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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36화


“추아가 보이질 않아요.”

“어딘가 있겠지.”

“걱정도 되지 않으세요?”

“어허!”

배금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오문에서 기루를 맡아 운영하던 여자가, 중원 전 무림인이 끓는 가마솥처럼 펄펄 끓고 있는데도 유유히 정인을 데리고 빠져나왔던 여자가 종리추가 며칠 보이지 않는다고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걱정되기는 적지인살도 마찬가지였다. 우기 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수련하던 종리추가 건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무공 수련에 손을 놓아버렸다. 어쩌다 찾아가 보면 멍하니 앉아 천폭을 바라보는 모습만 보였다. 당연하다. 종리추가 세상에 둘도 없는 귀재라 해도 이 년 남짓 배운 무공으로 모진아와 싸울 수는 없다. 그동안 배운 무공이 있어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긴 했지만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한 게다. 녹요평에는 눈이 많았다. 그날, 녹요평 싸움 이후로 암연족 전사들은 초막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혹여 야반도주라도 할까 감시하는 눈초리다. 불행히도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자들은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무슨 놈의 야만족들이 이렇게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도대체 이들이 익힌 무공은 누가 전수한 것인가. 도주할 길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적지인살은 종리추가 걱정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종리추인들 그런 점을 모를 리 없다. 적지인살은 말도 건네지 못하고 물러서곤 했다. 그러던 종리추가 며칠 동안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밀림의 거처인 고목에도 없었고 천폭에서도 모습을 감춰 버렸다.

‘차라리 멀리 도망갔으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혹시 도주한 게 아닐까요?”

배금향이 희망에 들떠 말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마 이 세상에 도망가는 데 추아를 따를 자는 없을걸. 하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실망이 크겠구려. 추아는 도망갈 아이가 아니오. 그럴 기회가 있어도 우리가 남아 있으니 도망갈 리 없지. 허허… 어쩌다 혹이 되었는지.’

적지인살은 종리추가 도주할 마음만 먹는다면 암연족의 그물에서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살천문이 죽이지 못한 아이다. 흑봉광괴와 호법들이 포위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도 쥐 떼를 이용해 길을 열었던 아이다. 하지만 종리추는 도주하지 않는다. 적지인살, 배금향과 같이 가지 않으면 한 걸음도 떼어놓지 않을 아이다. 적지인살은 마른 헝겊으로 기형월도를 깨끗이 닦았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처럼 빠른 게 없다더니 아침을 맞은 지도 조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정오다. 녹요평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홍리족 부락민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였다. 암연족도 노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적지인살은 태연하게 그늘에 누워 이글거리는 햇볕을 피했다. 편안해 보였다. 오늘이 녹요평 싸움 때 약조한 이 년 후 그날이란 것을 잊은 듯했다. 배금향도 편해 보였다. 아침만 해도 추아가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을 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앉아 파라밀을 쪼개고 있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개미굴 속에 들어간 듯 바글거렸다. 하지만 하오문 향주 직을 맡아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태연해야 한다. 싸움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싸우는 사람도 편하고,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도 존경의 눈으로 쳐다본다. 딱히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눈빛이 바로 종리추에게 실리고, 기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둥둥둥…!

암연족 전사가 쳐대는 전고 소리가 그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처럼 크게 들렸다.

“화자도 어쩔 수 없나 보지?”

“그렇겠지. 모진아가 좀 무서운 사람인가.”

“그럼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이지.”

“그나저나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

“휴우… 화자가 모진아를 이겨줘야 되는데…”

홍리족 부족민은 암연족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수군거렸다. 홍리족은 단순했다. 이 년 전만 해도 어린이 ‘오빠’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부족 근처에는 발길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암연족이 다시 쳐들어오면 신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암연족을 악마의 화신인 화왕이 막은 것도 신의 화왕의 정신을 빼놓은 까닭이라며 ‘바보 같은 화왕’이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년이 지나 막상 암연족이 모습을 드러내니 살이 떨려왔다. 그들은 이 년 전의 싸움을 잊을 수 없다. 여든네 명의 용사가 한순간에 피를 쏟고 숨져 갔다. 지금도 홍리족 용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싸움에 대비해 창을 들고 나왔지만 전의에 불붙을 리 없다. 걱정되었다. 하나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바보 같은 화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무당 고병은 작년에 숨을 거뒀다. 고병의 뒤를 이은 장호는 무조건 싸우면 이긴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만약 화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성질난 암연족 전사들은 코앞에 있는 홍리족을 무참히 유린할 것이다.

“정오가 지났지?”

“한참…”

“아무래도 화왕이 숨겨놓은 것 같은데 화왕에게 가서 사정해 볼까? 왜, 전에도 그랬잖아. 족장님이 가서 말하니까 암연족 전사들하고 싸워줬잖아.”

“필요 없을걸. 그럴 것 같으면 숨겨놓지도 않지.”

홍리족은 답답했다. 약속 시간은 정오다. 싸움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혹시 구경을 놓칠까 봐 점심을 거른 채 나온 사람이 태반이다. 종리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무심히 흘러 정오를 지나고, 물소가 점심 먹은 것을 되새김하고 있을 시간인데도 종리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디 있나?”

모진아가 물었다. 그는 남만인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구절편을 들고 있다. 그의 눈길은 초원 한쪽에서 어슬렁거리는 들개를 쫓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유구가 대답했다.

“잡아내지 못한 거냐?”

“네.”

“후후후, 꽤 컸군. 네 이목을 비켜날 정도라면 상당히 컸어.”

모진아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도 도주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아니라?”

“화자는 죽을지언정 도주할 아이가 아닙니다. 목을 걸겠습니다.”

“흉측한 네 목을 가져다 어디 쓰게.”

“…”

“반했나?”

“네?”

“화자에게 반했냔 말이다.”

“쾌활한 아이입니다.”

“그것뿐이냐?”

“강한 아이입니다. 아주.”

“우리 부족보다도?”

“…”

“대답해 봐.”

“네, 우리… 보다. 무공은 어떨지 몰라도 성정만큼은 강합니다.”

“후후후.”

모진아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 기회에 좋은 걸 배우겠군. 똑똑히 배워둬라. 성정이 아무리 강해도 무공이 강하지 못하면 약한 거야. 자기 입으로 이 년이라고 말했으면 이 년 안에 수를 내야지. 수를 내지 못했다면 둘 중에 하나지. 성정이 약하거거나, 머리가 비었거나. 그런 놈은 살 가치가 없어.”

“…네.”

유구는 모진아의 수제자였다. 암연족 중에서도 가장 날래고 용감했던 유구는 한눈에 모진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모진아의 야망을 위해 제일 먼저 발탁되었다. 암연족 싸움과는 전혀 다른 무공이란 것을 배웠고, 암연족이 천하제일의 부족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유구는 모진아가 왜 종리추를 살려줬는지 그동안 여러모로 보살펴 줬는지 알고 있다.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삶 자체가 공허해졌다. 종리추는 임시방편으로나마 관심을 빼앗아갔고, 그것으로 좋았다. 유구는 모진아의 냉혹한 말투에서 종리추에 대한 관심이 끝났다는 것을 눈치챘다.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겼는가? 그건 아니다. 종리추가 무공에 정진하는 동안 모진아 역시 폐관하다시피 하며 무공을 수련했다. 종리추에 대한 싸움 때문이 아니라 할 것이 없어서.

‘덕분에 나도 시간을 갖게 됐군.’

모진아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관심을 끊었는가? 예전의 야망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는군.”

모진아의 말에 유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종리추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둘지 않고 초원 구석구석을 살피는 듯 여유 있는 걸음으로.

‘미련한 놈, 도망이나 가지.’

유구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들과는 종족이 다른 한인인데… 놈은 이상하게 감정을 흔들어 놓았다. 이상하게. 종리추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봤으면서도 태연히 초막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망이나 가지…”

배금향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어디서 뭘 하느라고 이렇게 늦었느냐! 무인이 비무를 약속했으면 시간은 지킬 줄 알아야지!”

적지인살은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어! 분위기가 왜 이래요? 누가 아파요? 굉장히 침울하네. 금슬 좋은 원앙 부부께서 다투지는 않았을 테고.”

종리추는 도무지 심각하지 않았다.

“넌 지금 농담이 나오니?”

“공자님 말씀을 따를 뿐이에요.”

“…?”

“사내는 모름지기 농담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몰라요? 아버지도 모르시겠어요?”

“이놈…”

“하하! 대학에 나오는 말이에요. 한번 찾아보세요.”

“네가 찾아봐!”

“제가 왜 찾아요? 알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찾아야죠.”

“아직 입은 살아 있구나.”

“아고! 입은 살았는데 위장은 죽었어요. 배고파 죽겠는데 뭐 먹을 것 없어요?”

종리추는 정말 배가 고픈 듯 배를 만져 댔다.

‘노옴…!’

적지인살은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대적을 앞에 두고도 이렇듯 여유가 있는 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적어도 자신보다는 낫지 않은가. 죽을지 살지 모를 싸움 앞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가르친 것이라고는 혹독한 수련밖에 없는데. 구김살 없이 잘 커준 것이.

‘좋은 집에서 태어나 글을 익혔다면 뛰어난 학자가 되었을 것을…’

종리추는 선 채로 밥을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앉아서 먹지…”

“어휴! 말시키지 마요. 배고파서 말할 기운도 없어요.”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배금향은 아침 일찍 일어나 따뜻한 밥을 해놓았다. 며칠 전, 적지인살이 이백 리를 걸어가서 구해온 쌀로. 농사를 짓지 않고 근처 부족민과는 교류를 할 수 없어 장장 이백 리나 걸어가서 후니족에게 구해온 쌀이었다. 쌀이라고 해봐야 중원과는 많이 달라 밥을 지어놓으면 바람에 날릴 것같이 푸석거렸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따뜻한 밥이나 먹여야죠.’

종리추는 자식이었다. 배금향은 어머니였다. 혈육으로 이어진 모자간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모자간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당신도 먹어야지.’

적지인살은 죽음을 생각했다. 배금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다. 종리추가 죽는 순간, 삶의 희망이 모두 무너져 버린다. 배금향은 소소에 이어 두 번째로 자식을 앞세운다. 적지인살 역시 두 번째로 자식을 먼저 보낸다. 그리고 대형과 한 약속, 소고와 한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대형… 미안합니다.’

적지인살은 얼굴을 본 지 벌써 오 년이나 지난 청면살수가 떠올랐다. 대형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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