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18화
제365장 강호비사(江湖秘史)(2)
용선생이 만난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무공이나 지명도 면에서 그보다 못한 인물이 없었다.
“그때 내가 만난 자들은 화산파의 매장원과 소수마후, 그리고 수룡신군 황충이었는데, 강호에서의 명성은 별개로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결코 나보다 뒤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것이었네.”
매장원은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구봉 중 검의 최고봉인 용진산에 버금가는 실질적인 화산파의 이인자였고, 소수마후는 천수관음과 함께 여중제일고수를 논할 때 늘 거론되는 최고의 여고수였다. 또한 황충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공의 제일인자이자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도객이기도 해서 어느 한 사람 만만히 볼 인물이 없었다.
그런 무서운 고수들이 정체 모를 괴노인이 만든 조직에 포섭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선생은 커다란 놀라움과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선생은 그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괴노인과 협약을 맺고 조직에 가입했음을 알게 되었다. 용선생이 외조카에게 전할 최고의 무공 때문에 협의체에 들어온 것처럼 매장원과 소수마후, 황충 또한 각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괴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과 같은 고수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을 괴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랍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강호를 주름잡는 무서운 고수들이 한 명씩 새롭게 합류해 왔다. 그들의 면면 또한 기존의 다른 인물들에 조금도 못하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용선생과 함께 강호의 최절정고수로 군림해 온 무림구봉 중의 도봉 양천해의 가입은 용선생의 마음속에 한 가닥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깨끗하게 제거해주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양천해는 강호무림에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제일도객(第一刀客)일 뿐 아니라 인물됨이 진중하고 행동거지가 무거워서 외부의 일에 휩쓸리거나 쉽게 경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양천해가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괴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나중에야 용선생은 양천해가 자신의 도를 더욱 무섭게 단련하기 위해 괴노인에게 비무를 청했음을 알고 그의 승부욕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에 관한한 강호의 제일고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양천해는 자신의 도를 전력으로 펼칠만한 상대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세 명의 호적수를 찾아주겠다는 괴노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중 한 명은 괴노인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괴노인의 제자였고, 마지막 한 명은 협의체에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한 중년의 검객이었다. 놀랍게도 양천해는 그들과 차례로 싸워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자신의 도법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양천해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과의 비무에서 모두 패한 양천해는 자신의 도법을 단련하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그의 무공은 비무를 벌이기 전보다 훨씬 더 발전되어 있었다.
그런 양천해가 향상된 자신의 도법을 처음으로 무림인들 앞에 선보였던 순간이 바로 신검무적 진산월과의 결전에서였고, 그 싸움의 결과 그는 누구보다 화려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아마 양천해는 죽는 순간에도 단 한 점의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양천해는 승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진정한 무인(武人)이었고, 그를 쓰러뜨린 검초는 지금까지도 강호인들 사이에서 천하제일의 절학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검정중원이었다. 그와의 싸움 이후 진산월이 검정중원을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은 것을 알았다면 양천해는 오히려 지하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몰랐다.
양천해의 가입 이후에도 협의체에 속하는 절세고수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으며, 결국 아홉 명의 수뇌부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그때 비로소 그들은 쾌의당이라는 이름하에 본격적으로 강호 무림에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용선생이 괴노인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괴노인의 이름은 조익현이며, 놀랍게도 이미 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용선생으로서는 그의 나이가 백세가 넘은 것을 알고는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그 전에는 그의 존재조차 몰랐던 용선생은 조익현이란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익현의 무공은 용선생으로서도 추측하기 어려운 가공할 것이었으며, 심기 또한 뛰어나서 감히 그를 상대로 다른 마음을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막상 쾌의당이 활동을 시작하자 조익현은 자신의 제자에게 쾌의당을 맡기고는 그 자신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를 보기 위해서는 조익현의 제자를 통하는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동안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북해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용 선배께서는 방금 조익현의 제자가 쾌의당을 맡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가 현재 쾌의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겁니까?”
용선생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처음 협의체를 제안한 사람은 조익현이었지만, 실제로 그 협의체를 완성시켜 쾌의당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만든 자는 그의 제자였네. 다시 말해서 그가 바로 쾌의당의 당주일세.”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쉽게도 그 자의 이름은 알지 못하네. 우리는 그저 당주라고 불렀을 뿐이네.”
이북해는 쾌의당의 수뇌 중 한 사람으로 천기령을 맡고 있던 용선생이 당주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하자 내심 놀라움과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쾌의당주의 신분과 정체는 신비로만 점철되어 있어, 성숙해의 집요하고 꾸준한 조사로도 밝혀진 바가 별로 없었다.
이번에 용선생을 만나면서 비로소 쾌의당의 전모에 대해 알 수 있겠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용선생조차도 쾌의당 당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선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쾌의당주에 대해 최대한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협의체에 가입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네. 조익현이 자신의 제자라며 복면인 한 사람을 데려왔네. 목소리로 보아 대략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입의 젊은 청년으로 추측되는 인물이었지.”
용선생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익현 대신 복면인이 우리를 상대할 때가 점점 더 많아지더군. 나중에야 양천해 이후에 들어온 자들은 모두 그가 직접 섭외하여 데려온 것임을 알게 되었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쾌의당이 조직되고 그가 핵심적인 일을 맡게 되었고, 자연스레 모습을 보기 힘든 조익현 대신 그가 쾌의당의 당주로 행세하게 되었지.”
이북해는 용선생이 처음 복면인을 만난 시기를 저울질해보고는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자는 지금은 거의 오십에 가까운 나이겠군요.”
“그 후로도 계속 복면을 하고 있어서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그쯤 되었을 걸세.”
“그는 어떤 인물입니까?”
단도직입적인 이북해의 물음에 용선생의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네. 처음 본 것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실제로 만난 횟수는 예닐곱 번밖에 되지 않았네. 그중에서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두세 번에 불과했지. 다만 몇 가지, 분명하게 말할 만한 것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그가 무척 치밀한 성격에 좀처럼 말이 없는 과묵한 인물이라는 것이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내뱉는 법이 없어서 협의체의 인물들 중에는 의중을 알기 힘들다며 불평을 토하는 자들도 있었네.”
“치밀한 성격에 과묵한 인물이라…….”
강호무림에서 그러한 인물을 찾아보자면 수백 명도 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살검(殺劍)의 고수일세. 그중에서도 최고의 수법이라는 탈혼검을 익히고 있지.”
탈혼검은 강호에 퍼져있는 수많은 살인수법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것으로, 일단 발출되면 반드시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나 이북해는 탈혼검이란 말에도 별반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용선생 또한 내심 짐작하는 게 있는지 덤덤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일전에 천수관음 옥 선배에게서 천수나타가 어떻게 쾌의당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내막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이미 적지 않은 인물들이 쾌의당에 대해 조금씩 알고 있었던 거로군. 확실히 이십 년이란 아무리 무거운 비밀이라도 완벽하게 묻어두기에는 너무도 긴 세월이지.”
그렇게 말하는 용선생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산파의 최고 어른으로 일신의 명예를 저버리고 일개 청부집단인 쾌의당에 속하게 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일어날 파문에 대한 우려가 그의 주름진 두 눈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내 용선생은 흔들리는 마음을 수습하고는 한결 차분해진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정체도 잘 모르는 쾌의당의 당주에 대한 것이 아닐세. 그보다는 칠대용왕 중의 몇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네.”
이북해는 어느 때보다 안광을 밝게 번뜩였다. 칠대용왕의 상당수는 이미 그 정체가 드러났으나, 아직도 몇 사람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칠대용왕 중 자네가 아직 정체를 모르는 자들은 누구인가?”
용선생의 물음에 이북해는 즉시 대답했다.
“산중용왕(山中龍王)과 운중용왕, 그리고 인중용왕입니다.”
“그러리라 짐작했네. 그들 세 사람은 칠대용왕 중에서도 좀처럼 행적을 알기 어려운 자들이라 외부인들은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지. 산중용왕의 정체는 자네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을 듯한데, 그렇지 않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북해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되물었다.
“혹시 그는 녹림의 총표파자인 십절산군 사여명이 아닙니까?”
“정확히 알고 있군. 바로 그 일세.”
“산중용왕이란 이름에서 혹시 그가 아닐까 추측했을 뿐입니다.”
산중용왕이라는 이름과 녹림의 총표파자는 확실히 누가 생각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운중용왕은 누굽니까?”
용선생은 의외로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정체는 나도 모르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당주와 마찬가지로 늘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래도 목소리나 행동거지로 보아 의심되는 인물이 있기는 하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세 번째쯤 만났을 때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는 것을 보고는 심중을 굳혔지.”
“정파의 인물이군요.”
이북해의 단정적인 말에 용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라면 굳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겠지. 자기 딴에는 구름속의 신룡처럼 신비스러움을 나타내고 싶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대명천지에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겁쟁이의 치졸한 변명일 뿐일세.”
용선생의 가혹한 혹평이 이어졌다.
“칠대용왕과 두 명의 영주는 서로 독립적인 관계로, 사안마다 자신의 책임 하에 일을 진행할 수 있지. 그런데 그자가 끼어드는 일마다 유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거나 의문의 변고(變故)가 발생하곤 했네. 아무리 스스로 몸을 굽혀 협의체에 들어왔다고 해도 자신은 물론 자신을 믿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는 그런 위인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래서인지 같은 칠대용왕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고 있지 못하네.”
“그가 누굽니까?”
“내가 그의 복면을 벗겨 얼굴을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므로 직접적인 이름을 말해줄 수는 없네.”
“다만 추측이라도 좋습니다.”
용선생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강호에서 나에 못지않은 명성을 쌓은 인물일세.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있기도 하지. 아랫사람에게 적지 않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또한 수단이 좋아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더군.”
“……!”
“자네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군.”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자는 혹시…….”
이북해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용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보지도 않은 인물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할 수는 없네. 나는 추측을 말했을 뿐이고, 자네도 한 사람을 추측했을 뿐이네. 그걸로 만족하게.”
이북해로서는 용선생의 단호한 말에 흉중에 떠오르는 이름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북해의 아쉬움을 짐작이라도 한 듯 용선생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인중용왕에 대해 말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