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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620화


620화. 전쟁 속에 전쟁 (3)

팽팽했던 공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졌다.

“좋아. 우리와 함께 강진혁을 잡으러 가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지? 편하게 말해보게.”

브라흐마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근사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니 당연히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우리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유. 당신들의 세력 다툼에 껴서 등골 터지는 건 사양하고 싶다. 차라리 이곳에서 포로들을 관리하면서 만에 하나 적들이 뒤를 친다면 그거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아페르망이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라.

마법사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자세였다.

브라흐마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요구기도 했다.

“후방 임무라… 확실히 그대가 좋아하는 방식 같군. 알겠다 그 정도야. 그럼, 이곳에 대한 방어를 부탁하지.”

완벽한 포로까지 생겼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이제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페르망에게 이곳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넘겨준 브라흐마가 복도를 따라 홀로 걸었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이제 귀찮게 하는 놈들이 다 없어지겠지.’

비슈누나 시바.

인도의 3주신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3주신이 아닌 유일신이 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놈에 권력이 뭔지. 머리 아프게 치고받고 싸우느라 정신이 다 나갈 지경이다.

하지만.

언노운과의 계약을 통해 45층보다 더 위의 층계들은 물론 탑 밖에서도 자유를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에 더 이상 끼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이제야 마침내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브라흐마의 심장이 기분 좋게 고동쳤다.

그리고 천세의 군대가 완전히 사원을 떠났을 때.

“갔냐?”

“예.”

“그런 것 같군.”

꽁꽁 묶여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두둑….

엘리스가 구속하고 있던 수갑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우우우웅!

철컹!

테레사와 천유성 역시 신성력과 내공을 이용해 수갑을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이태민과 유연화도 가뿐하게 자유를 되찾은 뒤 기지개를 켰다.

완벽한 잠입.

일부러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준 보상을 톡톡히 받았다.

물론, ‘일부러 적들에게 잡힌다’는 어설픈 연기가 완벽하게 통한 것은 한 명의 강력한 조력자 덕분이다.

엘리스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신경 써 줘서 아주 쉽게 들어올 수 있었어.”

“별말씀을…. 제가 한 거라곤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였습니다.”

기둥의 그림자 뒤에서 낯익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브라흐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대마도사 ‘아페르망’이었다.

“그 몇 마디가 컸어. 그보다… 계약자가 뭐라고 전한 거야? 당신을 만나면 물어보라고 하던데.”

엘리스와 나머지 멤버들이 진혁으로부터 전해 받은 지시는 두 개.

1. 적당히 싸우다가 심상세계로 들어오는 틈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적에게 포로로 잡혀라.

2. 아페르망이 도울 테니 그를 믿고 따라라.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다.

이것이었다.

오롯이 진혁을 믿었기에 묵묵히 따라왔었지만, 자초지종에 대해서 들을 필요가 있었다.

“저 역시 강진혁 플레이어와 직접 만났었던 건 아니고… 얼마 전에 그자가 보낸 이들로부터 꽤나 근사한 제안을 들었습니다. 마법사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유혹을 말이죠.”

페시스.

이제는 40층 대 중층부까지 오를 수 있게 된 위대한 탐험가이다.

진혁은 페시스와 프레이 그리고 월영을 한 팀으로 묶어 이번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빌드업을 세워뒀었다.

‘언약’이라는 아포칼립스의 특성과 아웃브레이크를 통해 보스들을 모을 것이라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데?”

“페시스라는 인간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임무가 있다고 하니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페시스라면 나도 알고 있어. 믿을 수 있는 남자니 괜찮겠지.”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내부 깊숙이 침입한 이점을 살리는 것이다.

브라흐마를 비롯한 주력군이 진혁을 잡기 위해 반대쪽으로 이동했을 테니, 상대적으로 허점투성이인 본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시간이다.

천유성과 테레사가 아페르망이 빼돌린 무기들을 건네받았다.

“이곳에 대한 정보는 각자의 머릿속으로 직접 주입해드리겠습니다. 락타크와 나머지 보스들은 완전히 뻗어 있으니 기습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딱 하나. 인드라만은 조심하십시오.”

뇌신 인드라.

번개를 다양하게 다루는 창의적인 능력은 오히려 파괴력 그 자체만에 집중하는 제우스보다 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확실히 아무리 부상당했다고 해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다.

“엣헴! 걱정 말거라. 짐이 있지 않느냐.”

엘리스가 양 손을 허리에 갖다 댔다.

마력과는 다르게 천진난만한 모습.

“네! 반드시 이기고 돌아가요. 저희가 있던 세계로.”

테레사가 환하게 웃었다.

“못 말리겠군. 이런 멤버로 천세와 싸워야 하다니.”

천유성이 한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일단은 정찰부터 해야죠..”

이태민의 기계 드론과.

“자잘한 것들의 제압은 나한테 맡겨.”

유연화의 건틀릿.

그렇게 포로에서 자유의 몸이 된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팔라타문사르 협곡.

45층에 존재하는 온갖 지역 중에서도 가장 험지로 꼽히는 이곳은 깎아질 듯한 절벽이 거미처럼 얽히고설켜 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설령 천세의 신들마저도 이곳에 함부로 들어갔다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단 말이 돌았으니까.

“하필이면 여기로 올 줄이야.”

브라흐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협곡의 특성상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것 역시 어려울 터.

숫자상의 이점도 이런 환경에서라면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짜증 나는 곳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이 일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브라흐마 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한 이야기긴 하죠.”

창소와 소멸.

만물을 관장하는 브라흐마의 사기적인 권능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역시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단.

“여길 파괴한다면 우리의 위업이 말도 안 되게 손상되겠지.”

천세의 시작을 함께한 대협곡. 그런 곳을 없애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까지 노리고 강진혁은 이곳을 주요 전장으로 고른 것인가.’

무서운 놈이다.

이곳에 처음 온 인간이. 그 수많은 장소 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걸 알아보다니.

그 미친 듯한 선구안과 상황 판단 능력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동시에 저 안에 어떠한 기상천외한 함정을 파뒀을지… 벌써부터 전신의 신경이 바짝바짝 달아올랐다.

……안전하게 하려면 천천히 거점을 확보하며 전진하는 것인데.

문제는 누가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느냐는 점이다.

다행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움직이겠다. 오합지졸끼리 매복을 해봤자 우리에겐 소용없을 거다.”

아수라가 직접 요수들을 이끌고 나섰다.

“괜찮겠나? 생각보다 만만치 않을 텐데?”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들 앞가림이나 잘해라.”

“후후후. 알겠다. 그럼 믿어보지.”

아수라가 즉시 자리를 박찼다.

그 뒤를 친위대 격인 요수들이 따랐다.

가볍고 빠르게.

아수라가 협곡 깊숙이 진출했다.

“온다.”

수풀 속에서 로키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수백의 발키리들이 창을 움켜쥔 채 투창할 자세를 취했다.

“방심해선 안 됩니다. ‘작전’대로 움직여야 가능성이 있어요.”

진혁이 코인거래소에서 구매한 아이템들을 만지작거렸다.

천세와는 몇 번이고 싸워봤지만, 괜히 다른 거대 세력들을 제치고 탑의 45층에 우뚝 군림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막강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

로키가 신중하게 적들이 사거리에 들어오는 타이밍을 살폈다.

50m. 30m… 5m.

바로 그 순간.

“쏴라!”

[발키리들이 ‘발할라의 창’을 소환합니다!]

수많은 은색 섬광이 뿜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

바위와 수풀 속에서 번개처럼 가한 기습.

하지만.

카카카카캉!

아수라를 비롯한 요수들의 감각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기괴하게 생긴 병장기들로부터 녹색 기운이 솟구쳤다.

“역시 쥐새끼들이 숨어 있었군.”

아수라의 눈이 번뜩였다.

정확히 발키리들과 로키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시!”

로키의 호령에 발키리들이 재차 투창할 준비를 했다.

“멍청하긴! 기습도 안 통했는데, 똑같은 게 또 먹힐 거라 생각하는 거냐!”

“누가 똑같은 거래?”

[로키가 고유 능력 ‘기만의 서커스’를 발동합니다!]

[‘다중착시’의 효과가 중첩됩니다!]

창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환영에 환영을 더한 은빛 물결이 협곡의 입구를 새하얗게 물들었다.

콰콰콰콰콰콰쾅!

곧이어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굉장하긴 하군요.”

아수라의 전투를 지켜보던 천세의 신격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날카로운 기습에도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과연 천세의 숙적다운 모습이었다.

“기습에 특화된 로키를 상대해준다면 우리로서도 위험부담이 확 줄지. 좋아. 우리도 이동한다. 발이 빠른 자들 위주로 선별해 앞을 맡고 본대는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오도록 해라. 특히 보급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천세의 대군이 일사분란하게 재배치를 마쳤다.

쿵! 쿵! 쿵!

엄청난 대군이 수십 개로 나뉘어 협곡에 진입했다.

***

전쟁이 개시된 지 약 1시간.

나름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긴 했으나. 천세의 대군은 큰 피해 없이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소규모 국지전에서 연전연승을 달성한 것이다.

“순조롭군요.”

“아무렴, 급조된 연합으로 우리 정예들을 막아내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크하하하! 협곡을 골랐을 땐 조금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그게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하긴, 외부인치고는 나름 애쓴 거긴 하지.”

천세의 신격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붙는 족족 박살 내 버리는 데다, 적들이 준비한 함정과 전략 역시 한 수, 두 수 앞을 읽어 모조리 파훼해버렸기에 자신감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브라흐마조차도 압도적인 격차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조금씩 긴장감을 놓기 시작했다.

잡아들인 포로만 해도 몇천에 이르렀으니까.

그렇기에.

그 누구도 포로들 틈에 섞여 있는 늙수그레한 노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크흠! 큼!

진혁이 포로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지막으로 손거울을 들여다봤다.

낡디낡은 꼬부랑 수염과 깊게 파인 주름. 꼬장꼬장한 눈매까지.

어딜 봐도 빠지지 않는 완벽한 변장이다.

‘자, 어디 시작해볼까.’

이걸로.

적의 깊숙한 곳에서 아주 근사한 한 방을 날려줄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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