심 끝에 만들어낸 계책이었소. 나는 단지 약간의 손만 보탠 것이오. 뜻하지 않은 일로 이 공자의 계획이 어긋나게 되어 아쉬울 뿐이오.”
화제가 오늘 일어난 일로 향하자 이북해의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뜩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때문에 급히 진 장문인을 만나려고 한 거요.”
“오늘 만났던 인물 때문이오?”
“그렇소. 그가 누구인지는 진 장문인도 알고 있을 거요.”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실 그와 진 장문인이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 만남이 내 예상보다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나로서는 진 장문인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소.”
중원 무림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성숙해를 이끌고 있는 이북해가 서장 무림의 우두머리인 야율척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야율척이 중원의 최고 고수로 떠오르고 있는 진산월을 만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왠지 진산월은 이북해의 말이 단순히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진산월을 바라보는 이북해의 두 눈에는 어느 때보다 예리한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진 장문인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야율척을 주시하고 있었소. 그는 단순히 서장 무림의 제일인자일 뿐 아니라 당금 강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오.”
이북해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울림이 좋고 말꼬리가 분명해서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그가 중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바짝 뒤쫓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하고 있었소.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뜻하지 않게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소.”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그에게 발각당한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화를 내거나 내게 손을 쓰려 하지 않고 먼저 동행을 제안했소. 나로서는 도저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소.”
진산월은 알겠다는 듯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귀호란 인물이 바로 이 대협이었구려.”
이북해는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 장문인이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려.”
“그동안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막연히 의심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대협이 나를 찾아온 것을 보고 혹시 이 대협이 귀호 본인이 아닐까 추측했을 뿐이오.”
이북해는 전혀 표정의 흔들림이 없는 진산월의 모습을 보고 새삼 그에 대한 이정문의 평가가 떠올랐다.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그의 검보다는 그의 이러한 점이 더욱 두렵습니다.”
그 말을 할 때의 이정문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북해는 오랜 세월동안 이정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가 남에 대한 평가에 무척 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비슷한 나이의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 일쑤였다.
그런 이정문의 입에서 누군가가 두렵다는 말이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북해는 진산월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을 들어왔지만, 이정문의 그러한 평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만나본 진산월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아무리 침착한 진산월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산월은 전혀 평정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그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추호의 내색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북해로서는 그의 침착함과 뛰어난 심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와 동행한 것은 대략 삼 개월 정도 되었는데,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게 무엇이오?”
“그의 행적이 진 장문인의 그것과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