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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37화


“많이 늦었구나.”

“더위는 피해야죠. 더위 먹을 일 있어요?”

종리추는 부쩍 자라서 열다섯이라고는 믿지 못할 만큼 컸다. 신체적인 면만으로 본다면 어른과 비교해도 하등 밀리지 않았다. 키도 그렇고, 우람하게 튀어나온 근육도 그렇고. 이 년 전에는 종리추가 올려다보며 말했지만 지금은 굽어보았다.

“건강해 보여서 좋다.”

“염려해 주신 덕분이죠.”

“한마디도 안 지는군.”

“싸우려고 나왔잖아요.”

“하하하!”

모진아는 호쾌하게 웃었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족장을 맡은 이래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병기는 이것이다.”

모진아는 구절편을 들어 보였다.

“하! 나와 비슷하네요.”

종리추는 손을 품속에 넣고 꾸물거리더니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밧줄 한 무더기를 꺼냈다.

“전 이걸로 싸울 거예요.”

“…?”

“이거 보기는 이래도 맞으면 꽤 아파요.”

모진아는 눈살을 좁혔다. 종리추가 꺼낸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연녹색을 보는 순간.

“그건 뱀 껍질…?”

“예.”

“우하하하핫!”

웃을 수밖에. 세상에 뱀 껍질을 엮어서 무기로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만약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면 놀리는 것이라 여기고 단박에 때려 죽였을 게다. 덩치가 커져서 어린애라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웃지 마요. 이게 그래도 이 년이나 썩지 않은 거예요.”

모진아는 웃음을 뚝 그쳤다. 이 년이나 썩지 않았다니. 그럼 이 년 전에 암연족 전사들을 죽인 그 뱀이 보통 독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좋은… 병기를 얻었군. 좋아, 그럼 싸워볼까?”

종리추와 모진아는 서로를 노려보며 빙빙 돌았다. 모진아는 구절편 손잡이를 오른손에 중간 마디를 왼손에 쥐고 가볍게 돌렸다. 병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구절편이라고 하면 아홉 마디로 이루어진 줄 알고 있다. 확실히 구절편은 아홉 대로 이루어졌다. 각 대와 대 사이에는 동그란 고리가 있고, 고리와 고리를 이어주는 고리가 또 있다. 대와 대 사이에 동그란 고리가 세 개씩 있는 것이다. 여덟 마디에 아홉 대. 구절편은 거기에 손잡이 한 대를 더 붙인다. 또 맨 앞에 즉각 살상을 할 수 있는 창날을 붙인다. 결국 구절편은 열한 대에 열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마디를 접으면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고, 마디를 펴면 창보다도 더 길고 파괴력도 강하다. 한 손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양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구절편은 생김새에서 볼 수 있듯이 원을 그리며 공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전부 도는 것은 아니다. 중간 마디를 손으로 꺾어 공격하기도 하고, 목을 이용하여 회전 각도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구절편은 전신을 사용하는 병기다. 모진아는 구절편을 가볍게 돌리고 있지만 그의 전신에는 물 한 방울 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과연!’

종리추는 조금도 방심하지 못하고 연녹색 뱀 껍질을 머리 위로 돌렸다.

쒜엑! 쉐에엑!

뱀 껍질은 강철이라도 되는 양 쇳소리를 냈다. 둘 다 성질이 비슷한 연병기. 구절편은 쇠로 만들어졌고, 채찍은 이 년 동안이나 썩지 않은 뱀 껍질로 만들어졌다. 편은 십팔반 병기 중 하나다. 편은 후려칠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으며, 조를 수도 있다. 우연히도 두 사람은 같은 종류의 병기를 들고 맞섰다.

쐐에엑…!

모진아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구절편이 날카로운 창끝이 밑에서 위로 물결치듯 솟구쳤다.

쉐엑!

종리추도 편을 쳐냈다. 머리 위에서 빙글 돌아가던 편이 말 머리를 후려치듯 구절편을 쳐갔다. 구절편은 중간 부분에 충격을 받으면 꺾인다. 편은 끝이 구부러지며 촤르륵 감아버린다. 같은 병기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데,

타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구절편과 편이 반대로 퉁겨 나갔다. 종리추는 손끝이 자르르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편에 혈염무극신공을 실었다. 이제는 단전에 돌덩이가 들어 있다고 여겨질 만큼 단단하게 여문 내공이 편에 실렸다. 그런데도 충격을 받았다.

‘늦추면 늦출수록 당한다.’

종리추는 비호무영보를 펼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최르륵…!

구절편이 모진아의 목을 감아버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날카로운 창끝이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촤악!

종리추는 사편을 손에 둘둘 감아 후려치듯 창끝을 뿌리친 다음 계속 달려들었다. 모진아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손잡이를 종리추의 안면에 내던졌다. 구절편이 그의 목을 축으로 좌르륵 풀려 나갔다.

촤악!

종리추는 다시 한 번 짧은 채찍으로 후려치듯 뿌리쳤다. 편에는 재질로 볼 때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두 종류가 있다. 길이로 볼 때는 긴 것과 짧은 것 두 종류로 나뉜다. 싸움에서 편 하나를 사용할 때는 긴 것을, 양손에 하나씩 두 개를 사용할 때는 짧은 것을 쓴다. 사편은 부드러우면서도 길다. 그러나 종리추처럼 손에 둘둘 말아 감자 짧은 것 한 개를 쓰는 효과가 나타난다.

촤르륵!

구절편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흘렀는가 하면 횡으로 그어왔고, 뿌리쳤다 싶으면 심장을 쑤셔왔다. 구절편과 모진아의 마음은 하나였다. 구절편 역시 쇠로 만든 물건임에는 틀림없는데 모진아의 육신의 일부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음…!”

종리추는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섰다. 모진아의 신변이 엄밀한 막으로 둘러싸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종리추가 거리를 좁히면 모진아는 구절편을 반으로 나누었고, 더욱 거리를 좁히면 중간 마디를 양손으로 잡아 삼절곤처럼 다뤘다. 결국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비응회선으로도 안 된다. 비응회선은 상하에 허점이 있다. 비응회선을 처음 봤다며 모를까,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으니 당하지 않을 게다.’

아버지의 비응회선을 생각했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종리추가 물러서자 이번에는 모진아가 거리를 좁혀왔다. 지면에 납작 깔리며 두 다리를 공격해 오는가 하면, 허리를 친친 감아오기도 하고, 복부를, 심장을, 얼굴을 찔러오기도 했다.

촤악! 따악!

종리추는 사편으로 힘차게 땅을 내리쳤다. 그리고 반동을 이용해 거세게 휘둘렀다.

동귀어진!

계속 공격해 올 경우 구절편은 종리추의 심장에 구멍을 뚫는다. 동시에 종리추의 사편도 모진아의 목을 휘감을 게고 목뼈를 부러뜨리리라.

쉬이익…!

모진아는 동귀어진도 감수하겠다는 듯 거침없이 뛰어들어 왔다.

‘이미 쏘아진 화살!’

종리추는 현재 그가 펴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내공, 금종수의 진기를 편에 실었다. 미간이 열리며, 외기가 쏘아져 이환궁으로 들어갔다. 이환궁에 머물던 신선 세 명은 외기를 받자마자 다른 신들에게 배분해 주었다. 종리추는 전신이 철갑처럼 단단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오른손에서 검이 튀어나오듯이 진기가 샘솟더니 사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데,

“엇!”

종리추는 헛바람을 내지르고 말았다. 모진아가 어머니의 몽둥이를 막아내는 아이처럼 왼손을 들어 사편을 막아내자, 사편은 목 대신 엉뚱하게 팔을 감아버렸다. 동시에 구절편의 첫째 고리를 움켜잡은 모진아의 손이 최단 거리에서 심장으로 쏘아왔다.

촤악!

종리추의 손에도 어느샌가 비수 한 자루가 들렸다.

쉬익! 쉬이익! 페엑! 싸아악…!

종리추와 모진아는 몸이 바짝 붙은 것 같은 짧은 거리에서 길이래야 손바닥만한 짧은 비수를 들고 공방전을 주고받았다. 구절편의 첫 마디를 움켜잡고 편을 단접으로 사용하는 모진아와 짧은 비수를 든 종리추는 서로 실날같은 차이로 상대를 베어내지 못했다. 눈부시게 빠른 몸놀림들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감탄을 토해냈다.

“지, 지금 몇 번 공격했는지 봤어?”

“쉿!”

어느 순간 종리추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모진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따라붙었다.

“잠깐!”

종리추가 두어 걸음 더 물러서며 손을 내저었다. 모진아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잊었어요?”

“…?”

“이 년 전에 그랬죠? 오 초만 견디면 살려준다고. 약속을 지켜요.”

“응? 풋! 내가 당했군.”

“히히! 오 초는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였다. 모진아가 구절편을 접는다 싶더니 몸 주위로 맹렬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 몸이 보이지 않아!”

종리추는 입을 쩍 벌렸다. 모진아는 육탄전을 벌일 만큼 치열하게 싸웠지만 꼭 종리추의 수준에서만 싸웠다. 지금 모진아가 보여주는 무공은… 그의 진신무공이었다. 구절편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모진아의 몸에 뱀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다. 꼬리가 모진아의 몸통에 풀로 붙인 듯 붙어버린 뱀들이 머리를 쳐들고 울부짖는 듯하다. 수백 마리의 뱀들이.

“아!”

종리추는 탄식을 토해냈다. 그는 모진아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진아는 아버지도 상대할 수 없는 거목이었다. 종리추는 알고 있는 모든 병기를 대입시켰고,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꺼내 봤지만 모진아가 저 상태로 달려든다면 난도분사당할 것 같다는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모진아가 초식을 거두고 구절편을 곱게 접었다.

“오 초를 넘겼으니 살려주지.”

“한 번 더 하죠.”

“뭐?”

“한 번만. 딱 한 번만.”

종리추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추아야!”

어머니가 황급히 달려들었지만 아버지의 손에 잡혔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됐어!”

종리추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맹수를 만난 맹수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죽을 수도 있다.”

“한 번만…”

“좋다.”

승낙이 떨어지자 종리추는 사편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기수식도 특이했다. 양 손바닥을 안쪽으로 하고 허리 부근으로 내렸다. 허리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리고 무릎은 약간 구부린 상태였다. 마치 동공을 시작하기 전에 기를 고르는 자세 같았다. 어쨌든 수비게 움직일 수 없는 자세인 것만은 틀림없다. 공격도 할 수 없고, 방어도 용이치 않은 기수식이다.

“오세요.”

“…”

“오세요.”

“다시 한 번 말한다. 죽을 수도 있어.”

“오세요.”

모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종리추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장생술이나 연마하는 것 같은 자세로는 싸울 수 없다. 그런데도 자신 있게 공격하라고 말하니… 적지인살과 배금향도 뜻밖의 행동에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종리추는 무모한 아이가 아니다. 이런 행동을 할 때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터이다.

“간다.”

“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절편이 촤르륵 풀려 나왔다. 그리고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초식이 펼쳐졌다. 모진아는 손이 열 개 달린 괴물처럼 구절편의 마디마디를 쉴 새 없이 꺾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의 몸은 점점 엄밀한 막에 쌓여갔고 종래에는 구절편이 어디 있는지, 어디를 공격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쉬이익!

모진아가 신형을 날렸다. 동시에,

쉭! 쉭! 쒜에엑…!

종리추의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모진아처럼 너무 빨라 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

배금향이 경탄을 토해냈다.

“이, 이거…”

적지인살은 넋을 잃었다. 쨍쨍 내리쬐던 태양이 일순간 사라진 느낌이었다. 하늘에는 온통 비수의 그림자로 빼곡했다.

창창창! 타앙! 타타타탕…!

구절편과 비수가 맞부딪치면 천둥 소리를 토해냈다.

“이, 이게… 무슨 무공이냐?”

모진아의 어깨와 허벅지에서는 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상처는 그곳뿐이 아니다. 옆구리에도 비수가 박혀 있다. 비수가 박혀 있지는 않지만 스쳐 간 듯한 흔적까지 꼽는다면 무려 십여 개의 비수에 격중당했다. 그의 발 밑에는 조잡하게 만든 비수가 무려 백여 개에 가깝게 널려 있었다. 비수라기보다는 쇠붙이를 나뭇조각에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다.

“졌군요.”

종리추는 허탈한 듯했다.

“이게 무슨 무공이냐!”

모진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살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한성천류비결. 하오문의 무공이에요.”

“하, 하오문… 하오문 따위에 이런 무공이…”

모진아도 하오문을 아는 듯했다. 하긴 무공을 익혔으니 웬만한 문파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게다.

“초식 명은 무엇이냐?”

“일수비백비 천하만비.”

“이, 일수… 광오하군.”

“…”

“넌 아까 졌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

“저에게는 그 무공밖에 없어요. 족장님을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이. 그게 제가 익힌 최고의 무공이에요. 그런데 살아계시니 제가 죽을 수밖에요.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절묘한 무공이라도 상대를 살려준다면 다음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거죠.”

“잘 아는군.”

“…”

“너는 나에게 기회를 줬다. 무슨 말인 줄 아느냐?”

“아뇨.”

“우리 부족의 전통을 아느냐?”

“약간요.”

“도전을 받으면.”

“반드시 죽인다.”

“그래, 그런데 난 죽이지 못했다. 그러면?”

“자진한다.”

“…”

“족장이잖아요?”

“예외는 없다. 세상에 미련도 없고, 후후! 내가 오 초 약속을 잊은 줄 아느냐? 네가 쓸모없는 인간이었다면 내 손에 죽었다. 오 초가 지나기 전에.”

“…”

“너는 세상을 살 만한 아이야. 그래서 살려줬다.”

“…”

“이제는 네가 나를 살려라. 나도 살고 싶어졌어.”

“어떻게요?”

“노예.”

“예?”

“도전을 받으면 반드시 죽여야 하나 원한이 깊으면 죽일 필요가 없다.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킬 자신이 있으면 노예로 삼아도 된다. 노예로 삼아 평생 동안 굴욕을 주는 거지.”

“그, 그럼?”

종리추는 일을 수습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노예로 삼겠느냐? 나도 자존심이 있으니 두 번 묻지는 않겠다.”

“예, 예.”

종리추는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그는 진정 몰랐다. 암연족이 족장이며 무공의 달인인 모진아가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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