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6화
666화. 탑의 귀환자들 (2)
클레망스와의 해프닝이 있은 직후 진혁은 정령수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돌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멤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데없이 강적이 개입했으니 당연히 심각해질 수밖에.
“빛의 정령왕이 놈들 손에 넘어갔다는 건가.”
천유성이 검을 만지작거렸다.
“타이밍이 안 좋았어. 아주 작정하고 준비를 하고 왔더라고.”
“짐도 귀환자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다. 몇 명은 직접 만나본 적도 있고. 대부분 조용한 성격이긴 했지만, 지랄 같은 놈들도 있었지.”
엘리스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건드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진조답게 경험 또한 풍부했다.
“혹시, 그 귀환자라는 이들이 간 위치는 알 수 있나요? 장소만 알아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좀 더 생길 텐데요. 진입 루트나 샛길을 차는 건 제가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요정의 샘물 쪽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페시스의 질문에 진혁이 라이볼트에게 남아 있는 빛의 잔향으로 추적한 위치를 공개했다.
그러자 이번엔 장로 쪽에서 묵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쪽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하필이면 가도 저런 곳으로 갔군.”
요정의 샘물은 말 그대로 협곡에 있는 요정들의 정기가 서려 있는 성역.
서로를 존중하는 정령수들도 존중의 뜻을 담아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장소였다.
거길 선택했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협곡 공략과 정령왕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쪽에서 한 판 붙긴 해야 할 겁니다.”
“장소 선점을 빼앗긴 건 꽤나 뼈아프긴 하다만 그래도 태고의 존재인지 뭔지 하는 놈들보다는 훨씬 더 할 만한 상황 아니냐?”
“응. 단순 계산으로도 승률이 10배는 높아. 응.”
“우리 회사 사장은 언약도 막은 괴물이니까.”
“주인 앞에선 귀환자든 신격이든 한낱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긴 하지.”
“모기이이이!”
든든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가슴이 살짝 뭉클해지려 한다.
워낙에 제멋대로에다가 말도 안 듣는 애들을 어르고 달내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그동안 희생하며 노력한 보람이 조금은 느껴졌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걸렸는데, 저 인간은 대체 무엇이냐?”
엘리스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클레망스로 인해 모든 동료들을 잃어버린 공대장이 한쪽 구석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줄을 잘못 선 패잔병이야. 그래도 눈치는 좀 있어서 혼자서 살아남았어.”
태고의 피를 마시지 않은 덕에 유일하게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데다 충격을 크게 받아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목표만은 확실해 보였다.
동고동락 했던 스윙뱃 동료들을 위한 복수. 폐인이 되든 죽어서 그들 곁으로 가든. 마지막으로 일 처리를 끝맺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지 하겠다. 알고 있는 정보를 달라면 그것도 넘겨주지. 그러니 나도 싸움에 함께 하게 해다오.”
“서정희에 관한 것도 전부 알려줄 수 있어? 그 여자가 또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고 어떤 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알고 싶은데.”
“나도 전부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해 usb에 따로 모아둔 자료들이 있다. 그걸 전부 주겠다.”
“나쁘지 않네. 그리고 하나 더.”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난 나를 건드는 놈은 그 누구든간에 100배로 갚아줘야 잠에 잘 오는 스타일인데, 아무래도 탑 밖에서 움직이면 법이라는 굴레 때문에 제약이 많이 걸리거든.”
“당신이 서정희와 독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 건가?”
“이야. 역시 공대장이라 그런지 말귀가 잘 통해서 좋네.”
탑 밖에서의 궂은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인턴 정도로 들어오기엔 충분한 자격이다.
‘아직 능력도 복사하지 못 하기도 했지.’
고유성창치곤 최하급에 속하는 능력이긴 했지만, 다른 고유성창과 융합하기 위한 재료로는 충분히 쓰임새가 있었다.
방향성이 정해졌으니 이제 슬슬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볼 차례다.
진혁이 구상 해둔 몇 가지 카드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 * *
아름다운 샘물이 넘실거리는 계곡.귀여운 요정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터전에 낯선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귀여운 아이들이네. 저 행복한 미소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한 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아, 아니지. 몇 마리는 산 채로 포르말린에 넣어서 전시장에 넣어둬야겠구나!”
“같은 귀환자라지만 네 취향은 정말 적응하기 힘들군.”
“킥킥! 왜? 가식없고 솔직해서 좋기만 한데?”
귀환자들이 샘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뭐지?”
“그러게 뭐지?”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던 요정들이 외부인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통상 거주자들은 물론 신들마저도 요정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관례였다. 워낙에 외부와 단절된 생태계를 구축한 데다, 어느 종족과도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정들을 죽일 경우엔 관리자들을 비롯한 탑의 균형을 추구하는 이들의 저주가 내려졌기에 더욱더 손을 댈 이유가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살인귀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는 소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주를 일상처럼 여기는 이들에게 그런 것 따윈 협박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시작해보자고.”
[클레망스가 고유능력 ‘네크로폴리스’를 발동합니다!]
광기에 젖은 대마도사가 마력을 뿜어내자 순식간에 숲이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쿠쿠쿠쿠쿠!
샘물 위로 거대한 갈비뼈들이 솟구쳤고. 나무와 풀 사이에서는 원념과 유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풍경.
불길한 파도가 범람하는 마경(魔境)은 마치 50층의 세계를 옮겨다 놓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대가 갖춰지자 근육질의 남자가 샘물에 태고의 피를 풀었다.
[‘태고의 피’가 주입됩니다!]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이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키에에에에!”
날카로운 비명이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된 요정들의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한 번에 의식의 끈을 날려버리는 소름 돋는 비명이었다.
우수수수….
정신을 잃은 요정들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나름대로 마법에 조예가 있는 종족이었으나, 태고의 힘을 정면에서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땅에 닿는 즉시 원념들이 요정들의 몸으로 들어갔다.
케엑!
검붉은 피가 그대로 쏟아졌다. 심장은 빠른 속도로 제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키에에에!”
“캬아아악!”
요정들의 이마가 찢어지며 그 안에서 제3의 눈이 돋아났다.
귀여운 외형은 간데 없고. 이제는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가진 악귀들로 새롭게 변모했다.
수천의 요정들로 이루어진 군단이 탄생한 것이다.
그 가운데는 한 때 빛의 정령왕이었던 라이볼트 역시 함께 있었다.
“나쁘지 않은 솜씨로군.”
“휘유. 그쪽 세계에서 신마저 죽였다고 하더니 굉장하긴 굉장하네. 네크로폴리스가 발동되는 동안 죽은 애들은 전부 네 부하가 된다고 했던가?”
“그런 능력이야. 뭐, 이걸로 병력도 대충 갖춰졌으니, 손님들 맞을 준비를 하면서 보물찾기나 해볼까?”
어떤 책에 관한 단서가 이 협곡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몰랐지만, 태고의 존재들이 무얼 원하는 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저 의뢰 받은 대로 깔끔하게 목적을 달성하는 것. 그게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귀환자들이 샘물을 거점으로 삼아 대대적인 수색을 개시했다.
* * *
약 1시간 후.
샘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진혁과 멤버들이 도착했다.
“계약자.”
엘리스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독하군.”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요.”
“우욱.”
“모기이이….”
“주인보다 100만배는 더 지독하고 인간성이 없는 놈들이다.”
나머지 멤버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나 참혹하게 변해버린 요정들과 숲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자연스레 솟구쳤다.
‘네크로폴리스와 묘목의 시너지를 위해 이곳을 고른 거였나.’
진혁이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단순히 역겹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확실히 극한의 효율을 자랑한다. 요정들은 단체생활을 하는데다 외부와의 접점이 적었기에 어떤 식으로 전투를 펼칠지, 또는 주요 능력이나 전술이 어떠할지….
……전부 미지수였기 때문.
상대하는 입장에선 이 영역에 들어가기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묘목의 힘으로 자체 스팩업도 했을 테니, 몇 배는 더 까다로울 거야.’
그냥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발목이 잡힐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 귀환자들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겠지.
놈들의 목적도 네크로노미콘에 관한 단서를 확보하는 것이라면 최대한 시간을 끌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3분만 주시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럼, 저는 거기에 맞춰서 다음 계획을 세워보죠.”
페시스가 능력을 발동하는 동안 진혁은 신중하게 가장 최적화된 작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쿠쿠쿠쿵!
요정들 사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솟구쳐올랐다.
형형색색의 광석.’마정석’들이다.
순도가 높고 귀하기 힘들 것들로만 잔뜩 모아둔 터라, 심지어 진혁조차도 저 정도 양의 마정석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봤다.
눈부신 빛이 망막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름답거나 굉장하다는 감정보다 또 다른 감정이 훨씬 더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낭패다.
“모기이이이!”
고구마의 눈이 식욕으로 물들었다.
한창 성장기인 고대룡에게 있어 마정석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원.
하물며 저렇게 크고 희귀한 마정석들이라면 이성을 날려버리기에 넘치고도 남았다.
아공간으로 역소환시킬 틈도 없이 고구마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날아갔다.
“기습이 성공할 확률은 이제 0.0012%야, 응.”
프레이가 조용히 산출값을 읇조렸다.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이쪽이 쳐들어왔다고 광고를 해버린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지.
진혁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퍼스트 블레이드를 꺼냈다.
“머리 아프게 수 싸움 하는 건 짐의 성격에도 안 맞느니라.”
“크하하하! 아포칼립스를 관장하는 이 몸 역시 정면 돌파가 가장 어울리지!”
엘리스와 베헤모스도 각자의 무기를 소환했다.
쿠쿠쿠쿠쿠쿠!
어느 거대 신화의 주신들과 붙어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 움직였다.
“키에에에!”
“케에에!”
오염된 요정들이 즉시 달려들었다.
“죽이면 안 돼!”
요정들을 죽이면 골치 아픈 저주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귀환자 놈들이야 저주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이쪽은 탑을 등반하는데 제약이 걸리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지리라.
진혁의 명령에 살상에서 제압으로 전투 스타일이 변경되었다.
퍼퍼퍼퍽!
베헤모스가 대검의 측면으로 날아오는 요정들을 날려버렸다.
“케…엑!”
“커억!”
입 안에 옥수수를 뿜으며 날아간 요정들이 바닥에서 꿈틀댔다.
엘리스의 꼬챙이 역시 무자비하게 요정들의 팔다리를 날려버렸다.
원래부터 살인병기인 천유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확실히 죽이지 않는 건 맞긴 한데….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여놔서야 협곡도 저주를 내려야할지 말하야 할지 고민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전투가 벌어진 지 1분 가량이 지났을 무렵.
저벅.
요정들 사이로 한 번 만났던 인물이 나타났다.
“흐응.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서 와봤더니 아주 대어가 걸려들었네?”
고통의 대마도사 클레망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