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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677화


677화. 귀환자들의 전쟁 (2)

두근…!

신성력을 빼앗긴 테레사의 얼굴이 인형처럼 변했다.

창백하게 변해버린 피부.

녹색의 눈동자는 어느새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암속성의 영향으로 인해 성기사의 신성이 훼손됩니다.]

[‘타락’이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쿠쿠쿠쿵!

“아….”

테레사의 인격이 크게 흔들렸다.

“계약자!”

엘리스가 뾰족한 교성을 내뱉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테레사의 타락은 예견된 일. 초창기부터 그녀의 타락을 유도했던 것도 신성력과 암속성 모두를 다룰 수 있는 최종병기를 만들기 위함 아니던가?

그 속도가 원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것만 빼면 아직은 컨트롤이 가능한 영역이다.

[고유능력 ‘태양의 성역’이 최대치로 구현됩니다!]

[‘별의 가호’와 ‘만다라’의 영향력이 극대화됩니다!]

시스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버팀목 수준은 될 수 있을 터.

등불에 빼앗기지 않은 빛이 테레사의 이성을 가까스로 지탱해주었다.

이거라면 응급 처치는 한 셈인데….

바로 그때.

“킥…!”

테레사의 인격이 바뀌었다.

신성력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의 흑화 버전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혁이 초조하게 테레사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태껏 흑화 버전의 테레사는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어쩌면 기존의 인격이 거의 사라진 지금 또한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이야. 모처럼 완전히 자유가 됐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피처럼 붉고 화려한 미소.

테레사가 여유롭게 손마디를 꺾으며 지면에 꽂힌 검을 뽑았다.

“보다시피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든. 미안하지만 우리를 도와줘야겠어.”

“흐응.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야? 너희가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거야.”

“글쎄? 여자 마음도 몰라주는 놈은 그냥 이참에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테레사의 입에서 나온 건 기대와는 다른 말이었다.

“아니면…. 팔다리를 전부 잘라놓고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래. 그게 낫겠어. 아무래도 죽였다가는 순딩이가 너무 슬퍼할 것 같거든. 이 정도 타협이라면 그 애도 납득할 수 있을 거야.”

무슨 개소리를 저리 참신하게 늘어놓는 건지 모르겠다.

“진심….”

……이냐 라고 말하기 직전 테레사가 기묘하게 변한 성검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진심이다.

저 광기에 가득 찬 타락성녀라면 정말로 나를 자신만의 애완동물로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당장 적들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황에서 최악의 변수가 생겼다.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진혁이 자세를 잡았다.

“젠장! 빨리 해결해라. 나 혼자선 무리란 말이다!”

천유성이 고함을 질렀다.

혼자서 데고리아 발록을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귀환자들이 아껴둔 발록이라면 제아무리 검성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긴 할 거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쪽도 급하긴 마찬가지인데.

“어허, 보채지 말고 차분하게 좀 기다려. 괜히 서두르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런 건 응. 진솔한 대화도 좀 나누면서 묵은 감정을 풀어가는 게 중요한 거야.”

타락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적당히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은 저 뺀질이 검성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싶다는 게 가장 컸다.

위에서.

아래로.

콰아아앙!

검은 운석이 떨어졌다.

[데고리아가 ‘심연의 철퇴’를 발동합니다!]

“커억!”

천유성이 무지막지한 철퇴를 아래에서 받아냈다.

말도 안 되는 무게가 느껴지는 일격이 ‘류화’와 충돌했다.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며 짓누르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의 교착이 이어졌다,

와. 저걸 막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팔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게 가관이다.

용케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혁이 대놓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해결해라.”

천유성이 핏발이 선 눈으로 진혁을 노려봤다.

테레사보다 더 무시무시한 살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네.”

진혁이 마하의 속도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또 다른 쪽에서도 이변을 깨달았다.

“저 바보 핑크가 또 저러네.”

엘리스가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나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발록이 신성력을 흡수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불길한 예측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클레망스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원래 목적도 중요하긴 했으나, 지금 당장은 계약자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퍼퍼퍼퍽!

엘리스가 붉은 꼬챙이들을 난사하며 언데드 병력 사이로 길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쩌저적…!

지면이 서릿발로 변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몰려오자 마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누군가 있다.

일반 몬스터가 아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귀환자다.

저벅. 저벅.

눈보라 사이로 70대 근육질 노인이 걸어왔다.

‘시체 조형사’ 빈고프.

시련의 탑 5층의 혹한지대에서 태어난 전사가 엘리스에게 맞섰다.

“영광이로군. 사냥꾼으로서 아타락시아의 가주를 마주하는 기회를 얻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운이 좋은 날인 것 같구만.”

빈고프가 도끼날을 어루만졌다.

광기에 젖은 눈빛이 번들거렸다.

“죽는 날이 가장 운이 좋다 편하다니 참으로 신기한 늙은이로구나. 그 말을 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빈고프의 도발에 엘리스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껄껄껄! 위대하신 진조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군. 너무 그리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은가?”

[빈고프가 고유능력 ‘심장결빙’을 발동합니다!]

피부가 얼어붙는다.

숨결이 얼어붙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지독하리만치 하얗게 얼어붙는다.

“아무리 잘난 순혈이라고 해도 얼어붙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극한의 저온 앞에서는 핏방울도 한낱 액체에 지나지 않을 터.

산채로 생명을 냉동시켜 전시하는 조형사는 진조마저 자신의 컬렉션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엘리스가 여전히 감흥 없다는 얼굴로 빈고프를 바라봤다.

한낱 필멸자의 협박 따위는 제대로 귀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듯.

“우선 그 표정부터 달라지게 해야겠구만.”

[심장결빙 ‘이른 서리’가 발동됩니다!]

수분이 얼어붙으면서 날카로운 얼음들이 만들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

혹한도 혹한이지만,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공격 범위는 특히나 더 위협적이었다.

쩌저적!

엘리스의 몸이 그대로 하얀 운무에 집어삼켜졌다.

당연히 진조의 몸은 평범한 거주자보다 훨씬 더 위. 혹한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빈고프의 움직임이 한 층 더 빨라졌다.

“겨우 이 정도에 당하진 않겠지.”

[심장결빙 ‘된서리’와 ‘해질녘의 서리’가 발동됩니다!]

좌와 우에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운무가 한층 더 짙어졌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온도.

엘리스의 마력이 응집하는 걸 철저하게 파훼함과 동시에 도주로와 이동 반경까지 전부 계산해 궁지에 몰아넣는다.

완벽한 사냥을 추구하는 빈고프는 아주 작은 가능성 하나하나까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과하다 싶을 정도의 냉기를 축적시킨 빈고프가 쐐기를 박았다.

쿠쿠쿠쿠쿠!

도끼날의 끝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물들었다.

[고유성창 ‘무간의 새벽’이 발동됩니다!]

파츠츠…!

얼어붙은 지면을 따라 하얀 선들이 이어졌다.

빈고프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은 파괴나 방어가 아니다.

최강의 단일 개체를 대상으로 한 봉인이 최대 무기지.

절대 영도.

시간마저 얼려버리는 영역 속. 진조를 봉인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원형의 얼음 기둥이 하늘까지 닿았다.

“후우.”

빈고프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단언컨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봉인이었다.

“본래라면… 영원히 이 안에 가둬둔 채 그 아름다움을 감상했을 테지만. 안타깝구나. 이번 일은 개인적인 취향보다 더 중요한 게 걸려 있어서 말이야.”

빈고프의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완전히 봉인된 상태에서 도끼에 가격당한다면 즉사기가 발동된다.

온몸이 얼어붙어 있는 진조도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순 없겠지.

이걸로 끝이다.

빈고프가 양 손으로 도끼를 크게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얼음 속 안에 있는 엘리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움직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저 안에서는 자신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야 정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우우웅….

……콰콰콰콰콰콰콰쾅!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생각한 엘리스의 몸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솟구쳐 올랐다.

응고되었던 혈액이 녹으며 그 어느 때보다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고유성창 ‘개벽의 계시록’이 발동됩니다!]

“보잘것없는 얼음이로다.”

고고하면서 한 점 티끌 없는 마력.

만물을 멸시하는 순혈종이 설원의 사냥꾼을 굽어내려봤다.

“순혈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빛을 잃지 않기에 순혈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

콰아앙!

검과 검의 격돌.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연이어 퍼졌다.

사복검을 정면에서 받아낸 테레사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테레사가 ‘암굴의 포옹’을 발동합니다!]

순간.

끈적끈적하고 권태로운 감촉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정신 계열의 속박 기술.

진혁의 몸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오러를 끌어올린 테레사가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검은 성검이 죽음의 궤적을 그렸다.

카아앙!

진혁의 오른팔 바로 옆에서 검이 멈췄다.

아슬아슬한 찰나다.

속박과 공격의 타이밍이 너무나 완벽했기에. 그러나, 이쪽 역시 보험 하나 정도는 추가로 들어둔 상태였다.

“주군께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그림자 속에 있던 월영이 개입했다.

“우리 이쁘장한 소년께선 주군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이러니 우리 순딩이가 질투를 하지. 사방에 전부 라이벌들이 득실대니까.”

“……헛소리는 정도껏 하시죠.”

테레사가 이죽이자 월영의 얼굴이 더욱더 차갑게 일그러졌다.

카카카카캉!

곧바로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실력 자체에서는 밀리지만, 목숨까지 불사하겠다는 월영의 맹공에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좋아.’

둘이 정신없이 싸우는 걸 보던 진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영의 전투 감각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타락한 테레사의 전투 패턴과 성향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빠직!

테레사가 날뛰자 반대쪽에서 싸우고 있는 또 한 명의 괴물이 깨어났다.

[엘리스의 감정이 크게 동요됩니다!]

“감히 누굴 건드는 것이냐!”

콰콰콰콰콰콰!

엘리스의 마력이 크게 꿈틀거렸다.

블러드 로드의 진폭이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게 깊어졌다.

역시나.

테레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꼬마 여왕님. 순혈의 진조가 빈고프를 일격에 날려버리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불타는 집에 기름을 끼얹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진혁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였다.

오!

때마침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테레사의 타락을 막으면서도 엘리스의 전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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