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화
묘지 관리인은 자다가 깨었는지 눈곱이 가득 낀 눈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지난 삼 일 동안이라면… 두 개가 있습…”
흑봉광괴는 묘지 관리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귀는 연신 쫑긋거렸다.
“조용!”
묘지 관리인이 입을 다물었다. 흑봉광괴의 귀가 다시 두어 번 꿈틀거렸다.
“저기! 저기닷!”
흑봉광괴는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신형을 띄웠다.
“묘혈로 들어가는 길은?”
“서, 석상 밑입니다.”
묘지 관리인은 벼락같은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더듬거렸다. 흑봉광괴는 묘지 관리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퍼엉!
일장에 석상이 주르르 밀려 나갔다.
퍽퍽!
단단하던 대리석은 주먹을 내려칠 때마다 두부처럼 으깨졌다. 흑봉광괴는 부서진 대리석 조각을 들어내고 철판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다섯 호법이 철판 주위로 몰려들었다. 양손으로 타구봉을 움켜잡고 철판이 열리면 바로 뛰쳐 들어갈 준비를 끝냈다.
“제일격은 치명적인 살수다. 조심해라.”
다섯 호법은 고래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휙!
흑봉광괴가 번개처럼 철판을 들어 올렸고, 얼굴에 검상이 있는 호법이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갔다. 다른 호법들도 촌각의 여유조차 남기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얼굴에 검상이 있는 호법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의 일갈대로 적지인살은 쥐새끼였다. 현무가 그려져 있던 북쪽 벽에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소리 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검상이 있는 호법은 망설이지 않고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큰 호법이 뒤따라 들어가기도 전에 다시 기어 나왔다.
“왜?”
“막혔어.”
“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구멍은 뚫려 있는데 길이는 이 장이 채 되지 못했다.
“분명히 여기 있네.”
뒤따라 들어온 흑봉광괴가 예리하게 구석구석을 쏘아봤다. 석관이 들어 있는 묘실은 크기는 하지만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한쪽에 석관이 놓여 있고 석물이 몇 개… 사치스럽게 장식된 그림과 글씨들이 전부였다. 흑봉광괴는 다시 지청술을 펼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도 사라졌다. 현무화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아니 분명히 소리를 잡아냈으니 틀림없이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샅샅이 찾아보시게.”
다섯 호법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묘실 구석구석을 낱낱이 뒤졌다. 석벽을 손으로 더듬고, 두들겨 보고… 미세한 균열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도 세밀하게 살폈다.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발로 두들겼다. 석관도 살폈다. 망자의 유해가 들려지고 석관이 들렸다. 석관이 올려져 있던 좌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반 시진이 지났을 때 머리가 기형적으로 짱구인 호법이 떨어지지 않는 말을 고했다.
“없습니다.”
흑봉광괴는 호법이 보고하기 전에 사태를 파악했다. 적지인살은 묘실에 없다. 흑봉광괴의 시선은 다시 뻥 뚫린 현무화로 향했다. 이제 남은 곳은 구멍 속밖에 없었다.
‘막힌 구멍…’
흑봉광괴는 현무화 밑에 떨어진 석벽 조각을 주워 만지작거렸다. 돌 조각은 마치 하늘도 찢어발길 수 있는 예리한 조공으로 무지막지하게 뜯어낸 것 같았다.
‘적지인살이 지법을 익혔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조공을 익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는 불가해한 일을 목도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벽을 뜯어낸 솜씨는 칭찬해 줄 만하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감이 있지만 파괴력만은 능히 일절이다. 파괴력만 놓고 볼 때는 개방의 용음십이수와 쌍벽을 이룬다.
‘세기가 다듬어지지 않은 조공이라… 조공을 배우기 시작했을 수도 있군.’
일반적으로 지법을 배운 자는 조공을 배우지 않는다. 또 조공을 배운 자는 지공을 익히지 않는다. 참조로 조금 배우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절정에 이르도록 익히지는 않는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공은 정교한 무공이다. 조공 역시 정교하지만 지공처럼 정교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지공을 절정으로 익히면 석벽도 간단히 관통할 만큼 파괴력이 강하다. 하지만 파괴력은 조공이 훨씬 강하다. 똑같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봤을 때, 손가락 하나와 다섯의 차이는 크다. 어느 무공이 낫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검법이 나은가 도법이 나은가 묻는 것과 같다. 소림의 일지통을 익히면 검지가 다른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처럼 불어난다. 일지통이 아니라 십지 모두를 연마하더라도 지법을 익힌 자는 지법만 추구한다. 흑봉광괴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다시 들어가서 막힌 부분을 잘 살펴보게. 움직인 흙은 표시가 나게 되어 있어.”
“살펴봤지만… 흙이 움직인 흔적은 없었습니다.”
왼쪽 볼에 검상이 있는 호법이 대답했다.
“다시 살펴보시게. 자세히. 아냐. 수천, 자네는 눈이 익숙해졌어. 똑같은 눈은 똑같은 모습을 봤을 때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지. 이번에는 수지, 자네가 살펴보시게.”
“알겠습니다.”
머리 모양이 흑봉광괴와 비슷한 걸개가 대답을 하고는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호법 수지는 무려 일 다경 동안이나 이 장이 채 안 되는, 사람 하나 간신히 기어들 만한 구멍 속에 머물렀다. 그가 다시 나왔을 때 그의 의복은 흙투성이였다.
“한쪽에서 막아가며 구멍을 팠습니다.”
“…”
“한쪽으로는 파 들어가면서 다른 한쪽을 막았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쌓는 형식이지만 점점 단단해져서 나중에는 발로 다져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그걸 파 나가면 되겠군. 발로 다진 흙과 자연 흙은 다를 테니까.”
호법 수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파 들어갔습니다만…”
“빨리 이야기해 보게.”
“어느 순간에 딱 막혔습니다. 어느 게 다진 흙이고 어느 게 자연 흙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흑봉광괴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호법 수지가 한 말은 맞을 것이다. 그의 눈은 다진 흙에 익숙해 있고, 찾아냈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적지인살은 아주 약삭빠른 자다.
“수동! 폭약을 설치하시게.”
“포, 폭약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눈이 큰 호법이 더욱 한껏 부릅떴다.
“십여 장쯤은 순식간에 날려 버릴 만큼 넉넉하게 설치하시게. 석관을 꺼내놓고. 시신까지 폭파시킬 수는 없지.”
“이곳은 묘역입니다. 재고하심이…”
“…”
흑봉광괴는 침묵을 지켰다. 눈이 큰 호법, 수동은 명이 번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이 일은… 또 한 번 개방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 천음산 묘지는 권세를 지닌 자들의 일가가 묻힌 곳인데, 그런 곳을 폭파해 버린다면. 돌아서는 수동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자네들은 문도를 배치시키게. 폭약이 십여 장을 날릴 터이니 멀찍이 물러서라고 하고, 포위는 풀지 마시게. 한쪽을 막는다면 숨 쉴 공간이 없어. 폐기를 한다 해도 반 시진 이상은 버티지 못해. 반 시진이 최고 한도네.”
흑봉광괴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버틴다면 반 시진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적지인살은 자신보다 내력이 약한 대신 약간의 공기가 있다. 몇 번은 더 버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최고 한도가 반 시진이었다.
자신이 묘실에 들어온 게 벌써 반 시진을 넘기고 있다. 그렇다면 적지인살은 지금쯤 뒤쳐나오고 싶어 미칠 게다. 흙을 파 들어가는 속도도 빠르지 못할 건 분명하다. 폐기한 상태에서 내력을 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미련은 일찍 끊는 게 좋겠지. 나가세.”
‘적지인살… 약았다만 두더지처럼 숨어도 십 장을 벗어나지 못했어. 이제 그만 가셔야겠네.’
흑봉광괴는 확신했다. 틀림없이 잡을 수 있다고. 종리추가 손에 낀 수투는 웬만한 조공 고수와 버금가는 위력을 보여 주었다. 적지인살은 수투를 받아 자신이 낀 후 석벽을 뜯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종리추는 간단한 손짓을 쉽게 이해했다. 종리추가 흙을 파 나가는 동안 적지인살은 구멍을 메웠다. 처음에는 그저 쌓는 정도, 나중에는 발로 꾹꾹 눌러 다지면서. 예상했던 대로, 흑봉광괴가 추측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종리추가 숨을 헐떡거렸다. 흙을 파 나가는 속도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적지인살은 호흡을 멈춰 버틸 수 있지만 종리추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종리추에게 손을 멈추게 하고 위로 파 올라갔다. 흙덩어리가 얼굴로, 몸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위로 파 올라가는 것은 파기도 쉬웠고 다지기도 쉬웠다. 떨어져 내린 흙을 밟고 올라서기만 하면 되니까. 걱정되는 것은 붕괴였다. 적지인살이 파 올라가는 방법은 매우 위험해서 조금이라도 지반이 연약하다면 그대로 함몰될 위험이 높았다. 흙이 붕괴되면 적지인살과 종리추가 머문 작은 공간은 흙더미로 빼곡히 채워질 것이다. 숨을 쉬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오랏줄로 칭칭 묶인 것보다 더 강한 올가미에 묶이리라. 적지인살은 조심스럽게 위로 파 올라갔다. 거리 계산을 잘해야 한다. 자칫하면 개방도가 빼곡이 서 있는 한가운데로 올라서게 된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수평으로 파 들어간 것이 겨우 십 장. 이대로 위로 올라서면 분명히 개방도가 운집한 한가운데다. 적지인살은 묘실 높이를 생각했다.
‘어른 두 명 정도였어. 그럼 거의 다 왔는데…’
천천히… 조심조심… 한 손만을 써서 흙을 갉았다. 그렇게 팔 길이 정도 파 올라갔을 때 갑자기 허전한 느낌이 들면서 맑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후웁!”
종리추가 숨을 크게 들이켜, 다급히 입을 막아야 했다. 아직은 위험하다. 개방도가 많아 호흡 소리 정도는 지청술로 분간해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것은 해야 한다. 종리추가 사태를 깨달았다고 생각되자 입 막은 손을 풀었다.
‘됐어! 아주 잘됐어.’
적지인살은 쥐구멍 같은 구멍을 뚫자, 손을 멈췄다.
“폭약을 터뜨리면 이 근처는 쑥대밭이 되겠네.”
“이 무덤이 누구 무덤인지 알아?”
“내가 알 게 뭐야.”
“이래도 되는 건가?”
“흑봉광괴님 성격을 몰라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역시 흑봉광괴였어.’
적지인살은 구멍을 통해 흘러드는 개방도의 음성을 들었다. 폭약을 터뜨린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개방도가 서 있을 정도라면 폭파 범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니까. 그때, 개방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우리도 그만 물러서지. 괜히 꾸물거리다 콩가루 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