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17화
제365장 강호비사(江湖秘史)(1)
강호제일의 신비인이며 누구도 자세한 출신내력을 알지 못했던 이북해가 석동의 둘째 제자라는 것은 진산월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이 대협이 모용 대협의 사제일 줄은 몰랐구려.”
이북해의 얼굴에 한 줄기 묘한 빛이 떠올랐다.
“사제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모용 대협이 기명제자(記名弟子)임에 비해 나는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일 뿐이오.”
“그 말은?”
“나는 사부의 진전(眞傳)을 얻지 못했소. 엄밀히 말하면 능력이 떨어져 전수받지 못했다고 해야 옳겠지.”
무기명제자란 정식 제자로 인정받지 못한 제자를 뜻한다. 무공을 배우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진학(眞學)을 전수받지 못하거나 여타의 사정 때문에 정식으로 사승(師承)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에 무기명제자라 불리게 된다.
정식 제자라 할 수 없기에 문파에 이름을 올릴 수도 없고, 외부에 누구의 제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수도 없다. 하지만 무공을 배운 것은 분명하기에 가르친 자는 자신의 제자로 인식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기명제자와 같은 취급을 하기도 한다.
석동의 진전이라면 취와미인상에서 얻은 대라삼검의 한 초식을 말하는 것이리라. 야율척은 그 초식을 대라장천이라 했으며, 석동이 완성한 후 이름 붙인 것이라고 했다.
모용단죽은 석동에게 배운 이 초식으로 강호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되었고, 서장의 아난대활불과 삼십 년에 걸친 대결전을 벌일 수 있었다.
하나 이북해는 이 절대적인 절학을 배우지 못했다.
이 초식을 익히기 위해서는 최고의 재능과 천재적인 두뇌가 필요한데, 이북해는 두뇌는 가졌으나 재능이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모용단죽이 구궁보를 세우며 강호를 앞에서 이끄는 존재가 된 것에 비해 이북해가 스스로의 정체를 최대한 숨긴 채 정보를 얻기 위해 강호의 밑바닥을 뒤지고 다닌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똑같은 사부에게서 배웠으나, 단지 진전을 얻지 못했기에 강호의 그늘에 숨은 채 모든 찬사와 환호가 모용단죽에게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북해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스스로 무기명제자임을 밝히는 이북해의 얼굴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눈빛이나 음성 또한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왠지 이북해의 심정이 결코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의 지시로 강호 전체를 통괄하는 정보단체를 만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신경을 썼던 것은 서장무림이 중원에 침투시킨 세력에 대한 파악이었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쾌의당이었소.”
이북해는 거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힘든 무심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강호에 나타난 의문의 세력에 대해 시선이 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소. 더구나 그들이 등장한 시기가 공교롭게도 성숙해가 조직되었을 때와 비슷해서 더욱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소.”
서장에서 야율척이 등장을 하고, 중원에서 성숙해가 만들어진 시기에 탄생한 쾌의당!
등장시기의 공교로움이야 단순히 우연이라 친다 해도 그 후에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던 이북해는 그들 수뇌부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점차 그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다.
그들이 벌이는 행사에 서장의 고수들이 얽히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이북해는 그들과 서장 무림에 대한 연관성에 주목을 했고, 한때는 그들이 야율척이 중원무림에 침투하기 위해 만든 전초세력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그들이 야율척과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음이 드러났고, 이내 야율척과 조익현을 지지하는 자들이 은연중에 서로 대립한 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이북해의 머리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석동은 강호의 정세를 보다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성숙해를 조직했다.
그렇다면 조익현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본거지인 서장에서 점점 커져가는 야율척의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조익현이 자신이 태어난 중원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만의 친위세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 친위세력은 중원에 바탕을 두겠지만, 서장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익현이 만든 친위세력이 바로 쾌의당이라고 가정한다면 야율척이 등장한 시기에 쾌의당이 세워지고, 그들이 서장무림과 크고 작은 접촉을 가지면서도 때로는 대립하는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북해는 자신의 이 가정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여 쾌의당의 행적과 수뇌들의 움직임을 추적해왔다.
하나 좀처럼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쾌의당의 주축을 이루는 칠대용왕은 일부 정체가 드러나긴 했으나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조익현과의 뚜렷한 연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영주는 신분은커녕 행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쾌의당주가 누구인지는 아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야율척의 세력이 중원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덩달아 쾌의당의 활동 또한 활발해졌고, 자연히 그들의 행사나 정체에 대한 많은 것들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쾌의당의 내부기밀들이 본격적으로 누출된 것은 신검무적 진산월과의 싸움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들은 새롭게 부흥하고 있는 종남파와 충돌을 거듭했고, 결국 서안에서 종남파를 이끌고 있는 신검무적과 칠대용왕의 한 사람이 결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때 드러난 검중용왕의 정체는 많은 무림인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후 신검무적과 쾌의당 사이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서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암중에 꼭꼭 숨겨있던 수뇌부의 정체 또한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북해가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계속 밝혀지는 쾌의당 수뇌들의 정체는 그야말로 강호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이북해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과 조익현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쾌의당주와 두 명의 영주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시 강호에 출도한 이북해의 앞에 절대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야율척의 행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북해는 야율척이 별다른 호위도 없이 중원을 떠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히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의 의중을 알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그에게 접근하려 했다.
하나 야율척은 완벽하게 분장하고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이북해를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에게 세 가지 약조를 내걸며 동행을 제안했다.
이미 야율척에게 자신의 정체를 발각당한 이북해로서는 도저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라도 야율척의 심중에 있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야율척과의 동행은 의외로 편안하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야율척은 중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무공에 관한 한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자랑해서 이북해를 몇 번이나 놀라게 했다.
이북해 또한 명승고적을 비롯한 중원의 속사정과 무림의 고수들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히 알고 있기에 야율척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 주곤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동행이 의외로 상당한 재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강호를 주유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동행은 구궁보가 있는 안휘성에서 신검무적과 음양신마가 놀라운 결전을 벌였던 융중을 지나 종남파와 형산파가 악산대전을 벌인 무당산의 우적지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 신검무적과 형산파의 육결검객 고진 간의 승부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헤어지기 전에 야율척은 무의식적인 척 하며 용선생이 조익현과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었소. 나에게는 이별 선물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나는 그가 나에게 용선생과 조익현의 관계에 대해 밝힌 것에는 나름대로 치밀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소.”
이북해는 야율척이 지나치듯 알려준 이 사실을 소홀히 보지 않았다.
정파의 최고 명숙 중 한 사람인 용선생이 서장 무림의 흑막이며 쾌의당의 배후인물로 의심하고 있는 조익현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조익현이 용선생의 말 몇 마디에 신검무적마저 위기에 빠뜨리게 할 정도의 가공할 절학이 담긴 비급을 전해 주었다는 것은 그들 사이의 친분관계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북해의 가정대로 조익현이 쾌의당의 창시자라면 그와 용선생과의 이러한 친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야율척과 헤어진 후 이북해는 많은 고심을 한 끝에 비밀리에 용선생을 찾아갔다. 그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솔직한 답변을 듣고자 한 것이다.
이북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난 용선생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사무치는군.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짐작은 모두 사실일세. 나는 쾌의당에서 천기령을 맡고 있네.”
이북해는 용선생의 성격상 거짓을 말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그가 너무도 순순하게 사실을 인정하자 약간의 당혹감과 놀라움을 느껴야 했다.
그가 강호의 명문정파인 형산파의 최고 어른의 신분으로 흑도의 청부집단으로 알려진 쾌의당에 속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며, 그의 신분이 그동안 누구도 알지 못했던 쾌의당의 천기령주라는 것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북해는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고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용 선배께서 어떻게 쾌의당과 연(緣)을 맺게 되었는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용선생의 주름진 노안에 말로 형용키 어려운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이렇게 된 마당에 말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십 여 년쯤 전이었던가? 깊은 밤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네. 그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었는데, 보는 순간 나는 그가 일찍이 만난 적이 없는 절세의 고수임을 알아차렸네. 그에게서 나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어떤 벽(壁)을 느꼈던 거지.”
용선생의 입에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주 오래된 고사(古事)가 흘러나왔다.
“그는 나에게 가벼운 일식(一式)을 선보였는데, 그 순간 나는 압도당해서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었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것은 나로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개세(蓋世)의 절학이었지.”
당시를 회상하는 듯 용선생의 두 눈은 가늘어졌고, 그 안에서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악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자신이 하나의 협의체를 만들고 있다며, 그 협의체에 가입해 줄 것을 요청했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어떠한 조직에도 가입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고, 그는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나 버렸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하더군.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소원의 대가는 오직 협의체에 드는 것뿐이며, 다른 어떠한 제약도 없을 것이라고 했지.”
괴노인과의 만남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용선생은 그의 마지막 말에는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형산파의 최고 어른이었고,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던 월광지를 완성하여 무공에도 아무런 여한이 없었다. 자신의 이상(理想)을 굽힐만한 간절한 소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용선생의 그러한 확신이 깨어진 것은 불과 일 년 후였다.
자신의 외조카이며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던 고진이 같은 오결검객인 사견심과의 승부에서 거듭된 패배를 당하며 폐인에 가까운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던 용선생은 아끼던 외조카의 피폐한 모습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외조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으나, 그가 아는 어떤 무공으로도 사견심에게서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특히 형산파의 무공으로는 절대로 사견심을 꺾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용선생이 괴노인을 찾아간 것은 어쩌면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괴노인의 그 일초를 보지 않았다면 용선생은 결코 그를 찾지 않았을 테니까.
괴노인은 용선생의 부탁에 순순히 무공비급 하나를 내놓았다.
“온전한 비급을 줄 수는 없소. 그건 내게도 생명과 같은 것이니까. 이건 절반의 비결이 담아 있는 것이오.”
용선생은 무림인에게 무공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이 보았던 괴노인의 절학은 능히 천하제일을 논(論)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반쪽이라고 해도 천하의 어떤 보물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용선생이 스스로 고매한 머리를 잠시 숙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값진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용선생은 괴노인과의 약속대로 그가 만든 협의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지닌 몇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면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