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707화
707화. ‘빛의 책’, ‘어둠의 책’ (2)
이제는 모두가 유리병 안에 든 피의 양과 희생자의 관계에 대해 눈치챘다.
물론, 이제와서 눈치 채기엔 너무나 뼈아픈 손실이 벌어진 뒤였다.
“너 이 새끼… 다 알고 있었지?”
“응. 뭘?”
“누군가 죽어야지만 저 책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감히 그 희생양으로 우리를 골랐단 말이냐!”
“거 말이 좀 심하시네. 난 함정을 돌파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외에 세세한 조건 같은 건 몰라. 게다가 내가 사람들을 희생시키다니. 평소에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성격인 사람한테. 어흠!”
“닥쳐라! 그 순진한 척 하는 말투 따윈 집어 치우란 말이다!”
마이어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카가가각!
검풍이 진혁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진혁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꺄아아아. 무서워라. 경찰 불러. 경찰!”
진혁이 호들갑을 떨었다.
엘리스의 등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몸을 오돌오돌 떠는 건 덤이었다.
바로 그때.
띠링!
모두의 앞에 붉은 상태창이 점멸했다.
[‘순례의 길’은 같이 입장한 이들 간에 희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안 됐지만, 이 안에서 플레이어들끼리 죽고 죽이는 건 의미가 없다.
제물은 오롯이 이 통로와 방 안에 있는 것들에 의해 흘린 피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으득.
상태창을 본 마이어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얼핏 봐도 아직까지 유리병 안에 든 피는 채 1/4을 채우지 못 했다.
최소한 이곳에 있는 이들 중 70% 이상이 죽어야만 된다는 뜻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한 명 한 명이 소중해지는 상황. 그러니 플레이들끼리 싸우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참으십쇼. 마이어 씨.”
“반드시 저 새끼를 죽여버릴 기회가 올 겁니다.”
“책만 손에 넣으면요.”
드레드로어의 플레이어들이 애써 마이어를 말렸다.
“알겠다.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지. 대신 지금까지 피해가 컸으니 이번엔 우리가 뒤에 서겠다.”
마이어가 대놓고 뒤쪽 포지션을 잡았다.
다음 희생자가 나온다면 당연히 고인물 코퍼레이션 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못 박으면서.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던 진혁은 속에서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다 뻔할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기에 몰리면 다른 무리의 뒤쪽으로 숨고 싶어한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그래. 그러지 뭐.”
진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앞장 섰다.
“흐음. 계약자답지 않게 이번에는 꽤나 고분고분하구나. 저런 말을 듣고도 순순히 앞장을 다 서주고.”
엘리스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며 토닥토닥 발걸음을 옮겼다.
“달릴 준비 해.”
“뭐?”
“이제 시작이니까.”
진혁의 손끝에서 빙하조형으로 만든 얼음 파편이 발사됐다.
엄지손톱 크기만한 얼음 덩어리가 아누비스와 비슷한 문양 부분을 두드렸다.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쿵!
균형이 무너지며 통로 전체가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하, 함정인가?”
“젠장. 이번엔 또 뭐가 튀어나오는 거냐!”
“됐어. 뭐가 나오든 어차피 대비할 시간은 충분해.”
“그래. 앞에서 대신 당해줄 놈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함정이 시작된 곳은 가장 뒤쪽부분이었다.
콰콰콰쾅!
콰아앙!
딛고 있던 땅이 그대로 아래로 꺼졌다.
“우와아아악!”
“달려! 앞으로 달리라고!”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발판. 살기 위해선 1분 1초라도 빨리 앞으로 향해야만 했다.
당연히 드레드로어의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앞쪽에 위치한 진혁과 나머지 멤버들은 비교적 여유롭게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빙하조형 ‘서리벌판’이 발동됩니다!]
슬쩍.
진혁이 바닥에 서리 가루를 흩뿌렸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쓰레기들에게 베풀어줄 온정 따위는 없었다.
***
쿠쿠쿠쿵!
가까스로 탈출하자마자 통로가 완전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생존자는 절반.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른 정예들 중 반이나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애도를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다음 함정들이 발동되었다.
철컹!
덜컹!
생명체가 감지되자 좌우에서 굳어 있던 조각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대한 파라오의 보물을 노리는 자.”
“영원히 이 방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느니라.”
양손에 채찍을 든 고대의 병사들이 거칠게 발을 굴렀다.
[‘어둠의 군대’가 파라오에게 바칠 제물들을 바라봅니다.]
흑요석으로 만든 전갈과 코브라들이 사방에서 공격대를 노렸다.
이제는 물러설 곳 따윈 없다.
최악인 점은 힘을 모아 싸워도 모자를 판에 그럴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악의 구조. 그렇기에 협력 대신 옆에 있는 동료들이 죽길 바라야했다.
당연히 탱커들은 눈치를 보며 선두를 맡으려하지 않았고. 힐러들 역시 마나를 아끼며 자신이 입은 부상에만 힐링을 시전했다.
“멍청한 놈들! 대체 뭐 하는 거냐. 우리 말고 저쪽 놈들이 무너지게끔 하란 말이다!”
“하, 하지만. 저쪽이 다 죽어봤자 그래도 숫자가 부족합니다.”
“대신 몸빵 하다가 죽는 건 사양이라고!”
“나 역시 마나를 낭비하고 싶진 않아.”
생존 앞에서 급격히 무너지는 결속.
만약 이들이 드레드로어의 메인 공격대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2군으로 구성된 어중간한 정예들에게 철혈 같은 충성심과 단결력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가장 먼저 ‘어둠의 책’을 손에 넣은 이에 한에선 특정 공간으로 공간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추가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바로 저 상태창 때문에 버티기만 한다면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 팽배했다.
“멍청하긴! 강한 자가 죽으면 피가 차는 양도 더 많아진다. 그러면 아직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단….”
마이어가 어떻게든 공격대가 무너지는 걸 막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콰직!
퍼걱!
우드득! 오도독!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줄어드는 플레이어의 숫자.
반면, 고인물 코퍼레이션 쪽에서는 피해 자체가 없었다.
“왕가를 수호하는…. 음?”
파라오의 가호를 받는 전사들이 진혁 앞에서 멈칫했다.
[현재 이 일대에는 ‘태양의 성역’이 발동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플레이어 강진혁에게는 상위 세력 ‘이집트의 비호’가 내려져 있습니다.]
짙은 동류의 냄새.
아니, 단순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엄청나게 고위급의 존재로부터 압도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저릿…!
그저 목적을 위해 묵묵히 과업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불과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엔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 전부가 덤비더라도 승산이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까진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병사들의 타겟이된 건 약하고 처리하기 쉬운 쪽이었다.
“키에에에!”
“크오오오!”
“으아아악!”
“제기랄.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비명과 고함소리가 한 자리에 어우러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유리병에 피가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됐다!”
“지금이야!”
가까스로 살아남은 극소수의 플레이어들이 책이 놓여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줄곧 방패 뒤에서 자기 혼자만 방어하던 탱커였다.
가장 먼저 책에 도달한 남자가 물찬 제비처럼 손을 뻗었다.
“크하하하! 내가 1등이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글자를 읽어나갔다.
“날 물고 도망쳤던 뽀삐를 드디어 잡았다. 개껌은 앞으로 1년간 압수… 응?”
책을 읽던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찾던 ‘어둠의 책’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표지를 확인해보니 ‘5학년 2반 천유성의 일기’라고 써 있는 낡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진혁이 책을 바꿔치기 한 것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동안 가짜 제단과 책을 만들어둘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진혁이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그게 그리 탐났어?”
자매품으로 엘리스가 꼬꼬마 시절 썼던 일기와 테레사의 사립 유치원 일기도 확보해둔 상태다.
물론,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일기장이 사라진 줄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바로 그때.
“그딴 식의 장난질을 할 줄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마이어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콰콰콰쾃!
칼날이 정확히 진혁의 손등 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아얏!”
진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놓쳤다.
마이어가 초고속으로 몸을 날려 책이 바닥에 닿기 직전에 낚아챘다.
***
두근!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마이어가 모두와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며 벽이 있는 곳까지 갔다.
벽에 등이 닿고 안전거리가 확보되고 나서야 비로소 참아왔던 호흡을 내뱉을 수 있었다.
멍청한 것들 사이에서 활로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강진혁이라는 놈이 무언가 추가적인 수를 쓸 거라 예상하고 함정에 함정을 파느라 얼마나 골머리를 싸매야 했고?
그 모든 기다림의 과정들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마이어의 손이 책의 표지에 닿았다.
수많은 공대원들을 쓸어버린 것 답게 책에서는 흉흉하고 이질적인 기운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그거 나름 어려운 책인데 읽을 수 있겠어? 위험한 물건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걸 강력하게 권고할게. 그리고 외부로 갈 수 있는 게이트를 통해 다 같이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거야.”
진혁이 저 멀리서 조언을 건넸다.
당연히, 패자의 하찮은 넋두리에 불과한 개소리다. 이런 고대 유물들을 해석할 수 있는 특수 스킬까지 가지고 있는 마당에 저딴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콧방귀를 뀐 마이어가 책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이츠레달 라미온…? 뭐야 이거?”
그런데.
채 몇 글자를 다 읽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네크로노미콘을 읽으셨습니다.]
[대상의 정신이 붕괴됩니다.]
보라색으로 물든 핏빛 상태창이 점멸했다.
책은 책이다.
단지. 그 종류가 전혀 다를 뿐.
“끄으… 으아아아악!”
마이어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가장 어둡고 난해한 네크로노미콘을 아무런 대비도 없이 그대로 읽어버렸으니 당연히 끔찍한 여파를 맞이할 수밖에.
“너도 참 재수가 없긴 하네. ‘해석’ 스킬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가장 앞쪽 부분 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읽어도 그 부분을 읽냐?
태고의 언어로 씌어진 부분을 펼쳤더라면 아예 읽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역시, 착하게 살아야만 복이 온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지만.’
이런 감초 같은 연극을 한 덕에 추가적인 보상까지 획득할 수 있었다.
[복사조건: 드레드로어의 중급 간부 마이어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선 그가 목표로 하던 ‘어둠의 책’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읽게 한 뒤에 제압해야 합니다.]
[공간 발도]
입수난이도: A
내용: 가장 빠른 일검은 모순적이게도 검집에 있는 검이 뽑힐 때입니다. 특히 기존의 검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사거리를 가지는 공간 발도를 사용할 경우 기존의 속도와 거리에서 300%만큼의 어드벤테이지를 적용받습니다.
[복사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그럭저럭 쓸 만한 능력이니 조금 있다가 융합으로 상위 능력을 만들어야지.’
콧노래를 부른 진혁이 마이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네크로노미콘을 회수했다.
책을 아공간에 잘 보관해둔 진혁이 이번엔 가짜 제단 뒤에 있는 진짜 제단을 바라봤다.
[남은 제물의 수: 0.8]
아직 살짝 부족하다.
마이어와 나머지 놈들을 속이려고 워낙에 속전속결로 뱀들을 박살내버린 탓이었다.
“으으으….”
“쿨럭! 끄으으….”
대부분 의식을 잃었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다. 이런 사람들을 마무리하는 건 아무래도 뒤가 찜찜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주인!”
“불렀어?”
“모기이이!”
“미묘오오!”
진혁의 부름에 아공간에서 다수의 소환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대에 넘어오면서 부르는 게 살짝 뜸해졌더니 다들 애교가 철철 넘친다. 좋으나 싫으나 깊은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주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진혁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 나도 간만에 보니 반갑다.”
“어쩐 일로 우리까지 부른 거야? 보니까 상황은 다 정리된 것 같은데?”
보통은 전투를 위해 불러내던 진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모든 게 끝났을 때 자신들을 부른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오싹….
당한 게 많은 몇몇 이들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했다.
일종의 데자뷰.
비슷한 상황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읽어낸 것이다.
가장 먼저 고구마와 운디네가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쳐야 한다.
최대한 멀리.
하지만,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쳤다.
“요즘 우리 사회가 많이 춥고 어렵잖아?”
지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엘리스에게 받은 꼬챙이를 만지작거렸다.
신수와 환수의 피는 통상적으로 일반 플레이어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 명이 온전히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녀석들의 피로도 봉인이 풀리진 않겠지만….
……어중간하게 남은 지금 시점이라면 적당한 변칙이 통할 확률이 높았다.
이러면 굳이 희생자를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너무 걱정하지마. 약간 따끔하고 마는 정도일 거야.”
“치료는 제가 해드릴게요.”
테레사가 양 손을 불끈 쥐었다.
그래. 든든한 힐러마저 있으니 과다출혈로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도, 도망쳐!”
“살려줘!”
“주인. 난 흙이야. 피가 아니라 먼지 밖에 없다구!”
곧이어 처절하고 구슬픈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