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916화


군림천하 (916)

막 동방광일을 향해 다가오던 동방욱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오히려 뒤로 훌쩍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연속해서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세 명의 절정 고수들을 앞에 두고도 단 한 번도 흔들림이나 경거망동을 보이지 않던 동방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다급한 모습이었다.

동방욱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삼 장이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후에야 비로소 신형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한 줄기 화살처럼 곧장,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고준에게로 향했다. 차분하고 담담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시퍼런 칼날을 품은 듯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땅을 타고 공격해 들어오는 독공(毒功)이라…………… 이건 대체 뭐라는 수법이오?”

고준은 동방욱의 섬뜩한 눈빛을 받고도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히죽 웃었다.

“독지계라는 것이오. 동방 대협이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놀라운 무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잔재주일 뿐이지.”

고준 스스로는 잔재주라고 폄하했으나, 동방욱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진지하고 긴장된 기색이 감돌았다.

조금 전 동방욱은 동방광일을 향해 막 신형을 날리려다 발밑으로 무언가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 기운은 어찌나 은밀하게 다가왔던지 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발바닥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 후였다.

동방욱은 황급히 다른 곳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기운은 그의 발밑을 집요하게 노리고 들어왔다.

세 번째로 몸을 날리고 나서야 동방욱은 그 기운이 땅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침투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기운은 동방욱이 지금껏 만나 보지 못한 은밀하기 이를 데 없는 독기(氣)였다. 설마 땅을 통해 상대를 공격하는 독공이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동방욱은 황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발밑을 타고 들어오는 독기를 억제했으나, 여전히 발바닥에 은은한 통증이 있음을 알고는 새삼 독기의 지독한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독지계라…… 확실히 이름 그대로 무서운 독술이구려. 하지만 이 정도로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을 거요.”

고준은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입가에 연신 환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경천신수에게 찬사를 받다니 감개무량한 일이오. 하지만 동방 대협의 말씀은 조금 잘못된 것 같소.”

“무엇이 잘못됐다는 거요?”

“내 독지계가 비록 천하무쌍의 독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벽히 펼쳐진다면 충분히 동방 대협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오. 그리고 분명히 말하건대, 독지계는 이미 훌륭하게 완성되었소. 그 이름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독지계.

이름 그대로라면 주위를 독의 세계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었다.

동방욱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안색이 변해 황급히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발아래 땅은 은은한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니 처음 자신이 서 있던 땅은 물론이고 지금 그가 있는 일대가 모조리 남색 천지로 변해 있었다.

남색의 땅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풍겨 오지 않았으나, 동방욱은 남색으로 변한 땅 전체가 지독한 독기로 잠식되어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독지계라는 이름 그대로 주위가 온통 독지로 화해 버린 것이다.

실로 가공스러운 독공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욱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땅에서 올라온 푸르스름한 기운은 그의 두 발을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조금씩 다리 위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독지계의 무서움이었다.

독지계는 시전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그사이에 상대가 그 영역을 벗어나게 되면 펼치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완벽하게 펼쳐진다면 아무리 막강한 내공을 가지고 신법이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독지로 구축된 영역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일정 구역에 은밀히 뿌려 둔 극독과 체내에 침투한 독기가 만나는 순간, 그 지역이 예외 없이 끔찍한 독지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아무리 담대한 인물이라도 자신이 내딛는 땅이 어느 순간부터 모조리 독지로 변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이미 자신의 몸 또한 독지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방욱도 자신의 몸이 이미 독공의 침투를 허용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황급히 공력을 운기해 독기가 체내로 퍼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나 신발을 뚫고 발바닥을 침입한 독기는 그가 아무리 공력을 끌어 올려 막으려 해도 멈추지 않고 야금야금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제야 동방욱은 자신이 이미 독지계에 완벽하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세 번의 이동만으로 독공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몸을 멈춘 것이 실수였는지도 몰랐다. 만약 계속 몸을 놀려 이 일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면 독지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동방욱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자신이 발바닥에 통증을 느낀 그 순간에 이미 그의 몸은 독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였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생각할수록 고준의 독지계는 무시무시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땅을 통해 전해져 오는 독지계를 대체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고준의 정체를 알자마자 그에게 신경을 기울여 그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독지계를 막을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하나 혈창 봉구령과 패존 동방광일 같은 절세의 고수들을 눈앞에 두고 어찌 고준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두 명의 절정 고수들을 앞세우고 고준이 나타난 순간 이미 동방욱의 운명은 결정되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하나 동방욱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독지계에 빠져 맹독이 발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동방욱은 빠르게 무릎 아래의 대혈(穴) 몇 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파파팍!

다섯 개의 대혈을 모두 점하자, 발바닥을 타고 조금씩 위로 번져 올라오던 독기가 무릎을 기점으로 흐름을 멈추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방광일이 냉소를 날렸다.

“흥! 그런 임시방편으로 심맥을 타고 흐르는 독기를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설사 막는다 하여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몸으로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동방욱은 천천히 허리를 편 채로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왜 나에게 덤벼들지 않는 것이오?”

동방광일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선뜻 몸을 움직이지 않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지계로 인해 동방욱의 주위 일대가 온통 푸르스름하게 변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그 안으로 뛰어들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동방광일은 한쪽에 서 있는 고준을 힐끗 돌아보았다.

“독지로 들어갈 방법이 있는가?”

고준이 고개를 저었다.

“저 독지는 일곱 가지 극독이 뒤섞여 생성되는 것이라 일단 펼쳐지면 자연적으로 해독되기 전에는 누구도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소.”

“자네도 말인가?”

“나도 사람이오.”

시전한 고준조차도 마음대로 거두거나 해독하지 못한다는 말에 동방광일은 새삼 독지계의 무서움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저 독지는 언제 사라지는 건가?”

고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확한 건 나도 모르오, 빠르면 한 시진 만에 없어질 수도 있고, 늦으면 반나절이 걸릴지도 모르오. 운이 나쁘면 며칠 걸릴 수도 있고.”

동방광일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찌푸려졌다.

“자기가 펼치고도 언제까지 유지되는지조차 모른단 말인가?”

고준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독기의 움직임은 날씨와 기온, 습도, 바람의 방향 그리고 땅의 경도 등 주변의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는 법이오. 인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소.”

동방광일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저놈을 이대로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느긋하게 기다려 보시오. 정 급하면 가주께서 직접 솜씨를 부려 보시든가.”

“정말 이러긴가?”

동방광일이 계속 자신을 윽박지르자 여유만만한 미소가 어려 있던 고준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그의 발을 묶고 중독시킨 것만으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이오.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가 두려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가주가 나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동방광일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변하고 코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 동방광일은 차마 고준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고준의 신분은 자신과 같은 위치이며,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배분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고준 역시 동방광일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한 문파를 이끌고 있고, 무공 또한 그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준의 독공은 정말 무서워서 미리 방비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고수라 해도 피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방광일은 몇 번이나 그가 독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가 결코 만만하게 상대할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준의 말마따나 이대로 시간만 지나도 동방욱은 독기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한 줌 핏물이 되거나,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두 다리를 잃을 게 분명했다.

동방광일 또한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동방욱의 숨통이 끊어지는 장면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게 동방광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만큼 동방광일은 동방욱에 대해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고준에게 볼일이 없어진 동방광일은 봉구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봉구령의 낯빛은 아직도 창백했고, 얼굴과 앞가슴에는 피를 토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창을 들고 서 있는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몸에서 풍기는 기도 또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봉구령은 칼날처럼 예리하고 서늘한 눈으로 동방욱을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 패퇴당한 것이 상당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동방광일은 봉구령을 향해 다가갔다.

“어쩔 셈인가? 이대로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독지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가?”

동방광일의 물음에 봉구령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미련한 짓이지.”

동방광일이 반색을 했다.

“역시 자네와는 말이 통하는군.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끄집어내야지.”

“어떻게 말인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봉구령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저기 아주 좋은 미끼가 있지 않소?”

무심코 그쪽을 돌아본 동방광일의 눈에 기광이 번뜩거렸다.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독지 속에 위태롭게 서 있는 동방욱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하늘색 유삼 청년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