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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화


사신 1권

서문

살인에는 흔적이 남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하늘도 속였다고 자신할 만큼 감쪽같이 저지른 살인일지라도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흥분하기 때문이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성격을 지녔어도 살인을 하는 순간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살인할 때 머리끝까지 치솟는 흥분은 매우 독특하다. 미움, 원한, 증오가 한꺼번에 버무려져 살인을 시작하기도 전에 손과 발을 떨리게 만든다.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상대는 이미 불구대천지수다. 그것은 다시 말해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을 만큼 증오가 크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니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죽이는 순간 마음은 쾌락으로 바뀐다. 원한은 통쾌함으로, 증오는 희열로 바뀐다. 그러한 희열은 세상의 그 어떤 쾌락보다도 강력하게 신경을 마비시킨다. 흔적은 거기서 나오게 된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웠고, 완벽하게 행동했다 할지라도.

살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죽일 사람에게 아무런 증오나 원한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냉정해질 수 있다. 살수에게 표적이란 생명이 없는 나무토막과 진배없다. 그가 왜 죽어야 하는지, 과연 죽을 만한 죄를 지었는지,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그와 인연이 있는 것도,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칼을 쑤셔 넣을 나무토막에 불과하다. 살수에게도 일을 성취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쾌락은 증오에서 나온 감정이 아닌지라 일이 끝난 다음에나 우러난다. 숨 한번 고르는 것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살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중원은 살수를 방치하지 않는다. 표적의 일가 사람들이 복수의 일념으로 뒤를 쫓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소위 명문정파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수가 등장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뒤를 쫓을 것이다. 공분은 무섭다. 명문정파라는 사람들에게 낙인찍히고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무림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죽이지 않거나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죽이는 것.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두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살수만은 흔적을 남겨야 한다. 청부란 실력 있는 자, 명성이 널리 알려진 자에게 들어오기 마련이다. 많은 곳에 흔적을 남길수록 고급 청부가 들어온다.

자!

여기서 모순을 해결해 보자.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명성을 남길 것인가. 명분을 얻어야 한다. 표적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할 만큼 명분을 쌓아야 한다. 표적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천하악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증거도 확보해야 한다. 만인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합당한 죄목과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없으면? 후훗! 만들어야겠지.”

표적의 일가붙이까지도 복수를 포기할 만큼 강력한 죄목으로 명분만 확보되면 계획과 행동밖에 남은 게 없다.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의 그물에서. 표적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죽어서도 ‘이런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진하고 말았을 것을’ 하며 땅을 치고 통곡하리라.”

살수가 표적을 죽일 때는 불구대천지수를 노리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과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 표적을 죽이는 게 급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명분으로 죽이고 어떤 흔적을 남겨놓느냐가 중요하다.

-사신 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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