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19화
군림천하 (919)
고준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그가 오늘 펼친 독지계는 사전 준비가 대단히 힘들고 복잡해서 적지 않은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게다가 독지계를 이루는 중추적인 극독 몇 가지는 다시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어서 그로서는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려했던 동방욱을 쓰러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신목십이호를 놓치게 되었으니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오늘 일은 이득을 보기보다는 손해를 본 느낌이 드는군.’
반면에 갈의 청년의 표정은 의외로 평상시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동방욱을 제거한 것은 큰 성과입니다. 사부님께서도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고준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둘째 공자가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 되는구려. 아무튼 이번 일로 강호의 하늘이 얼마나 높고 깊은지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 같소.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비로소 우물 밖 세상을 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고준이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비유하며 스스로를 비웃었으나, 갈의 청년은 물론이고 봉구령 또한 그를 조금도 우습게 보지 않았다.
오늘 일에서는 고준의 공이 절대적이었음을 그들도 여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운기조식을 끝낸 동방광일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동방욱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본가(本家)를 무시하고 혼자 고고한 척 오만을 떨더니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구나!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느냐?”
동방광일은 이미 시신이 된 동방욱을 한참이나 조롱하고는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자네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군. 모두 수고가 많았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봉구령의 눈빛이 스산하게 번뜩였고, 늘 미소가 감돌던 고준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분위기를 감지한 갈의 청년이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가주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숙원(宿怨)을 푸셨으니 마음 편히 주무실 수 있겠군요.”
동방광일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동방욱을 제거한 것이 어지간히 좋았는지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하, 이를 말이오! 역시 둘째 공자의 안목과 혜안은 뛰어나기 그지없구려..
두 사람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대방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고준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밤이 너무 깊어서 그런지 갑자기 잠이 쏟아지는군. 나는 이만 자러 가야겠소.”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렇게 되자 남은 세 사람 또한 그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장내에는 차갑게 식어 가는 시신 한 구만이 동그마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깊은 밤의 적막에 잠긴 공터는 왠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휙!
난데없이 두 개의 인영이 바람처럼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진산월과 전흠이었다.
전흠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고는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문 사형도 보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갈의를 입은 자는 한시몽이 숲속으로 몸을 피하는 장면을 분명히 목격했을 겁니다.”
진산월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서 있는 방향에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한시몽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한시몽이 기다시피 숲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자의 고개가 아주 잠깐 그쪽으로 돌아갔지.”
“한시몽이 숨는 것을 보았는데도 왜 그자가 못 본 척 시치미를 떼었는지 모르겠군요.”
“좀 더 큰 목표를 노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시몽마저 여기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누가 동방욱과 그를 살해했는지 신목령주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물론 의심은 하겠지만,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게 되지. 하지만 한시몽이 살아남는다면 다른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부러 신목령주를 격동시키기 위해 한시몽의 탈출을 눈감아 준 거란 말씀입니까?”
“분명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시몽이 이대로 신목령주에게 돌아간다면 진실을 알고 난 신목령주가 가만히 참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
전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장문 사형께서는 그자의 정체를 아시겠습니까?”
“쾌의당주의 둘째 제자인 듯싶구나.”
“갈휘를 죽인 탈혼검의 고수가 그란 말입니까?”
“그렇다.”
전흠이 생각해 보니 진산월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이 그를 탈혼검의 고수이자 쾌의당주의 둘째 제자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왜 한시몽을 향해 탈혼검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승부가 더 확실해졌을 텐데 말입니다.”
“탈혼검은 여러 가지가 신비에 싸인 무공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자의 목적은 한시몽을 이용해 신목령주를 끌어내는 것이니 한시몽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전흠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문 사형의 말씀을 듣고 나니 비로소 지금까지의 사태가 일목요연해 보이는군요. 강호의 일이란 게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것 같습니다.”
문득 전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방욱의 시신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동안 피바다 속에 잠겨 있는 동방욱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무거운 탄식을 토해 냈다.
“일세의 고수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버리다니…………… 강호인의 삶이란 참으로 허무하군요.”
진산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흠은 검붉은 핏물이 잔뜩 묻어 있는 동방욱의 몸을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했다.
“대체 어떤 독이기에 이렇게 지독한 위력을 발휘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해남에서도 이 정도 독은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서장의 고원지대에서 자라는 독물은 중원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 독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누구라도 이런 꼴을 당할 수 있지.”
“중원의 독도 방비하기 어려운데 서장의 독물까지 대비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강호에서는 늘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특히 상대가 독공(毒功)의 고수임을 알았다면 바람의 방향과 주위의 지형지물, 심지어 상대의 사소한 손동작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쉽게도 동방욱은 그런 점에서 대비를 소홀히 했지.”
“……!”
“봉구령과 동방광일의 합공이 위력적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고준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었는데, 그는 합공을 막느라 미처 고준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고준이 마음 놓고 그의 주변 일대에 자신의 독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흠은 동방욱이 보여 준 놀라운 무공과 어떤 상황에서도 한 점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고고한 모습에 감탄했기에 동방욱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진산월의 말에 진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동방 대협답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였군요. 동방 대협 같은 강호의 절정 고수가 왜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방욱은 강호에서의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의 태도를 보면 독공의 고수를 상대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아마도 동방욱은 단순히 고준이 독술을 펼칠 때만 조심하면 된다고 다소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
진산월의 말대로 동방욱은 강호에서 너무도 짧은 시간 동안에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혁혁한 명성을 얻었지만, 막상 강호에서 활동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특히 그는 명문 세가의 후손답게 정정당당한 승부를 주로 했기에 오늘과 같은 암습과 독계가 난무하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동방촌에 칩거한 후로는 남과 제대로 싸워 본 적조차 없으니 결국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고준의 독술에 맥없이 걸려들고 만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흠이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가 비록 강호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고 해도 신목령에 몸을 담은 이상 언제든 무림의 험난한 파도를 맞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대응은 아쉬운 감이 있지.”
전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예전에는 신목령과 쾌의당이 서로 비슷한 길을 걷는 듯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두 집단이 완전히 등을 돌리더니 이제는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살수를 쓰고 있군요. 그들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반목하는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그들은 보는 방향이 달랐다. 신목령은 쾌의당과 불가근불가원(不可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쾌의당은 끊임없이 신목령을 향해 술수를 부렸지. 그래도 일정한 선은 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최근에 쾌의당의 방침이 바뀐 듯하구나.”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진산월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 속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신목령을 말살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전흠은 흠칫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동방욱은 오천왕 중의 일인일 뿐 아니라 신목령주가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그를 제거하는 것은 신목령주의 손발을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지. 이 정도라면 신목령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쾌의당이 굳이 신목령을 없애려는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건 아무래도 조익현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조익현이라면 장문 사형께서 최근에 언급하신 자 말씀입니까?”
“그래. 조익현은 쾌의당을 만든 후 그 뒤에 숨어서 가급적 활동을 자제해 왔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제일 먼저 신목령을 제거하여 경고를 보내려는 것일 게다. 어쩌면 도발일 수도 있겠군.”
“누구에게 말입니까?”
진산월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더욱 깊어졌다.
“신목령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겠지.”
전흠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누굽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다.”
“예? 그녀라니요?”
진산월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짤막하게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철혈홍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