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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416화


제364장 기인귀호(奇人鬼狐)(3)

“무당산의 악산대전에서 진 장문인과 마지막 결투를 벌였던 형산파의 육결검객 고진이 최후의 절초로 사용했던 무공을 기억하시오?”

“기억하고 있소.”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야율척에게서 그 무공이 대라삼검 중의 대라궁해라는 초식이며, 그 원조는 조익현이라는 것까지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터였다.

진산월은 이북해가 갑자기 고진의 검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에 순간적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내 이북해의 입에서 뜻밖의 정보가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도 조익현이란 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거요. 그 무공은 원래 조익현의 것이었는데, 형산파의 용선생을 통해 고진에게 전해진 것이라 하오. 용선생은 외조카인 고진을 위해서 조익현에게 사정하여 그 무공의 비결을 얻어냈다고 들었소.”

조익현의 무공인 대라궁해가 어떻게 고진에게로 전해졌는지 그 경위를 정확히 모르고 있던 진산월은 이북해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용선생이 중간에 연결고리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용선생은 형산파의 제일 어른일 뿐 아니라 무림구봉 중에서도 최연장자이며, 강호무림에서 우내삼성을 제외하고는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이었다. 또한 인물됨이 고매하고 성격이 온화해서 많은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용선생이 외조카 때문에 조익현에게 사정하여 대라궁해의 비전을 얻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율척의 말에 의하면 그 비전조차 온전한 것이 아닌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라 했으니, 결국 용선생은 반 초짜리 절학 하나를 위해서 평생 동안 쌓아올린 명예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 아니겠는가?

진산월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존재조차 몰랐던 조익현이 형산파의 최고 명숙인 용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용선생이 조익현과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진산월의 물음에 이북해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하게 굳어졌다.

“쾌의당에 칠대용왕 외에도 두 명의 영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소?”

“그렇소.”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쉽겠군. 용선생이 바로 쾌의당의 천기령주요.”

그 말에 지금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있던 진산월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쾌의당은 당주 아래에 두 명의 영주와 일곱 명의 용왕이 서로 동등한 관계를 이루는 특이한 조직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일곱 명의 용왕에 대해서는 그 신분이나 정체가 많이 노출되었지만, 두 명의 영주에 대해서는 각기 천살령주와 천기령주로 불린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와서 천살령주가 무림구봉의 일인이며 강호 제일의 암기명인인 천수나타 당각이라고 밝혀진 것이 전부였다.

당각은 현악문 앞에서 진산월과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일전을 벌인 끝에 결국 패사(敗死)하고 말았지만, 또 다른 영주인 천기령주는 그 행적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누구도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천기령주가 강호에 드높은 명망을 지닌 용선생이라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북해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동안 쾌의당이란 조직에 대해 많은 조사와 연구를 거듭 해왔소. 그들의 수뇌들이 하나같이 당금 무림을 호령하는 절세의 고수들일 뿐 아니라 그들의 행사가 강호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지. 처음에는 그들이 중원을 어지럽히려는 의도를 지닌 서장 무림의 척후세력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었소.”

이북해의 그런 의심은 전혀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진산월도 쾌의당이 야율척이 이끄는 하부조직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쾌의당은 몇 년 전만 해도 서장 무림에 우호적인 일들을 곧잘 벌였기에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무림인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야율척이 본격적으로 중원 무림에 손을 써오면서 야율척의 세력과 쾌의당 사이에 몇 번인가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소. 심지어 심각한 싸움으로 번진 적도 몇 번 있었지. 보통 그럴 때는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서로 적대하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그 후로도 배척하기 보다는 행동을 같이 할 때가 많아서 그들의 관계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소. 그래서 나는 혹시 그들이 비슷한 뿌리를 가지긴 했지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사안에 따라 대립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

“지난 몇 년간 나는 중원에 침투한 서장의 세력들을 조사하는 와중에도 쾌의당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소홀히 하지 않았소. 그리고 마침내 얼마 전에야 비로소 쾌의당의 중요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소.”

이북해는 이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말을 멈춘 채 진산월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때 비로소 진산월은 이북해가 오늘 자신에게 진정으로 하려고 했던 말이 바로 쾌의당의 비밀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쾌의당!

혹자는 그들을 천하제일의 청부집단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들은 강호의 어두운 곳을 장악한 실질적인 흑도 제일세력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강호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의 배후에 있는 흑막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쾌의당에 대한 진산월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다. 처음 진산월이 그들과 충돌하게 된 것은 일차 중원행 때 서장으로 가는 길목에서였다. 그때 그는 실종된 임영옥의 행방을 뒤쫓다가 동광사라는 절에서 금불을 비롯한 쾌의당의 고수들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들 중 무영귀 허무극이라는 인물과 싸우면서 상당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허무극은 진산월의 실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여서 때마침 나타난 천봉궁의 선자들이 아니었다면 진산월은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진산월은 쾌의당의 고수들과 크고 작은 싸움을 벌여왔고, 특히 서안의 이씨세가에서는 쾌의당의 칠대용왕 중 한 사람인 검중용왕 매장원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무림을 경악시키기도 했었다. 그때 그가 사용했던 검정중원은 그 이후 검을 찬 모든 무림인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절학이 되었고, 진산월 또한 신검무적이라는 별호로 중원무림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에 걸친 용왕들과의 치열한 혈전과 천살령주인 당각과의 일전으로 진산월은 강호제일의 고수라고까지 불리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쾌의당이야말로 지금의 신검무적을 만들어준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때문에 여러 차례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했고, 생사를 건 처절한 혈투를 벌여야 했다. 하나 또한 그들과의 싸움으로 그는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무공실력 또한 놀라운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

누관의 고동에서 삼 년의 수련 끝에 출도 했을 당시와 지금의 무공수준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의 상당부분이 쾌의당과의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진산월 자신도 인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과연 쾌의당은 그에게 있어 악(惡)인가, 선(善)인가?

그들이 반드시 없애야 할 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필요악 같은 존재일 수도 있었다.

이북해는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쾌의당이 생긴 것은 대략 이십여 년 전으로 예상되고 있소. 처음에는 단순한 청부조직으로 알려졌으나, 칠대용왕을 비롯한 수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강호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거대한 세력으로 평가받게 되었소. 그런 그들의 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난 것은 사 년 전의 무림대회 이후였소. 다시 말해서 쾌의당이 생기고 십여 년 동안은 자잘한 청부를 맡는 것 외에는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고 은밀히 활동해 왔다는 의미요.”

진산월은 묵묵히 이북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이 점에 주목해서 그동안 알게 된 쾌의당의 수뇌 인물들의 행적과 강호에서 벌어진 커다란 사건들의 접점을 조사해 보았지. 그랬더니 공교롭게도 몇 가지 중요한 접점을 찾을 수 있었소. 그중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쾌의당이 세워진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에 강호에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오. 첫째는 야율척의 등장이오. 그가 등장함으로서 팽팽했던 서장무림과 중원무림의 대결양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조익현과 석동의 대립 양상마저 바뀌게 되었소.”

야율척이란 존재는 여러모로 강호무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백 년 동안의 강호가 조익현과 석동이라는 두 절세인물들 사이에 벌어진 대립의 연속이었다면, 그 대립 구도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게 된 것은 야율척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조익현에게는 석동이라는 필생의 적수가 있고, 모용단죽에게는 아난대활불이라는 숙적이 있지만, 야율척에게는 뚜렷한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한때 모용단죽의 후계자인 모용봉이 많은 무림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가 야율척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사 년 전에 생생하게 증명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야율척이라는 존재는 서장무림을 암중에 지배하고 있던 조익현의 위상마저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서장 출신이 아닌 조익현에게 은근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서장인(西藏人)들이 순수한 서장 출신인 야율척에게 심중으로 지지를 보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익현이 석동과의 결투에서 당한 부상을 치유하는 동안 야율척은 많은 서장무림인들의 성원과 지지를 한 몸에 얻었고, 그것은 이내 조익현에게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조익현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서장에서 무섭도록 확산되어 가고 있는 야율척의 영향력을 제지하거나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북해는 두 번째 사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소림사에서 구대문파의 회동이 있었다는 거요.”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진산월만큼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회동의 결과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 퇴출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그 수모를 씻기까지 무려 이십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다.

이북해는 진산월의 침착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가만히 주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진 장문인도 알고 있겠지만 당시의 회동 결과로 구대문파의 위치가 바뀌고 강호무림의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소. 그리고 그 와중에 성숙해가 태동되었소.”

진산월의 조용한 눈이 이북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담담하고 잔잔한 눈길이었지만 이북해는 왠지 시퍼렇게 날이 선 두 개의 칼날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산월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차분하면서도 서늘했다.

“성숙해는 이 대협이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다른 내막이라도 있소?”

이북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회동의 결과는 어떤 한 사람에게 커다란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소. 강호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던 거지. 그 사람은 강호의 정세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자신의 제자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 했소.”

“그 사람이 누구요?”

“석동이란 분이오.”

진산월로서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성숙해를 만든 사람이 모용 대협이었단 말이오?”

“모용 대협은 서장의 아난대활불을 막는 중책을 떠안고 있기에 다른 일을 맡을 수는 없었소.”

“그럼 석동에게 모용 대협 말고 또 다른 제자가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북해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나직했으나, 진산월의 귀에는 천둥보다 크게 들렸다.

“바로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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