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47화
종리추는 가급적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려고 애썼다. 남만에 있는 동안은 사람들을 잊고 지냈다. 어쩌다 보는 사람들도 햇볕에 그을린 사람들뿐이었는지라 몇 달 동안 햇볕이라고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것 같은 중원인들이 낯설었다. 중원인들은 오늘도 바쁜 삶에 시달렸다. 폭설이 쏟아지고 있건만 노점은 여전히 성행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물건을 사는 사람도, 종리추처럼 그냥 구경이나 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주루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값싸고 독한 화주를 마셔 대며 유쾌한 표정으로 낄낄거린다.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중원은 그대로였다. 변한 건 없었다. 변했다면 어린아이에 불과하던 종리추가 훤칠한 성인으로 성장했다는 것뿐이다. 아! 변한 건 또 있었다.
“어멋! 잘생긴 공자님, 길고 추운 밤이 고적하지는 않으시우?”
“이리 와요. 내가 잘해줄게.”
중원을 떠나기 전에는 문가에도 어슬렁거리지 못하게 하던 기녀들이 먼저 소매를 잡아당겼다. 종리추는 모든 게 좋았다. 이들 모두에게서는 인간의 냄새가 난다. 변하지 않은 것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저녁놀이 지기 무섭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지는 한적한 농촌도 그대로였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게 피어나고 불이 밝혀진 방 안에서는 정다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얼마나 부러워하던 광경인가.
“나중에 크면 애 잘 낳는 색시를 얻을 거야.”
“애 잘 낳는 색시? 예쁜 색시가 아니고?”
“응. 형은 예쁜 색시 얻어.”
“도대체 애를 몇 명이나 낳으려고?”
“열 명.”
“열 명?”
“응. 난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많이 낳을 거야.”
“정말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자겠다.”
“그래도 좋아. 말하는 모습만 봐도 귀여울 것 같애.”
“쬐그만 놈이.”
가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식들이 재롱 떠는 것을 보면 하루 종일 논에서 시달려도 피곤한 줄 모를 거야. 종리추는 돈을 벌 욕심도, 형처럼 장사꾼으로 크게 성공할 욕심도 없었다. 그의 욕심은 오직 하나, 애를 많이 낳아 시끌벅적한 가정을 갖는 것이었다.
‘후후, 내 소원과는 점점 멀어지는군.’
“여보시오! 여보시오!”
종리추는 놀라지 않을 만큼 적당히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뉘시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롱불을 든 중년인이 모습을 보였다.
“하룻밤 신세 좀 졌으면 합니다.”
종리추는 될 수 있는 한 공손히 청했다.
“예서 조금만 더 가면 객잔이 나오는데…”
“객잔에서 쉴 형편이 못 돼 그렇습니다. 먹는 것은 괜찮으니 하룻밤 재워주시기만 하면 감사하겠습니다.”
“들어오시오.”
중년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예전에 머물렀던 농가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이 풀기 죽은 얼굴로 쳐다본다. 온종일 산을 뒤지며 나무뿌리를 찾았을 아낙네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나무뿌리 삶은 물을 한 대접 가져올 게다. 어쩌면 이들 가족은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슴이 튀어나온 계집아이라도 있다면 팔아버릴 생각을 할지도 모르고. 종리추는 행낭을 풀었다. 눈들이 반짝인다. 도읍에서 사가지고 온 쌀과 고기를 내놓자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이걸로 요기 좀 했으면 하는데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중년인의 눈에서 경계의 빛이 새어 나왔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수상한 사람도 아니고…”
이럴 경우 사람들은 한 가지 행동만을 취한다.
“잠시만 기다리시우. 금방 요리해 오겠소.”
중년 부인이 빼앗듯 낚아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너무 굶주렸다. 살과 고기를 본 게 정말 오랜만일 게다.
“보아하니 행색도 넉넉한 분 같은데… 쫓기는 중이오?”
중년 사내가 물어왔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황량한 객잔보다는 말이나 나눌 수 있는 곳이 좋아서 들렀습니다.”
종리추는 금종수의 내공을 익히면서부터 직감이 남달리 강해졌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떠오르면 분명한 색깔이 되어 뇌리 속에 박혔다. 중년 사내는 호의를 가지고 있다.
‘휴우!’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돈이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환경이 나쁘게 만든다는 말도 있다.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은 때때로 도적으로 변하곤 한다.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들른 농가에서도 그런 일은 왕왕 벌어진다. 좋게 이야기하고 밥상까지 걸쭉하게 차려주고는 침상에 누워 눈을 붙이기 무섭게 칼을 들고 덤벼들기 일쑤다. 특히 종리추처럼 행색이 넉넉해 보이면 틀림없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종리추는 그런 칙칙한 색깔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밥을 먹기가 무섭게 농가를 나와 버린다. 다행히도 중년 사내는 악의가 없었다.
“한가한 젊은이군. 이런 세상에 말이나 나누자니.”
“말씀을 안 하셔도 좋습니다. 전 그냥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중년 사내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눈빛을 흘렸다.
“아무튼 덕분에 우리도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수. 아비가 되어가지고 자식들을 굶기고 있으니. 휴우!”
주방에서는 고기를 요리하는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의 눈빛이 연신 주방으로 향했다. 종리추는 이른 새벽, 중년 부부가 깨어나기 전에 조용히 농가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탁자에 놓인 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설마 그 돈이 사람을 죽인 대가로 받은 돈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살혼부가 청부금으로 받는 돈은 막대하다. 살천문처럼 가리지 않고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고급 청부만 받았으니. 청부 한 건의 가격은 대저택 한 채를 살 만하다. 최소한이 그렇다. 살혼부가 받아들인 대부분의 청부는 청부금만 하더라도 논 천 석은 살 수 있을 정도다. 청면살수는 그 돈을 감쪽같이 숨겼다. 사무령을 만들어줄 수 있는 힘 중에 하나는 바로 금력이다. 무수는 대도읍인 무양을 지나지만 길이로 치면 겨우 백팔십여 리밖에 되지 않는다. 충조에서 발원하여 무양을 지나 여수와 만나는 데까지가 무수다. 어촌은 그대로 농촌보다는 사정이 한결 나았다. 어민들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어죽이라도 쑤어 먹으면 되니까. 종리추는 너무 낡아 뜰 수 있을까 염려되는 배를 향해 다가갔다.
“이 배 탈 수 있습니까?”
사공은 칠순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래서 찾아왔다. 노인이 뱃전에 앉아 그물을 다듬는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 조용해 보여서.
“탈 수는 있지. 타려고?”
“예, 태워주시겠습니까?”
“강을 건널 생각인가? 그럼 닷 냥 내게.”
“삼이도라는 곳을 가려고 합니다.”
“삼이도? 이 늦은 시각에?”
“예.”
“거긴 민가도 없어. 지금 가면 얼어 죽기 딱 알맞아.”
“하하. 내일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삼이도로 약속 장소를 정했지 뭡니까.”
“쯧!”
노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타게. 한 냥일세. 정월맞이도 좋지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널려 있는 판에… 쯧!”
“죄송합니다. 어렸을 때 한 약속이라…”
종리추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 핑계라도 대야만 노인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삐걱! 삐걱…!
배는 위태롭게 흔들거리며 나아갔다.
“돌아올 때는 어쩌려는가?”
‘돌아올 때… 죽었을지 살았을지…’
종리추는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삼이도에서는 하루도 견디기 힘들어. 객기도 부릴 때 부려야지. 쯧! 내일 아침 배를 대줄까?”
“아뇨, 모레 아침이 좋겠습니다.”
‘하루는 걸릴 거야.’
삼이도가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 극적으로 개방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때 보았던 산 그림자 같이.
삐걱! 삐걱…!
종리추를 삼이도에 내려놓은 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어 사라져 갔다. 사공은 친절하게도 부러진 노를 건네주었다.
“젊은 사람이 고집하고는… 저녁이 되면 내 말이 생각날 걸세. 자, 이거라도 가져가게. 화톳불은 있는가? 삼이도에는 불 피울 것도 없어. 쯧! 한겨울을 강 한복판에서 맞겠다니.”
종리추는 웃는 얼굴로 받았다.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이 무조건 무서웠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안심해도 될 사람과 안심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구분되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포근하고 다정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아도 애써 부드러운 면을 찾았다. 종리추는 사람들 속에서 잃어버린, 앞으로도 계속 잃어버려야 할 꿈을 찾았다.
삼이도는 무수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다. 배를 댈 만한 모래사장은 있지만 섬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섬인지라 사람이 살 곳은 못 되었다. 하지만 삼이도에도 생물은 있다. 바위 틈을 비집고 자라는 잡초도, 그 틈을 비집고 알을 낳는 물새도 있고, 개구리도 있으며 뱀도 있다.
공지장은 삼이도에 흰 천막을 쳐 놓았다. 군에서나 사용하는 대형 천막이다. 안에는 추위를 녹일 수 있도록 모닥불도 피워져 있고, 긴긴 밤을 따스하게 보낼 수 있도록 장작도 많이 준비되어 있다.
“잡고 잡히는 싸움이다. 무공을 겨루는 비무가 아니라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죽지 않고 잡혔다면 흰 천막으로 들어가야 한다. 장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고의 수족이 되는 것이다.”
종리추는 천막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나…!’
종리추는 흔적을 잡아냈다. 백색 천막에서 서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움푹 꺼진 구덩이가 보인다. 하기야 바위 섬 전체가 울퉁불퉁하니 어디가 꺼진 곳이고 어디가 솟은 곳인지 구분할 수도 없지만. 종리추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날카로운 직감보다도 마음을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히 가라앉힐 심법이 필요했다. 이 순간 이후, 한 인간의 영육이 다른 인간에게 조종을 받게 되는데 어찌 편안할 수 있을까. 변검 양부가 가르쳐 준 내공심법은 이럴 때 상당히 유용했다. 백회혈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맑고 청량한 진기가 마음의 밭인 중전을 차분하게 보듬어 감싸 안는다. 날카로운 진기는 중전으로 밀려 들어왔다. 날카롭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폭풍 같은 진기였다. 밤바다가 폭풍우를 동반하고 몰아치는 것 같은 어둡고 거센 진기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부숴 버리겠다는 의지가 넘쳐흐르는 진기다.
‘적사…’
종리추는 움푹 꺼진 곳에 누가 숨어 있는지 알아냈다. 적사는 아직 경솔하다. 그는 충분한 자신이 있을 것이다. 살수가 아니라 결투를 벌여도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팽만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토록 강한 진기를 쏘아낸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올 테면 오라고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아직 내공이 미약해서 들킨 것이 아니라 일부러 진기를 쏘아내고 있는 것이다. 적사는 아직 어리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목숨의 절반 정도는 타인의 손에 거둬졌다는 진리를 모른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데. 적사는 평생이 걸린 일에 어찌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어찌 그리 자신만만한가.
‘일 다경…’
종리추는 적사를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부터 몸을 숨기고 근접하여 해치울 시간, 계산대로 된다면 적사는 일 다경 안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파아앗…!
또 다른 진기가 밀려왔다. 이번에도 폭풍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진기이나 적사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진기이다. 아직 폭발하지는 않았으나 건드리기만 하면 무서운 힘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더군다나 중전을 슬쩍 스치고 지나간 진기는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있기는 한데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잠잠하다.
‘거센 기운을 숨긴 채 은밀히 웅크리고 있다. 숨으려고 하는군. 사람을 많이 죽여 봤어. 목숨이 귀한 줄 알아. 싸울 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사실도.’
적사의 뒤다. 종리추는 한 여인을 떠올렸다.
‘풋!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주둥이만 살아가지곤…’
‘적각녀라고 했나? 거칠게 자랐군.’
적각녀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종리추는 어린 소녀의 입에서 그토록 거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뇌옥에서 처음 들었다.
‘풋! 적사, 임자 만났군.’
적각녀를 해치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숨어 있기는 하나… 반 각이면 충분해.’
적사를 노리는 사람은 또 있다. 왼쪽으로 이십여 장 떨어진 곳, 흐르는 강과 삼이도가 접한 곳, 모래사장이 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곳. 죽음처럼 음침하면서도 끈끈한 기운이다. 변검 사부가 가르쳐 준 내공심법에는 걸려들지 않았던 기운. 삼이도에 이미 친구들이 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오진기를 모두 끌어올리자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 진기다. 오진기를 모두 끌어올리는 방법은 근래에 들어서야 깨달은 새로운 운공 방법이다. 도가의 무공이며 상단전을 단련시키는 금종수의 운공 심법, 중단전을 단련하는 변검 양부의 운공, 하단전 정중안 토기를 관장하는 대연신공, 상부 화기를 관장하는 무형초자의 천풍선법신공, 하부 수기를 관장하는 혈염옹의 혈염무극신공. 모두 단련시키는 곳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주화입마를 각오하고 다섯 진기를 일시에 이끌어 보았는데… 결과는 훌륭했다. 금종수의 진기는 미간을 통해 들어온다. 변검 양부의 외부 진기는 백회혈을 통해, 다른 세 진기는 콧구멍을 통해 외부 진기를 받아들인다. 일시에 받아들이는 곳이 세 군데다. 가장 우려한 것이 진기가 경맥을 흐를 때 충돌하는 것인데, 다섯 진기는 같은 혈도를 흐르더라도 선후를 두었다. 어느 진기를 먼저 수련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오진기를 동시에 끌어올리면 전신의 모든 감각이 극도로 열리며, 한 번의 수련으로 각각의 내공 수련을 다섯 번 한 것 같은 효과를 불러왔다. 종리추는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는 금종수의 내공심법을 조금 더 강화했다. 마음의 평정이 필요할 때는 변검 양부의 진기를 강화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 진기만 끌어올리면 나머지 진기는 스스로 살아 움직였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울림이 있자 전신 감각이 일깨워졌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다섯 진기가 한꺼번에 끌어올려져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회색 빛으로 물든 진기는 머릿속 이환궁을 흔들었다. 감각을 자극하는 진기다. 상대는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 살공을 익혔다. 처음 기본 공을 배울 때부터 사람을 죽인다는 일념으로 배운 무공이다.
‘야이간이겠군. 지독하게 변했군. 소리 장도의 전형이야. 웃고 있으되 믿지 마라. 후후. 야이간의 웃음은 조심해야겠군. 야이간은 검보다 마음이 무서워. 가장 나중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야. 이런 성격은 어부지리를 좋아하니까. 좋아. 너는 한 시진, 한 시진으로 하지, 해치우는데…’
종리추는 세 친구의 위치를 간파했다. 위치뿐만 아니라 성격도, 무공이 지닌 특성도 파악했다. 무공으로 견준다면 누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들이다. 종리추 본인 역시. 종리추는 세 친구의 위치를 파악하고 해치울 시간까지 설정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뚜벅. 뚜벅.
그는 계속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
그는 살수가 싫다. 녹요평에서 암연족 전사를 죽인 후 구역질을 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처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열 살에 칼을 틀어박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린 나이에 서른두 명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아버님이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했으니 간다. 나름대로 누구에게 쫓기지 않을 무공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소고가 혈뢰삼벽을 익혔다지만 무공으로 겨룬다면, 아니, 살수로 겨뤄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소고의 수하다. 그래서 싸우지 않는다. 무의미한 싸움이다. 종리추는 장막을 걷고 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