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452화
452화. 마계 전쟁 (2)
향기로운 와인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길게 늘어서 있는 의자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최고급 요리들까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내부엔 마계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리며, 이번 회의의 마지막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군.”
“…후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치곤 꽤나 느긋해 보이는데?”
“킥킥. 그 위대하신 군타페르의 얼굴에 똥칠을 한 게 인간이라니. 거울을 통해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니까?”
“어서 오거라. 군타페르. 베리엘은 이번에 불참했으니 그리 열심히 찾지 않아도 된다.”
다른 마왕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 중에서 녹색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남자는 아예 대놓고 이죽였다.
“이래서야 이거… 베리엘이 등반자들 보는 눈이 더 좋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마인들이니 뭐니 엄청나게 모아다가 온갖 쇼를 한 놈이랑 딱 잡아서 하나만 파던 베리엘이랑 결과가 이 모양인 걸 보면 말이야.”
“긁어대지 마라. 아스모데우스. 내 인내심이 네놈까지 담아내기엔 너무나 작아졌으니.”
군타페르의 몸에서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보통이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버릴 만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아, 미안미안. 베리엘과는 라이벌 관계라는 걸 항상 까먹는다니까.”
“자기 영지까지 죄다 팔아먹은 얼간이랑 라이벌은 무슨. 근시일 이내에 소멸할 놈이다.”
“하긴, 네가 진다는 건 상상도 가지 않긴 해.”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타페르가 걸어온 행보를 봤을 때, 결단코 적을 살려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힐끗.
군타페르의 시선이 연회장 한켠으로 향했다.
“마신께선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은 건가?”
상석은 공석(空席).
마신은 공식적인 자리에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았기에, 이 회의는 오롯이 군단장급에 해당하는 마왕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에덴이 전면전이라도 선포하지 않으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실 분이 아니니까.”
“쳇! 마계의 앞날도 더럽게 어둡군.”
“그보다 군타페르.”
아스모데우스 옆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적색 머리카락에 근육질의 몸이 인상적인 마왕이었다.
마몬.
애녹서에 기록된 탐욕을 관장하는 자이다.
동시에 마몬은 마계의 경제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다.
“뭐냐?”
“대충 눈치는 채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이번 일을 꽤나 심각하게 보고 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거야 마왕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지만, 이번 일 만큼은 네가 선을 좀 넘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30층의 테마 때문인가?”
“그래, 본래라면 우리는 층계 공략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너는 네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시스템의 규칙에 크게 개입했다.”
반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30층에서 해야 할 전투가 자신들의 본거지인 마계에서 일어나게 생기지 않았는가?
만약, 상대가 마왕만 아니었다면 즉결 심판해버릴 만한 죄목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는 단순히 연회가 아닌 추궁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한 마왕이 저지른 멍청한 짓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그리고 그 이후에 일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까지도.
“베리엘을 처리한 이후의 보상이 탐난다면 그냥 말을 해라 마몬. 마계를 위한다는 명목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크크크… 생각이야 자유다만, 이미 일을 이 정도로 벌인 이상 실수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해서 말인데….”
달칵.
마몬이 테이블 위에 손바닥만 한 둥근 돌멩이 하나를 올려놨다.방패와 도끼가 교차해 있는 문양.
“이건….”
군타페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야만 전사, 흔히 바바리안으로 알려진 이들을 상징하는 성물이다.
* * *
베리엘의 영지에선 한창 전쟁 준비로 인해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이젠 대놓고 불이 붙어버린 이상, 살아남으려면 그만큼 여러 가지 변수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혁이 벽에 붙은 거대한 지도를 바라봤다.
마계의 모든 지형과 지물이 그려져 있는 지도엔 각각의 마왕들이 거주하는 영지와 군사 거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흠….”
이제부터 누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가 관건인데….
아마, 군타페르를 제외한 나머지 마왕들은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확률이 높았다.
굳이 자신들 스스로 시스템을 건드리는 위험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그런 걸 고려한다면, 역시나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스템이 정한 규율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던 존재들.
그렇기에 이번에 다른 층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후폭풍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이들.
바로, 31층에 위치한 ‘바바리안의 세계’가.
-바바리안.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근육질의 전투광인 놈들만 모인 집단이다.
사람 뚝배기를 깨는 게 가장 즐거운 오락거리라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리라.
게다가, 높은 자존심에 비해 아이큐가 더럽게 낮은 탓에 걸핏하면 다른 종족과의 마찰이 생기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가능한 한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뜻이다.
실제로 탑을 등반하는 것만 아니면, 가장 피하고 싶은 층계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타페르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바바리안 대신 천마를 선택한 거겠지.
하지만….
‘마몬이 가진 성유물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사의 동전.”
단순히 돌멩이에 문양을 새긴 것에 불과하지만, 바바리안에게는 꽤나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역대 일족을 이끄는 족장들이 소유하고 있던 동전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바리안 종족의 신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집불통인 전사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인 셈.
확실히… 이건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이 높았다.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진짜 상대가 나만 아니었어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을 텐데….’
진혁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흠. 여기 있었나?”
베리엘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열린 문 사이로 베리엘과 웬 나이가 지긋한 마족 한 명이 들어왔다.
“베리엘이야? 아 별건 아니고. 시간이 있을 때 전체적인 걸 좀 파악할까 해서….”
“그렇군. 다른 게 아니라 네가 부탁했던 병력들을 전부 모아뒀다. 창밖을 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래? 고마워.”
진혁이 자리를 옮겨 창 쪽으로 걸어갔다.
약 5층 높이의 성채에서 바라본 경치.
보통, 영화에서는 지휘관급이 모습을 드러내면, 길고 긴 뿔나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게 정석이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그런 장관이 펼쳐지는 걸 기대했건만.
실화냐?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너무 심각한데?’
영지에 있는 병사들은 잘 해봐야 백여 명.
그마저도 군기가 죄다 빠졌는지. 대열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아니 그뿐이랴?
투구며, 무기며, 방패며, 어딘가 하나씩 빼먹고 저마다 킬킬거리고 있다.
베리엘이 파산 직전이라는 것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당나라 군대 수준이잖아?
“허허. 어쩔 수 없죠.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쪽 분은 누구신지…?”
마력이 높지 않은 걸 보면, 상위 마족은 아닌데.
“크흠. 소개하지. 우리 영지를 총괄하고 있는 집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헤르트’라고 합니다. 베리엘 님을 수백 년째 모시고 있습죠. 인간 분을 영지에 모시는 건 처음이라,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세헤르트가 최대한 빨리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헤르트가 소박한 미소를 지었다.
마족답지 않게 따뜻하면서 정이 넘친다.
마치, 15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이쪽은 내 사도인 강진….”
“카악! 퉤! 아니, X벌 이 인간이 그놈이었습니까? 강진혁? 그렇다면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아예 여기에 오지도 않게. 니X럴.”
…했던 말 전부 취소다.
사람, 아니, 마족 중에서도 다중인격자가 있을 줄이야.
입담까지 걸쭉한 게 아주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미, 미안하다. 집사 그게….”
“미안하긴 개뿔.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하며 이 거지 똥구멍만 한 영지를 유지하려 애쓴 줄 아십니까?”
“아, 알지. 나도 알아. 아는데….”
“마왕이라는 작자는 생각 없이 인간 하나 때문에 영지고 땅이고 숲이고 죄다 날려먹지. 근데 꼴에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다른 마왕들한텐 죽어도 안 지려고 하네? 옘병. 근데, 왜 또 사직서는 안 받아주는 거래?”
거의 미쳐 날뛰는 수준.
지금까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아예 목에 핏대까지 제대로 섰다.
“아니, 그래도… 내가 명색이 마왕이고 자네가 모시는 군주인데….”
“아, 꼬우면 그냥 죽이십쇼. 과로로 죽나 홧병으로 죽나 아니면 군타페르한테 죽나. 어차피 뒈질 운명인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배째라식 모드가 이어졌다.
베리엘도 쩔쩔매는 걸 보니 그동안 찔리는 게 많긴 많은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내가 강진혁이라는 사실을 방금 전가지 세헤르트에게 숨기고 있었을까?
그래도 다행이다.
이 영지 내에 아직 의욕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어서.
진혁이 오히려 생긋 웃었다.
“이거, 우리 고생하신 집사님을 위해… 짭짤한 돈 냄새가 나는 이이기를 좀 해야겠네요.”
지금부터 판을 새롭게 짜볼 시간이다.
* * *
절대적인 전력 차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승리로 귀결되진 않는다.
전쟁에 있어, 얼마나 다양한 변수들을 조합해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는 소리다.
마계에 온 지 3일이 되는 날.
진혁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파격적인 첫 수를 두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진심…으로 이렇게 할 생각이냐?”
천유성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무림에서 뒤떨어져 방황하던 찰나.
헤임달을 통해 간신히 천마 프로듀스 101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도착한 곳이 바로 시련의 탑 상층부에 위치한 마계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눈앞에 있는 곳은 군타페르의 핵심 거점 중 하나.
‘블레인 성채’라 불리는 장소였다.
상위 혈족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건 물론, 성 아래에서만 봐도 난공불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규모였다.
“이야, 보면 볼수록 좀 빡세긴 한 것 같긴 해.”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유분수지. 고작 이 병력으로 저길 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 몰라? 어차피 영지에 가만히 있다간 우리가 사냥당했을 거야.”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하여간, 네놈이랑 같이 다녔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거다.”
“좀 믿어 봐. 나랑 하루 이틀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지금 둔 수는 썩 나쁘지 않다.
군타페르에게 있어 이번 전쟁은 단순히 승리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박살을 내야만 하는 시험대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마왕들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선보여야 하는 자리.
아무리 철두철미한 군타페르라 할지라도 부담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쪽에서 선제공격을 하는 건 그 부담에 숟가락을 제대로 쑤셔 박은 셈이지.’
좋아.
이제 슬슬 무대는 갖춰진 것 같고….
따악!
진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크르르….”
“컹!컹!컹!”
여기저기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