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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713화


713화. 움직이는 흉수(兇手) (3)

콰지직!

처음 들린 건 모든 게 송두리째 으깨지는 소리였다.

두개골이 함몰될 때 날 것만 같은 섬뜩한 파열음.

“싱겁군.”

이단심문관들 쪽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치곤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실비오의 몸이 기역자로 꺾이기 시작했을 땐,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끄어어….”

비명소리는 길지 않았다.

콰콰콰콰…투콰아아앙!

그대로 날아가버린 실비오가 반대편 사구에 처박혀버렸으니까.

“어차피 다 정리해버릴 거라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겠지?”

진혁의 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가 뿜어져나왔다.

묵직하게 뿜어지던 신성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바늘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자리 잡았다.

스릉!

칼날이 예기를 발했다.

목격자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완벽한 범죄일 터.

제약이 사라진 지금 시점에서는 더 이상 뉴비 코스프레를 할 필요는 없었다.

[고유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파츠츠…!

단검 너머로 선명하다 못해 눈이 시린 강기가 솟구쳤다. 검붉은 화염이 타오르며 무한의 대도서관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뭐…야?”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마….”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그 몇 초는 전투에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툭.

바람처럼 사라진 진혁의 몸이 타이탄 길드의 랭커 앞에 나타났다.

‘아슬란’이란 이름을 가진 근접 계열 무투가였다.

“큭!”

아슬란이 즉시 양 손에 기를 모았다.

하이랭커답게 마력의 흐름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건틀릿에 실린 폭풍에 수룡(水龍)의 형상이 맺혔다.

[아슬란이 고유능력 ‘진룡의 장’을 발동합니다!]

S급에 해당하는 고유능력.

서정희 측에서 선별해온 실력자답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고유능력 ‘천마멸겁’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강에 사는 수룡으론 하늘을 멸하는 천룡에 닿지 못한다.

칼날의 끝이 건틀릿과 맞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충격을 견디지 못한 건틀릿이 우그러졌다.

당연히 그 안에 위치한 연약한 살과 뼈는 기존의 형태와는 사뭇 다른 모양을 하게 되었다.

이성을 날려버릴 듯한 격통.

두 팔의 뼈가 모조리 박살난 아슬란의 동공이 그대로 흰자를 드러냈다.

“막아라!”

“괴, 괴물 같은 놈.”

그제서야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살아남은 랭커들이 고함을 지르자 모래 속에 숨어 있던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튀어나왔다.

전원이 암살 계열 능력을 익힌 뒷세계의 어쌔신들.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닌 오롯이 대상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전 세계에서도 탑 클래스에 속한 진짜들이었다.

물론, 그 말에 과장 따윈 섞여 있지 않다.

상대가 그저 그런 랭커였다면.

[고유능력 ‘원 아이 문’이 개방됩니다!]

눈부신 모래 위로 균열이 일어나며 거대한 눈이 나타났다.

쿠쿠쿠쿠쿠쿠!

“끄으으….”

“끄어어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된다.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 진짜 그로스의 눈의 열화판에 불과했지만, 그렇다해서 감히 일반 플레이어들이 버텨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잃어버린 언어’를 통해 적힌 결계가 펼쳐지자 이 일대 자체에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의 권역이 만들어졌다.

무기를 휘두르거나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마저 녹록지 않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역시, 굉장하긴 굉장하네. 직접 보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생글거리며 웃는 귀여운 외모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엘더갓의 사도인 장보경이다.

“언제 끼어드나 했어.”

진혁의 시선이 장보경에게 향했다.

이 친구에겐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후후.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좀 해봐야 했거든.”

“그래서 직접 보니 어떤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긴 하네. 위대하신 분들께서 그토록 조심스럽게 접근하라고 주의를 주신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래도 조언을 새겨듣는 걸 보니 다른 애들처럼 아주 멍청이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거기서 거기야.”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나랑 싸우려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소리지.”

[심연의 눈이 대상을 바라봅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어느새 그로스의 눈앞에 맺힌 빛이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대기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원자 단위로 분쇄시켜 버리는 파멸의 빛이었다.

실드 따위로는 어림도 없었고. 대응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일격이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꿀렁하고.

진혁의 옆에 물방울들이 모였다.

“정이 없는 남자네. 숙녀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물방울들이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를 이루더니 이내 장보경이 되었다.

카앙!

새하얀 장침과 퍼스트 블레이드가 맞부딪쳤다.

동시에 고속으로 회전하는 물방울들이 수백 개로 늘어났다.

‘탐식의 눈’이 물방울 속 흐름을 살폈다.

단순해 보이지만, 물방울 하나하나마다 마력의 밀도와 속도가 전부 다르다.

‘장침을 이용한 근접전은 눈속임이고 물을 이용한 능력이 주력인가.‘

수속성 계열 능력자들은 여러 번 상대해봤다,

그 중에서는 끝판왕이라 불리는 포세이돈을 비롯한 최고위급 신격들도 있었지만 이토록 이질적으로 물을 다루는 자는 처음이었다.

촤촤촤촤촤…!

물방울에서 실의 형태로 얇게 뽑힌 물들이 거미줄처럼 변했다.

그냥 물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잘라버리는 절삭력을 가진 일종의 칼날이다.

[고유능력 ‘카스카 디아슬라브’가 발동됩니다!]

[고유성창 ‘플레어 이클립스’가 발동됩니다!]

이에 맞서 진혁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능력을 발동했다.

화르륵!

서로 다른 색을 지닌 겁화가 뿜어졌다.

화염과 물이 수십 차례 다른 지점에서 격돌했다.

치이이이이익!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뿜어져나왔다.

어지럽혀진 시야 속.

물방울로 변한 장보경이 기척을 완전히 지운 채 진혁의 뒤를 잡았다.

[장보경이 특수 스킬 ‘수신(水神)’을 발동합니다!]

물의 양과 수압이 달라졌다.

예리하게 갈고닦인 물보라가 장보경이 쥐고 있던 장침을 완전히 뒤덮었다.

파앙!

음속을 돌파한 찌르기가 이어졌다.

제법 빠르고 날카롭긴 한데.

속도라면 이쪽도 꽤나 자신이 있다.

[고유성창 ‘뇌신(雷神)’이 발동됩니다!]

파치칙…!

진혁의 몸이 번개가 되어 사라졌다.

스파크와 스파크가 폭발하며 또다시 수십 합의 공방전이 오고 갔다. 잔상과 잔상을 남기며 교차하던 한 쌍의 빛이 모래 사구 위에서 멈췄다.

“인사는 이 정도면 될까?”

진혁이 가볍게 관절을 풀었다.

탑에서 나와 뉴비들과 노느라고 몸이 좀 굳어졌나 싶었는데, 덕분에 아주 좋은 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낀 장보경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쉽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왔지만, 막상 상대해보니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자신도 본 실력에 10%도 채 발휘하지 않았다. 준비해온 것들 역시 아공간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힘의 끝이 보이지 않는 건 저 능글맞은 검은 머리 남자 또한 같았다.

무언가 시선을 분산시킬 만한 변수를 만들지 않는다면….

……싸움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할 게 틀림없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도미닉 경!”

장보경이 이단심문관들을 향해 외쳤다.

“테레사를 처리하세요.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고맙군.”

도미닉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흘러가는 영문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으나, 가장 성가신 진혁을 상대해준다는 건 고마울 따름이었다.

“쳐라.”

도미닉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단심문관들이 테레사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기어이 이 상황에서까지 절 사냥하겠다는 건가요? 당신들은… 저 여자가 뿜어내는 기이한 마력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요?”

“시끄럽다. 명색이 성녀라는 칭호를 받았으면서 더러운 무리들과 결탁해 타락한 주제에! 그 더럽혀진 몸뚱어리에 티끌만 한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즉시 무장을 버리고 성스러운 재판을 받아라.”

“꽉 막힌 건 여전하군요. 하지만. 더 이상 당신들의 말에 따르진 않을 거예요.”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성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브리엘과의 만남 이후 테레사의 내면은 바뀌어 있었다.

“너 혼자서 싸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위대한 라파엘의 사도인 우리들을 상대로?”

“직접 확인해보시죠.”

도미닉의 앞으로 테레사의 검이 쇄도했다.

카아아앙!

교차하는 신성력.

성스러운 빛과 성스러운 빛이 서로를 단죄하기 위해 움직였다.

‘테레사가 완전히 마음을 굳혔나 보네.’

그런 테레사를 보던 진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과업과 책무에 얽매여 고통받기만 했었는데, 조금이나마 그 무게를 이겨내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이제 문제는 저 건방진 고양이를 어떻게 하냐는 건데.

“테레사 씨를 건들면 내 쪽에서 빈틈이 나올 거라 생각했어? 그랬다면 좀 실망인데.”

“흐응. 저 여자를 꽤나 믿나 봐?”

“보기엔 여려 보여도 꽤나 터프한 과정들을 넘어왔거든.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진 않을 거야.”

매운맛 성녀라고 들어는 봤나?

이단심문관들도 라파엘 쪽의 사도가 된 모양이다만, 그것만으로 테레사를 이길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글쎄. 당신이야말로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고 있나 보네.”

장보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동시에.

아공간에서 기묘하게 생긴 정육면체가 나타났다.

“주사위?”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주사위가 아니다.

비슷하긴 했지만 실시간으로 그 형태가 변하고 있었으니까.

[‘이오브의 불안정 주사위’가 발동됩니다!]

‘탐식의 눈’에 주사위의 이름이 표시되고 나서야 저게 뭔지 기억이 났다. 엘더 갓 중 하나인 시벅컬의 성유물.

예전 탑을 오를 때도 한 번인가 밖에 본 적 없는 최상급 아이템이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빌어먹을.

진혁이 반사적으로 단검을 집어 던졌다.

콰아아앙!

주사위가 지면에 닿는 게 먼저였다.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주사위를 따라 보라색 파장이 퍼져나갔다.

[‘벨락트럭스의 저주’가 내려집니다.]

[지금부터 3분간 냉병기의 위력이 99%만큼 감소합니다.]

퍼스트 블레이드가 그대로 튕겨나갔다.

“시작해보자고.”

장보경이 목침(木針)을 역수로 쥐었다.

퍼어억!

엄청난 충격이 팔 속을 파고들었다.

고작해야 무게 몇십 그램짜리 나무 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괴력이다.

‘목(木)속성 계열 무기의 능력치는 반대로 대폭 상승시켜주는 주사위였던 건가.’

탐식의 눈이 엘더 갓들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면 좀 더 자세한 정보들을 열람할 수 있었겠지만, 현재 수준으로는 감소되는 능력을 파악하는 게 고작이었다.

[고유능력 ‘시스템 조작’이 발동됩니다!]

[감소율이 99% → 94%로 변화합니다!]

시스템 조작으로 건드릴 수 있는 것도 고작 5% 남짓.

거대한 족쇄를 채우고 싸우게 되는 셈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흔의 흔적이 희미해집니다.]

다른 곳에 있는 성흔들은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다. 딱 하나 이곳을 제외하곤.

‘시간이 없어.’

세탄 머미들과 싸우는 이들은 지금 이 와중에도 체력과 마력을 소모하고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지속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장보경이 이오브의 불안정 주사위를 사용함에 따라 지나치게 강력한 억제력이 개입했다.

성흔 자체가 기존의 위치를 바꿔야만 할 정도로.

“많이 초조한가 보네. 성흔이 없어질까봐 집중을 전혀 못하고 있잖아?”

장보경이 생긋 웃었다.

“그렇게 까불거릴수록 나중에 비참해질 거야. 진심으로 하는 충고니까 새겨들어.”

“어마나. 무서워라. 그 말은 꼭 기억하도록 할게.”

잠시라도 이 여자의 시선을 잡아둘 게 필요하다.

최소한 성흔을 파괴할 때까지만이라도.

하지만, 장보경은 그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3분이란 제한 시간을 오롯이 즐기겠다는 듯 폭풍처럼 목침을 찔러넣었다.

[성흔의 흔적이 소멸되기 시작합니다.]

목침에 치명상을 허용하더라도 무리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만큼 상황은 절박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쯧! 정말이지 네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구나.”

진혁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파츠츠…!

칼날을 타고 피어오르는 푸른 검강.

하얀 눈보라가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듯 몰아쳤다.

천유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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