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39화
배금향은 뜻밖의 선물을 받고 당황했다.
“족장님의 선물입니다. 받아주십시오.”
홍리족 족장 구맥이 돼지 열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홍리족 살림살이로 보면 아주 크게 마음먹은 것이다.
“받을 수 없어요. 선물받을 만한 일을…”
“저희 잘못은 잘 압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고… 돼지를 받아주십시오.”
돼지를 몰고 온 사람은 권투왕 역석이었다. 역석은 까만 의상에 흰색으로 줄을 그려 넣은 홍리족 전통 의상을 입고 왔다. 공식적인 방문이라는 뜻이고, 예의를 다한 선물이라는 뜻이다. 남편이라도 있으면 상의해 보련만, 요즘 들어 사내들이란 사내는 모두 종리추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오늘도 모진아는 새벽이 되기 전에 종리추를 깨워서는 천폭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내들도 아침을 먹기가 무섭게 밀림으로 달려갔다. 종리추는 매일 그들과 한 번씩 치열한 결전을 벌인다. 무공을 전수한답시고 초식을 가르쳐 주고는 그 초식만을 사용해서 결전을 벌이라고 한다. 당연히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다. 종리추는 그렇게 하루하루 두들겨 맞는 데 이골이 났고, 사내들은 때리는 데 일가견이 생겼다.
‘이것 참… 어떻게 하나?’
배금향에게 돼지는 부담스러웠다. 그것도 열 마리씩이나. 먹이를 줄 것도 마땅치 않지만 도무지 쓸 데가 없었다. 과일은 밀림에서 따 오고, 고기는 짐승을 잡으면 그만이었다. 따로 돼지를 거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권투왕 역석을 간절한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었다.
“돼지를 받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머리까지 땅에 찧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가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한 번 찧을 때마다 땅이 울렸고, 역석의 이마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그만요. 그만 하세요. 받을 게요.”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받아주시는 겁니까?”
역석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글쎄… 다 큰 어른이,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 어른이 눈물을 글썽이니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예, 받을게요. 족장님께 잘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럼요. 전해드리고 말고요. 그럼 내일 족장님이 찾아뵙도록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족장이 찾아올 것까지야…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내일 정오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역석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돌아갔다.
“예에…?”
모진아의 말꼬리가 이상하게 높아졌다.
“히히히…!”
유회는 뚱뚱한 사내다. 다만 근육으로 뭉쳐 있어 뚱뚱하다는 인상보다는 거대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분명히 뚱뚱하다. 인상도 사납다. 그는 이목구비가 모두 크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입술도 남들보다 두 배는 두툼하다. 그가 간지럽게 웃었다.
“큭! 큭큭…!”
유구는 숨을 참으며 웃었다. 한번 웃을 때마다 얼굴에 깊게 패인 상처가 실룩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웃어댔다.
“왜, 왜 그래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배금향은 갑자기 께름칙해졌다. 암연족 전사들이 갑자기 왜 웃는단 말인가. 더욱 이상한 것은 종리추의 태도다. 종리추는 정말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추아야… 왜…?”
“세상에!”
“뭐가 잘못됐는데? 답답하다. 빨리 말해 봐라.”
적지인살도 답답해서 물었다.
“세상에 어떻게 어머니가 아들을 팔아먹어요?”
“뭐엇?”
“정말 너무하시네. 그렇게 꼴 보기 싫었어요?”
“추아야, 그게 무슨…?”
“돼지 열 마리 그거, 혼인 예물이란 말예욧!”
“호, 혼인 예물?”
배금향은 정신이 퍼뜩 났다. 마치 자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큭큭큭! 흐흐하하하하!”
“하하하!”
암연족 전사들이 드디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홍리족 여인들은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에 혼인을 한다. 여자가 마음에 드는 사내 집에 돼지를 보내고, 돼지를 받으면 혼인이 성립된다. 돼지를 받은 다음 날, 여자 집에서 부모나 친척이 사내 집을 방문해 혼인 일정을 잡으면 된다. 혼인은 사내 집에서 치른다. 혼인한 날은 사내 집에서 자고, 다음 날 사내와 같이 여자 집으로 온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사내는 여자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이혼도 가능하다. 단, 이혼할 경우에는 사내에게 혼인할 때와 똑같은 수의 돼지를 주어서 보내야 한다. 여인은 중혼도 가능하다. 돼지만 넉넉하면 둘이고 셋이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홍리족은 여아보다 남아가 두 배는 넘게 출생한다. 자라는 과정에서도 여아가 남아보다 훨씬 많이 죽는다. 결국 혼인할 때가 되면 남자의 수는 여자의 세 배에 이른다. 어쩔 수 없는 혼인 관습이다.
어린은 종리추의 모습을 떠올렸다. 또래의 사내들보다 훨씬 다부진 체격하며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 툭툭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투도 싫지 않고… 종리추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었다. 옛날에는 그런 감정을 알지 못했다. 타 부족이 용사들을 못살게 구는 게 밉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모든 것이 그로 보이는 것일까? 달을 보면 그 속에 종리추의 얼굴이 있고, 마당을 보면 어렸을 적에 껴안던 모습이 떠올라 혼자 볼을 붉힌다.
“난 열세 살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오빠라고 불러. 알았어?”
그는 누구보다도 용맹스럽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다. 그를 생각하면 홍리족 사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열둘, 열셋쯤이면 모두들 혼인을 하느라고 난리 법석인데, 꿈쩍도 하지 않고 열넷이 될 때까지 있었던 것도 종리추만한 사내를 고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아, 너도 혼인해야 돼.”
“…”
“어린아!”
어머니는 속내도 알지 못하고 다그쳤다. 차마 종리추 때문이라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빠라고 불렀다는 사실 때문에 발길을 끊게 하지 않았는가. 어린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계속 만나게 했으면…’
“어린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사내가 있으면 말해. 말해야 알지.”
“없어요.”
“넌 혼인해야 한다고 했잖아. 자, 말해 봐. 마음에 드는 사내가 누구니?”
“없다고 했잖아요.”
“점조는 어떠니? 권투왕의 뒤를 이을 사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받는 아이인데.”
“싫어요.”
“그럼 비부는?”
“싫어요.”
“…”
“정말 싫어요.”
“안 되겠다. 이제 이 어미에게 맡겨라.”
“어머닛!”
구맥은 직접 마을 사내들을 살폈다. 적령기에 이른 사내는 물론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사내였다. 열다섯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사내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었다. 문제가 있으니까.
‘역시 비부야. 싸움은 점조가 제일 잘하지만 몸도 튼튼하고 일도 잘하고… 씨도 건강할 거야.’
구맥은 비부로 결정했다. 그날 밤, 구맥은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내일 부비에게 돼지를 보낼 거다. 여섯 마리를 보내려고 해. 섭섭하지 않지?”
“싫다니까요!”
“싫어도 할 수 없다. 내일 돼지를 보낼 테니까 혼인 준비나 해.”
어린은 방법이 없었다.
‘비부 같은 자와 평생을 살 수 없어. 난 도망쳐야 해. 그 길밖에 없어.’
어린은 그날 밤 모두들 잠든 틈을 타서 부락을 빠져나왔다. 낮 동안 달궈졌던 지열이 후텁지근하게 올라왔다.
‘내 사내는 한 명뿐이야.’
어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종리추가 있는 곳은 쉽게 찾았다. 찾아도 너무 쉽게 찾았다. 그는 늘 천폭에 머물렀다. 어떤 때는 못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뇌신이 숨어 있다는 폭포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정말 특이한 사내다. 특히 알몸이 되었을 때는… 달빛에 비친 근육질의 알몸은 정말 아름다웠다. 어린은 오랜 세월 종리추를 지켜봐 왔다. 모진아와의 싸움이 임박했을 때 그녀처럼 가슴 졸인 사람도 없을 게다.
‘일신이시오, 월신이시여! 천신이시여, 지신이시여! 동신, 남신, 북신, 서신이시여! 오빠를 지켜주세요. 오빠만 지켜주신다면 신의 뜻대로 살겠나이다. 제발 오빠를 지켜주세요, 목신, 화신, 수신이시여….’
어린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백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 거대한 고목 밑은 오늘도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어린은 고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
“안녕.”
“어쩐 일이야?”
“도망 나왔어.”
“도망?”
“자꾸 결혼하라고 하잖아.”
“뭐? 와하하하! 하면 되잖아.”
“…”
“왜?”
“나보고 오빠라고 부르라며?”
“응. 왜?”
“나보고 계속 안으라고 했지?”
“그래서 안겠다는 거야?”
“응.”
“요 꼬맹이가…”
“나, 꼬맹이 아냐!”
어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았어. 그래, 말만한 처녀다. 혼인하려니까 겁나서 그래? 그럴 필요 없어. 누구나 하는 건데 뭐. 너희 부족은 조금 일찍 하는 것뿐인데, 여기는 모두 일찍 하더라. 괜찮아.”
“오빠라도 할 수 있어?”
“그럼.”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럼 오빠에게 돼지 보낸다?”
“뭐, 뭣!”
“괜찮다며?”
“야! 그래도 나는…”
어린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종리추가 야속했다. 혼인을 하면 평생 같이 있어도 되는데 왜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오빠라고 부르라고까지 했으면서. 오빠라면 가족이지 않은가. 가족이 되라고 해놓고 왜 같이 살지 못한다는 것일까.
“일단은 들어가. 야! 내가 혼인한다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치도곤을 치실 거다. 너희는 몰라도 우리는 아직 혼인할 나이가 아냐. 알아들었어?”
“나중에는 괜찮아?”
“그래. 나중에 생각하자. 응?”
어린은 밝게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마른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던데 그날은 비도 내리지 않았다. 어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붙들려 앉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어머니가 주무시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돼지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먹이나 풍성히 주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구맥은 돼지에게 먹이를 주다가 밤이슬을 맞고 들어오는 어린을 보았다. 부족 여인이 밤이슬을 맞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사내.
“밤늦게 어딜 갔다 오는 거냐! 마음에 드는 사내가 있으면 있다고 말하라고 했잖아! 누구냐?”
“…”
“말 못 해!”
“화 안 내실 거예요?”
“언제부터 같이 자기 시작했니?”
“자진 않았어요.”
“그래, 누구냐?”
“화자요.”
“뭣?”
구맥은 망연자실했다. 화자와 혼인을 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한인들과 홍리족의 풍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가 홍리족의 한 사람으로 살아주면 그것처럼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말이나 해보고…’
구맥은 먼저 돼지를 보내기로 했다. 돼지를 받는다면 홍리족의 일원으로 살 뜻이 있다는 말이니. 비부에게 전달될 돼지는 네 마리가 더 보태져 화자에게 전해졌다. 구맥과 배금향이 탁자에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사내들은 모두 멀뚱히 서서 두 여인의 대화를 들어야만 했다. 홍리족은 대소사를 여인끼리 결정하기 때문이다.
“날짜를 어떻게 잡는 게 좋을까요?”
구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게 혼인 예물인지 모르고…”
“예? 그럼 돼지까지 받고 혼인을 무르겠다는 겁니까?”
구맥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풍습이 달라요.”
배금향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아시다시피 화자는 무공을 익히고 있어요. 무공을 익히는 아이는 중간에 혼인할 수 없어요. 우리 풍습이 그래요.”
“그럼 돼지는…”
‘아구! 내가 돼지는 왜 받아 가지고는…’
“어린이가 마음에 들어서요. 사실 어린이만한 여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나요? 어린이와는 꼭 혼인을 시키고 싶고… 그래서 욕심에 덜컥 받았지 뭐예요.”
“…그럼 무공을 그만두면 되겠네요.”
“그게 그렇지 않아요. 화자가 익히는 무공은 중간에 그만두면 피를 토하고 죽는답니다. 이틀만 익히지 않아도 죽어요. 혼인을 해도 피를 토하고 죽죠.”
“…”
배금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언제까지 무공을 익혀야 되는 거예요?”
“스물둘요. 이제 화자의 나이가 열여섯이니 죄송하지만 육 년만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럼 어린이 나이가 너무 많은데…”
“괜찮아요. 다 저희 때문에 혼기를 놓친 것인데요.”
“그럼 그때는 저희 집에 와서 살 수 있는 건가요?”
“화자요?”
“예.”
“물론이죠. 당연히 그래야죠.”
배금향은 입이 근질거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배금향은 종리추가 일러준 대로 말을 하긴 했다. 종리추는 정말 남만인들의 풍속을 세세하게 알고 있다. 풍속뿐만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할 것인지도 예측해 냈다. 그것은 깊은 관찰로만 가능하다. 상대를 이해하면서 마음속까지 들어가야 한다. 처음 만났을 때도 사람 마음을 읽는 것 같더니만… 그게 습관화되어 버린 것 같다.
“홍리족은 스물둘까지 못 기다려요. 그때면 어린이 나이가 스물인데, 차기 족장이잖아요. 어떻게든 정상적으로 혼인을 치르려 할 거예요. 그러자면 할 수 없죠. 저를 포기할 수밖에. 사람이 죽는다는데 어쩔 수 있어요?”
한데 이야기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휴우!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우선 비부하고 혼인시키고 화자와는 나중에 할 수밖에요.”
‘맙소사!”
배금향은 할 말을 잃었다. 서서 듣고 있던 적지인살과 종리추도 쇠뭉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암연족 전사들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어린은 불쑥 초막을 찾아왔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어요.”
“…?”
“…!”
“모진아, 유구, 유회, 너희는 내 남편의 노예니까 내 노예야. 알았지? 나한테 족장 행세하려고 하지 마. 어려도 알 건 다 알아.”
“예.”
모진아가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정말 미치겠네.”
종리추가 기가 막혀 펄쩍 뛰었지만 암연족이나 홍리족 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이상했다.
“가가.”
“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 들었어.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를 때 늘 가가라고 부르시던데 뭐. 이제는 화자가 내 가가야. 그렇지?”
“아, 아이구!”
“가가.”
“왜에!”
“왜 성질내고 그래? 좋은 소식 전하러 온 사람에게.”
종리추는 귀가 번쩍 뜨였다. 적지인살과 배금향도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어머니는 비부와 먼저 혼인을 하라고 했는데 그러기 싫다고 했어. 무공을 익히다 죽을 수도 있다며?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떡해. 그래서 내가 여기 와 살기로 했어. 혼인을 하는 날은 사내 집에서 자야 되잖아? 혼인이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는 사내 집에 있어야 되는 거야.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돼지는 건네줬고… 할 수 없잖아. 기간이 길지만 사내 집에 있어야지. 기분 좋지?”
적지인살, 배금향, 종리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