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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22화


종리추는 초원을 지나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득한 밀림 속으로 들어섰다. 밀림 속은 후텁지근하고 습기가 많았으며 땅은 푸석했다. 나무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어 길을 내기가 쉽지 않았고, 길을 내어도 하루만 지나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거친 풀로 뒤덮이곤 했다. 종리추는 익숙하게 나무 사이를 헤쳐 나갔다.

까아악! 끽끽! 칵칵…!

원숭이 떼들이 나무 사이를 오가며 장난쳤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밀림을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가로이 장난을 즐기는 원숭이도, 어슬렁거리며 나무를 타고 오르는 왕뱀도… 밀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한시도 경계를 풀지 않는다. 방심은 곧 먹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종리추는 계속 밀림을 헤쳐 나갔다. 그는 밀림으로 발길을 옮길 때부터 갈 곳이 있었다.

우르릉..!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들렸다. 소리뿐만이 아니라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땅의 울림이 발을 통해 전달되었다. 소리를 따라 밀림을 조금 더 헤쳐 나가자 모든 근심 걱정을 한꺼번에 씻어주는 우람한 폭포가 나타났다. 위에서 아래로 금전직하하는 물줄기는 땅을 뚫어버릴 듯 거센 기세로 몰아쳤다.

꾸르릉…!

땅 끝까지 떨어진 폭포는 몇 길이 되는지 알 수 없는 검푸른 소와 부딪치며 분수처럼 다시 솟구쳤다. 천폭이다. 홍리족 사람들은 천폭을 알면서도 오지 않는다. 천폭은 암연족의 영역이고, 암연족은 침입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지금까지 홍리족은 암연족과 수십 차례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홍리족이 순한 부족이라고는 하지만 침입자를 용납할 만큼 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전사가 있고 홍리족만의 독특한 싸움기술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암연족과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맥이 족장이 된 이후에는 선대의 족장이 그랬던 것처럼 수환봉을 빼앗겼고 천폭마저 빼앗겼다. 종리추는 덩굴을 타고 벼랑을 내려갔다. 검푸른 소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려 있고 그 틈으로 소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종리추는 바싹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묵직한 것이 보였다.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시신은 절반은 썩은 살점으로 덮여 있고 절반은 하얀 뼈를 드러낸 끔찍한 모습이었다. 종리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좀 더 기다려야 해.’

암연족 사내들은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 다녔다. 하나같이 근육이 단단했고 날쌔 보였다. 드러난 상반신은 호전적인 부족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온통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암연족 사내 세 명이 천폭에 나타나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으며 장난쳤다.

“홍리족 계집들은 너무 뻣뻣해서 틀렸어.”

“뻣뻣하면 어때. 예쁘면 그만이지.”

“구맥에게 예쁜 딸내미가 있다던데 그년이나 잡아와야겠어.”

“쳇! 몸이 근질거려서 죽겠는데 싸움은 안 하나?”

“하긴 할 거야. 잡아온 연놈들만 길들여 놓으면 바로 시작할걸? 흐흐! 우리보다 더 성질 급한 분이잖아. 몸이 근질거려서 오래 참지는 못할 거야.”

종리추는 좋은 정보를 얻었다. 암연족은 싸움을 무척 좋아한다. 먹고 사는 문제는 잡아온 노예를 이용하면 되고, 자신들은 좋아하는 싸움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때로는 지금 천폭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암연족 전사들처럼 몸이 근질거린다는 이유로 싸움을 걸어오기도 한다. 조만간에 홍리족은 부족 묘가 있는 녹요평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가자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데.”

“비 올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싸우는 게 그만인데.”

“그렇지. 빗속에 흐르는 핏물은 아주 그만이지.”

“그래? 난 비에 젖은 살갗을 저미는 게 더 좋은데, 낄낄!”

암연족 전사들이 사람 죽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주고받으며 멀어져 갔다. 종리추는 그들이 멀리 사라진 후에도 숨은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꾸르릉…! 콰쾅…!

어둠을 쫙 찢으며 대지로 내리꽂힌 번개는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세상을 향해 호통 치는 우렛소리는 잠자는 모든 생물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우기가 시작되었다. 남만의 우기는 장장 오 개월에 걸쳐 지속된다. 어떤 때는 보름이 넘게 쉬지 않고 쏟아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는 부슬비가 되어 촉촉하게 옷을 적셔오기도 한다. 남만인들은 비에 익숙하다. 중원 사람들처럼 지우를 걸치지도 않는다. 비가 오나 오지 않으나 밀림에 사는 맹수들이 변함없이 오가듯 빗속을 오간다. 종리추는 밤이 깊은 다음에야 숨은 곳에서 나와 점찍어두었던 시신에게 다가갔다. 암연족은 영토를 빼앗으면 싸움에서 가장 강했던 자의 시신을 나무 기둥에 묶어놓는다. 동물들이 분비물로 영역을 표시하듯 암연족의 영토임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종리추는 시신 앞에 좌정하고 앉아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와라. 나와서 내 손을 잡아라…”

금종수를 익힐 때 토해내던 주술이 새어 나왔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반은 알고 반은 모른다. 그가 내공을 익혔다는 것은 정확히 봤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운기토납술을 꾸준히 연마해라. 십보십변의 경지는 어설픈 손재주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하나가 되는 기분이 느껴질 때에야 십보십변을 시도할 수 있다.”

양부는 백회혈로 숨을 쉬라고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천지간의 기운이 백회혈을 통해 몸 안으로 스며든다는 생각을 하라고 했다. 종리추는 운기토납술을 부단히 연마했다. 양부에게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맞을 때는 운기토납술을 게을리 했을 때다. 일흡에 천지간의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고, 일자에 도도하게 흐르는 기운이 손가락에 운집되며, 일호에 가면이 들려지고 얼굴이 바뀐다. 종리추는 그런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기운을 받아들이고 양손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부드러워지는 느낌은 받았다. 무인이 무공 증진을 위해 진기를 양성하는 것이나 재인이 궁극의 기예를 완성하기 위해 진기를 수련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재인도 진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이 모르는 것은 종리추의 내면이다. 종리추는 귀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것이 정말 귀신이든 상상의 산물이든 몸 안에 자신이 아닌 타인이 들어와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다. 진기는 운기를 할 때 느껴진다. 하지만 이놈은 운기를 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두들겨 맞으면 맞을수록 강한 힘으로 몸을 보호해 주고, 전신의 모든 신경을 극도로 활성화시켜 감각도 뛰어나게 발달시켜 준다. 어찌 보면 상당히 좋은 귀신이었다. 하지만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몸을 보호해 주는 것은 종리추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귀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신경을 극도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감각을 발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경을 자극하여 예민하게 만드는 농간에 불과하다. 가끔… 심한 우울감에 젖어 자살하고픈 충동이 일어나는 것도 몸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이 조종한 것이리라. 상상이든 귀신이든 알지 못할 무엇이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은 결코 좋을 수 없다.

“헉!”

종리추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냈다. 나무 기둥에 매달려 죽은 시신이 부활하여 움직였다. 양손을 풀고 나무 기둥에서 내려오더니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반은 썩어 살점이 붙어 있고, 반은 하얀 백골이 드러난 실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키키키…!”

시신은 소름 끼치는 괴성까지 토해냈다. 일순간 종리추는 손을 거두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시신은 너무 끔찍했고 냄새도 고약했다.

“히히히…!”

종리추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자신이 토해낸 음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몸속에 들어와 있던 귀신이 의지를 제어하고 농간을 부리는 게다.

‘안 돼. 이러다가 미쳐. 미치게 돼.’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좀 더 강한 귀신을 만나면 몸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도한 일이지만 어디서부터인가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히히히! 히히히히히..!”

내뱉고 싶지 않은 웃음이 자꾸 실실 새 나왔다.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 초점을 고정시킬 수 없었고, 앞으로 내민 양손은 화로에 구운 오징어처럼 쭈그러들었다. 세상도 변했다. 비는 오지 않았다. 밤이 분명했는데 환한 대낮으로 바뀌었고, 밀림에 들어와 있었는데 하남성 저잣거리로 바뀌었다. 귀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분명히 죽었던,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양지바른 곳에 묻었던 형이 서 있었다.

“많이 컸구나.”

형은 죽었을 적 모습 그대로였다. 훨씬 커 보였던 형인데 열세 살에서 한 살도 더 먹지 않아 친구처럼 느껴졌다. 옷도 구질구질하던 점소이 옷차림새였고, 방금 전까지 청소를 했는지 옷에는 물기도 묻어 있었다.

“히히히히…!”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은 나오지 않고 낯선 웃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세상 힘들게 살 것 없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백 년도 못 사는 게 사람이란다. 죽을 때는 모두 다 놓고 와야 돼. 아등바등 살 것 없어. 나 있는 곳은 무척 편해. 늙지도 않고… 같이 가자.”

형이 손을 잡아끌었다.

‘형은 죽었잖아. 그렇지? 죽었지?’

“왜? 같이 가기 싫어? 엄마도 아빠도 있어. 설마 양부, 양모를 정말 부모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우리 모두 함께 모여서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자.”

견뎌내기 힘든 유혹이었다. 형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너만은 편하게 살라고 양부를 얻어주었고, 궂은일을 해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사탕이며 전병이며 사달라는 것은 다 사주었다. 형이 같이 가자고 한다.

“자, 그만 일어서, 네가 정 가기 싫다면 있어도 돼. 하지만 네가 너무 불쌍해. 불쌍해서 잠을 잘 수 없어.”

‘형…!’

“엄마, 아빠도 늘 말씀하셔, 너만 있으면 모두 모이는데 하고, 어린 것이 세상에서 모진 고생만 한다고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아냐, 형은 죽었어. 형은 죽었잖아. 그렇지? 형, 가. 형, 가서 편히 쉬어.’

종리추는 형을 떠올렸다. 비참하게 죽은 모습을. 그리고 그 곁에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취객을.

‘형은 죽었어. 형이 아냐. 귀신이야. 가! 가! 가! 가!’

“가! 가란 말얏!”

머리 속에 맴돌던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형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뼈가 튀어나왔다. 형은… 천폭에서 봤던 그 시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카카카! 어리석은 놈! 좋게 말할 때 들었어야지. 이런다고 네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귀신도 보였다. 나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늙은 노파였다. 노파는 배가 쩍 갈라져 내장을 줄줄 흘려내고 있었다.

“낄낄낄! 어린 놈이 제법 질기단 말이야. 꼬마 놈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매 맞기 전에 순순히 말 들어.”

노파 귀신이 왼손을 잡았다. 반쪽 살만 붙어 있는 귀신은 오른손을 잡았다.

‘끌려가면 죽는다. 이겨내야 해. 이겨내야.. 차앗!’

“흐흐흐! 그런다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흐흐흐!”

“이놈! 좋은 말로 하니까 알아먹지 못하는구나! 그럼 할 수 없지. 이게 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원망일랑 말아라!”

갑자기 노파 귀신이 몽둥이를 집어 들고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팠다. 뼈마디가 저리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매라면 변검을 가르쳐 준 양부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맞았지만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도 종아리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맞았는데.

“이놈! 이래도 안 와! 죽어라! 죽엇!”

이번에는 살이 반쪽밖에 남지 않은 귀신도 때려댔다. 귀신은 뼈골만 남은 손아귀로 때렸는데 얼마나 아팠던지 노파 귀신이 때리는 것은 오히려 인정이 들어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백골이 살에 닿을 적마다 철퇴로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신경이 마비되고 살이 부르르 떨렸다. 비명이라도 힘껏 지르고 싶었지만 아픔은 비명을 내지를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소소라는 아이가 있었단다. 아주 예쁘고 귀여웠지. 울 때도 웃을 때도 귀여웠어. 가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귀여웠어. 그런 아이를 죽이고 말았단다. 왜 그런 줄 아니?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야. 쫓기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단다. 너도 살천문에 쫓겨 봤으니 심정을 알 거야. 너는 쫓기지 말아야 돼. 네가 쫓기는 해도 쫓겨서는 안 돼. 그런 마음이 없다면 무공을 배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양모 배금향은 친어미와 다름없었다. 그분이 내뿜는 숨결은 향긋했고 쳐다보는 눈길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그래, 쫓겨서는 안 돼. 귀신 따위에게는 더더욱. 귀신이야. 귀신이야. 귀신일 뿐이야.’

종리추는 양모를 떠올리자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두 귀신이 때릴 적마다 끌려가 버리면 이런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끌려간다 해도 나쁠 것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기다리는 분이 있어. 그분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 돼. 귀신 따위에게 넋을 빼앗겨서는 안 돼.’

종리추는 변검을 배울 때 익혔던 운기토납술을 펼쳤다. 백회혈로 천지간의 기운을 빨아들인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깊고 긴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해보자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하면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펼쳐 본 것에 불과하다. 양손에 진기가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전에는 그저 힘이 약간 더 들어간다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확연하게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귀신들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더 맞고 싶지도 않았다.

“가! 꺼져!”

양손을 힘껏 잡아당기자 두 귀신이 쑥 끌려왔다. 다가온 것이 아니라 힘없는 어린아이처럼 맥없이 끌려왔다. 종리추는 자신이 생겼다. 자신에게 귀신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에 없이 강한 호승심이 치밀었다.

“어디 한번 싸워볼까? 이젠 너희들이 맞아!”

종리추는 귀신들이 잡고 있는 손을 뿌리쳐 빼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퍽퍽! 퍽퍽…!

살점이 반만 남은 귀신은 비명을 지르는 듯하더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노파 귀신은 겁먹은 얼굴로 슬슬 피하려고만 했다.

“가!”

노파 귀신은 염라대왕의 하명이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달아나 버렸다.

“휴우!”

종리추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쏴아아…! 쏴아…! 우르르릉…!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빗방울이 거칠게 쏟아졌다. 천폭에서 들리는 굉음도 여전했다. 세상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시신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종리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겪었던 일이 뇌리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 변한 것은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무섭게 내리꽂히는 번개도 다정스러웠고 밤이 되어 더욱 깊어 보이는 소도 정겨웠다. 또 하나… 전에 느꼈던 불쾌함이 사라졌다. 몸속에 타인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 느낌도 없다. 가볍고 상쾌하기만 하다.

‘꿈인가?’

하지만 꿈으로 돌리기에는 기억이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어디 한번 해봐?’

종리추는 꿈에서처럼 변검 사부에게 배웠던 운기토납술을 시전했다. 양손에 진기가 운집되는 게 느껴졌다. 그저 약간 힘이 모인다 싶은 정도가 아니라 꿈에서처럼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거력이 느껴졌다.

“이얏!”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바위를 내려쳤다. 전 같으면 손바닥이 아플 것 같아 내려칠 엄두도 못 냈겠지만 지금은 자신 있었다.

퍽!

작은 바위는 정으로 얻어맞은 듯 쩍 갈라졌다.

“어! 이, 이게…?!”

종리추는 자신이 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바위를 내려친 손을 들어 올려보아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금종수를 익히면 바위도 두부처럼 으스러뜨린다더니… 맞는 말인가? 그럼 내가…?”

적지인살과 배금향이 모르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양부모는 종리추가 수투를 끼고 있는 줄 안다. 홍리족 장정들을 일권에 쓰러뜨리는 거력이 수투에서 나오는 줄 안다. 종리추는 수투를 끼지 않았다. 수투를 끼고는 귀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느끼기는 했지만 맨손으로 만질 때처럼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종리추는 수투를 벗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양부모님들이 걱정하실 것 같아서. 홍리족 장정들을 쓰러뜨린 일권에 숨어 있던 힘은 종리추의 힘이 아니라 몸속에 들어와 있던 귀신의 힘이었다.

“빨리 가서 부모님께 알려드려야지. 히히, 내가 금종수를 익혔어. 금종수를.”

종리추는 뛸 듯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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