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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54화


하오문은 크게 다섯 가지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배수, 소투, 기녀, 마부, 도곤. 이들이라고 전부 하오문도는 아니다. 거지라고 전부 개방 문도는 아니듯이 이들도 하오문에 적을 둔 사람과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전체 인원으로 보면 하오문도보다 아닌 사람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인원 수로는 훨씬 적은 하오문도들이 하나의 직종을 지배하고 있다. 하오문에 적을 둔 사람들은 평생 같은 직종에서 종사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잠시 노름을 하거나 생활이 어려워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들과는 생각부터가 다르다. 하오문도는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일을 하다가 죽기를 원한다. 하오문은 각 성의 각 부에 직업별로 다섯 향을 둔다. 부 전체는 망이 총괄하니, 망은 한 부의 통이 되는 셈이다. 성 전체는 모지라는 곳에서 총괄한다. ‘아무 땅’이라는 뜻으로 부평초처럼 덧없이 한 세상을 살고 있는 자신들을 자책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중원 전체는 당연히 총타에서 지휘한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이지만 체계적인 명령 체계를 갖추었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충성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오문에 도움이 되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지만, 하오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나이가 들어 늙은 후에도 내치지 않고 깍듯이 존장으로 예우해 준다. 종리추에게 죽은 배문 향주가 칠십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향주 직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한때는 ‘신수’라고 불렸던 그의 솜씨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종리추는 개봉 배문의 철천지 원수가 된 것이다.

“혈주를 마시고 싶다?”

개봉 망주 천은탁은 삼층 누각에서 겁 모르는 작자들이 들어 있는 별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종리추의 경우처럼 혈주를 마시고 싶다는 작자는 희귀하지만 ‘배문 영역의 일부를 달라’, ‘기루에서 기문 기녀들을 쓰지 않겠다’, ‘도방에 하오문 도곤들을 들여놓지 않겠다’ 등등, 하오문에 도전하는 자들은 한 달에도 서너 건씩 나타난다. 그 대부분은 향주의 손에서 해결되지만, 망주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경우도 많다. 망주가 나설 경우 상대는 향주의 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친 자들이 대부분이다. 망주는 고민했다. 그들을 어르고 달래서 하오문에 입문시킬 것인지, 아니면 죽여 버릴 것인지. 망주도 해결하지 못할 자들을 모지에 연락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않다. 삼사 년에 한 번 꼴이라고 해야 할까? 거칠면서도 싸움까지 능한 자들은 예상 밖으로 적다. 망에는 무공이 능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런 일을 대비해서 무공만 꾸준히 수련하고 있고, 그들 중 일부는 모지에 차출되기도 한다.

“건방진 작자들이군.”

천은탁은 깨끗하게 다듬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천은탁은 소투의 세계에서는 ‘투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훔치는 것도 감쪽같지만 단 한 번도 걸린 적이 없기 때문에 얻은 별호다. 천은탁은 곱게 늙어서 오십이 넘은 지금도 여인의 방심을 울릴 만큼 깨끗한 용모를 유지하고 있다. 팔자로 기른 콧수염과 삼각추처럼 곧게 뻗친 턱수염을 다듬는 것에서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그다. 도저히 도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한 얼굴에 훤칠한 풍채를 지녔다. 기녀들 중에는 망주와 하룻밤을 보내면 원이 없겠다고 말하는 기녀도 있을 정도였다. 그가 저잣거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몸소 나섰다.

“그렇게만 보실 게… 저자들은 정말 무인들이었어요. 무인들 중에도 실전에 이골이 난 자들 같았어요. 사람을 한두 명 죽여본 자들이 아니에요.”

벽리군은 종리추의 냉혹한 눈길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거칠다는 자들도 많이 접해봤고 살인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살천문 고수들도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종리추처럼 충격을 준 사람들은 없었다. 종리추는 정말 살인을 할 자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죽일 자다. 피가 뱀처럼 차디찬 인간이 있다면 종리추다.

“향주가 많이 약해진 것 같은데?”

“휴우! 전 제가 본 대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실전에 이골이 난 자들인데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싸움에 이골 난 강호 초출내기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

벽리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오문에서는 무림 인사의 동향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무인이라도 걸어는 다녀야 한다. 그들은 배수에게 걸린다. 여자를 좋아한다면 기녀들에게 걸리고, 도박을 좋아하면 도곤들의 눈길에 걸려든다. 술도, 도박도, 여자도 멀리하는 자라 해도 마차는 타야 한다. 그들은 마부들에게 걸린다. 마차도 타지 않는다면 소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파악한다. 중원 무림인들치고 하오문의 눈길을 벗어나는 자는 거의 없다. 어떤 자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는 인상착의와 사용하는 무공의 특징만 간추리면 하루가 못 되어서 몇 살까지 엄마 젖을 빨았는지까지 소상히 파악된다. 한데 별채에 든 자들은 아무 흔적도 없다. 무림에 나타난 적도, 누구와 싸운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게 싸움에 능한 무인들이?

“시험해 보면 알겠지.”

천은탁은 시립해 있는 무인 두 명에게 고갯짓을 했다.

덜컹!

별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인 두 명은 적이 언제 어디서 공격해 오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별채로 들어섰다.

“뭐야!”

쇠북이 울리는 듯 고막을 텅 하고 울리는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인 두 명은 앞을 턱 가로막는 거한을 보고 눈살을 좁혔다. 대체로 이렇게 덩치가 큰 자들은 외문 무공을 익히고 있기 십상이다. 몸뚱이가 철판보다도 단단해서 육장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다. 그러나 칼은 들어간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이이기에. 무인 두 명은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며 거한의 좌우로 갈라졌다.

“뭐냐고 물었잖아!”

“네놈을 저승으로 보낼 사자.”

“뭣? 하하…!”

유회가 고개를 젖히고 웃을 때, 무인 두 명은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날이 시퍼런 독비가 들려 있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이!”

거한의 행동은 상상 밖으로 빨랐다. 왼쪽에서 공격해 오는 자의 손목을 거머쥐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오른손이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인의 신형이 허공에 붕 띄워졌다.

퍼억!

유회는 무인을 들어 올리자마자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자에게 내던져 버렸다. 두 무인은 명문대파에서 무공을 수련한 적이 있다. 못된 손버릇이 발각되어 파문되기는 했지만 무공의 기초는 단단히 닦았고, 덕분에 하류 잡배들 사이에서는 제법 높은 대접을 받는다. 그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칼을 들고 들어와서 겁없이 날뛰는 거야!”

유회는 쓰러진 자들을 한 손에 한 명씩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아가들아, 여기는 너희가 놀 곳이 아니니 밖에 나가서 놀아라. 응? 알았지?”

휘익! 퍼억! 쿵!

무인 두 명은 그들이 열어 젖힌 문으로 되튕겨 나왔다. 무인 한 명은 별채 앞에 있던 정원석에 머리를 부딪쳐 즉사했다. 다른 한 명은 나무에 부딪친 후 죽었는지 혼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퉤!”

유회가 문밖으로 침을 내뱉고는 문을 닫았다.

“두 명 다 즉사했습니다.”

천은탁은 보고를 받기 전부터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있는 삼층 누각에서는 별채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곰처럼 우람한 사내가 수하 두 명을 개구리처럼 내던지는 모습도 보았다. 소투 출신으로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이런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상대가 정통으로 무공을 배운 일류 고수일 경우.

“음… 가보자.”

천은탁은 하기 싫은 말을 했다. 별채에 든 자들은 기문 향주가 말한 대로 실전에 이골이 난 자들이 틀림없다. 망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모지에 빨리 전서를 띄워.”

천은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가만… 전서는 나중에 띄우도록.”

천은탁은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천은탁이 다섯 향주와 함께 별채에 들었을 때 종리추는 침상에 누워 아기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주공께서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으니 쥐 죽은 듯이 조용히 하고 있어.”

유회가 으름장을 놓았다. 유구는 얼굴에 난 긴 상처를 꿈틀거리며 동쪽 창문을 경계하고 역석은 서쪽으로 난 창문을 경계한다. 그들에게서는 조급함이 보이지 않았다. 수하 두 명이 습격을 가했지만 그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말이 없다.

‘정말이야. 향주 말이 옳았어. 이자들은 정말 사람을 많이 죽여봤어. 살인귀들이야. 혈주를 마시겠다…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다른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쪽 길을 갈 것인가 저쪽 길을 갈 것인가. 선택을 잘할 경우에는 이득을 보지만 백 번 잘하다가도 한 번만 삐끗하면 목숨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천은탁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살천문에 등을 돌릴 것인가, 이들과 싸울 것인가.

종리추는 아직 잠을 자고 있지만 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짐작이 가

고도 남았다.

혈주를 마시겠다고 했으니 분명히 청부 건수를 물어다 달라고 하겠지.

그런 일이 비밀리에 이루어질 리 없고, 살천문이 알게 되는 날에는 망주

자신이 살인 대상이 된다.

살천문에는 자신 정도는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럴 경우 명문정파라면 복수를 한답시고 문도 전체가 나서겠지만 하오

문에서는 모르는 척 덮어버린다. 차지 망주가 선출될 것이고, 자신의 죽음

은 잊혀지리라.

하오문에서는 하오문의 이득과 상관없는 일은 그렇게 처리한다. 설혹 문

주가 당했다 할지다로. 하물며 망주가 당한 것쯤이야.

‘수렁에 발을 디밀었군. 거참!

종리추는 술시가 다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저녁 상을 준비했는데요.”

“주공께서 아직 취침 중이시다. 이따 다시 차려와.”

“술이라도 준비…”

“조용히 해라. 네 목소리 때문에 주공께서 깨시면 넌 죽는다.”

아무도 종리추의 단잠을 개우지 못했다.

개봉부 하오문도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망주 천은탁도 탁자에 앉아 잠

자는 종리추의 얼굴만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종리추는 해시 초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천은탁과 다섯 향주가 술시 초에 별채를 방문했으니 꼬박 한 시진을 앉

아서 보냈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날 길들이겠다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이렇게 얄팍한 수로는. 난 그

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냐.”

사람을 불러놓고 관심없는 척 다른 일을 한다.

상대를 무시하는 이런 수법은 기선을 제압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다. 천

은탁도 몇 번 사용해 본 적이 있는데 효과는 좋았다. 상대에게 범접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니까.

종리추의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쓰던 수법과 하

등 다를 바가 없었다.

“세숫물을 가져와.”

유회는 종리추가 이어나자마자 착실한 시종처럼 수발을 들었다. 그리고

종리추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출출하군. 간단한 것으로 먹지.”

“소면, 즉시 대령해!”

시녀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움직였다. 그녀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향

주, 망주조자도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데야.

종리추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소면을 천천히 먹었다. 아주

맛있게.

유구, 유회, 역석은 종리추가 식사를 끝낸 다음에야 퉁퉁 분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종이나 수하가 아니라 노예 같았다.

“망주인가? 이름은?”

종리추가 거침없이 반말로 물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곱게 봐주려고 해도 도저히 봐줄 수가 없

군. 혈기는 좋다만 세상은 혈기만으로 사는 게 아니지.’

죽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은 뒤로 쏙 빠지고 살천문에 통보를 하면

된다. 혈주를 들고 싶어하는 작자가 있다고. 나머지는 살천문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천은탁이라 하오.”

“천 망주, 하오문을 쓰자.”

‘하오문을 쓰자? 두 손 싹싹 빌면서 사정을 해도 모자란데, 허허! 내가

이런 말을 듣다니. 하오문을 쓰자?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천은탁은 짐짓 모른 체했다.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이 건방

진 자를 어떻게 요리할가 생각하기에 바빴고, 언제까지 거드름을 피우는지

도 보고 싶었다.

이자는 어치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하오문은 절대 무력으로 장악되지 않는다. 점 조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있는 탓도 있지만,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

타적인 습성 탓도 있다.

이자들은 자신을 비롯해 다섯 향주를 죽일 수는 있으리라. 그만한 무공

은 지녔다고 인정하니까. 하나 하오문을 장악할 수는 없다. 자신들이 죽는

순간부터 하오문은 철저하게 이들을 공격하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 친구들을 동원해서.

살천문에 죽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태가 진전되는 것이다. 외부 세

력의 요구를 거절하다 죽은 경우는 결코 잊혀지는 법이 없다.

“혈주를 마시고 싶은데… 살천문이 문제야. 이곳 개봉부에 있는 살철문

살수들의 모든 것을 알아줬으면 해.”

“하오문이 왜 그런 요구를 드어줘야 하는지 모르겠소.”

종리추가 천은탁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왜냐하면… 난 혈주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지.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죽

어. 하오문이든 살천문이든, 개방이든.”

천은탁은 이자가 미치지 않았나 싶었다.

광오해도 이렇게 광오한 자는 처음이다. 겨우 네 명으로 살천문은 그렇

다 쳐도 개방까지 들먹이다니.

‘진심이야. 이자는… 정말 죽이려고 해. 개방이라 해도 앞을 가로막는다면

거침없이 죽여댈 거야. 오래 살지는 못하겠군.’

천은탁은 종리추의 눈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었다.

‘손을 떼야 해.’

“살천문의 모든 것을 알아서 어쩌하시겠소?”

“죽여야지.”

종리추의 대답은 간단했다.

‘역시… 손을 떼야 해.’

“알겠소.”

천은탁은 이성과는 다른 말을 했다.

천은탁은 종리추와 비슷한 자를 알고 있다. 그도 종리추처럼 광오했고

두 눈이 신념으로 불탔다.

“미친놈.”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다.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군.”

두 번째는 웃었다.

“벌써!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은 좋지 않은데… 오래 살기는 틀린 놈이군.”

세 번째는 애도를 표했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천은탁이 네 번째로 한 말이다.

그는 하오문주였다.

종리추는 하오문주와 기질이 너무 비슷하다.

“나도 조건이 있소.”

“없어.”

“…”

“천 망주, 당신은 아무 조건도 내걸 수 없어. 살천문의 모든 것을 알아주

기만 하면 돼.”

“죽이시오.”

“…!”

종리추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뒤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무조건 눈앞에 닥친 일

을 뚫고 나가는 성격이다. 비켜서게 할 수 있으면 비켜서게 하지만 그럴

수 없으면 죽인다.

‘오늘이 제삿날이군. 그것참…’

천은탁은 눈을 감아버렸다.

“뭐냐?”

뜻밖에도 종리추가 편안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

“조건을 말해 봐.”

천은탁은 종리추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았다. 그는 조건을 들어줄 마

음이 전혀 없다. 고양이가 생쥐를 앞에 놓고 장난을 치듯이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말을 하지 마?’

천은탁은 잠시 망설였지만 입을 열었다.

“당신을 도와주는 것은 큰 모험이오.”

“…”

“살천문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 하오문 정도는…”

“조건만 간단히.”

“…”

천은탁은 다시 한 번 종리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이다. 이자는 조

건을 들어줄 마음이 전혀 없다. 그냥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도 천은탁은 입을 열고야 말았다.

“혈배를 탁자에 올려놓게 되면… 문주를 죽여주시오.”

종리추의 눈가에 진한 살기가 떠올랐다.

혈배를 탁자에 놓는다.

살수에게도 경쟁자가 있다. 살수들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사람을 확

실하게 죽이느냐로 결정된다. 혈배… 그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경쟁자

의 피를 담은 잔을 말한다.

혈배는 탁작에 놓는다는 것은 경쟁자를 제거했다는 말이 된다. 살천문

을… 완전히…

“유구.”

“옛!”

유구가 짧은 몽둥이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망주를 죽여.”

종리추는 천은탁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살명을 내렸다.

‘이자는 정말 분노하고 있다. 왜? 혹시 하오문주와 무슨 관계라도… 후후!

나이가 들었나? 사람을 잘못 보게.’

천은탁은 생을 포기했다. 죽으면 그만이다. 이후의 일은 살아남은 사람들

의 몫이다. 그때.

“잠깐! 잠깐만요. 드릴 말쓸이 있어요.”

유구가 움직이는 모습을 벽리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덕일어서며 다

급히 말했다.

“향주!”

천은탁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벽리군은 처연하게 웃으며 말을 시작했

다.

“그래요. 우리 하오문은 밖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문주를 암살

하고 무주 직을 가로채기도 해요. 지금 문주도 그랬죠. 전 문주님을 암살하

고 문주 직은 자치했어요. 이 년 전에. 현 문주는 성정이 흉포하긴 하지만

하오문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도 많아요.”

종리추의 눈빛에 기광이 어렸다.

“최장으로 하오문주의 직위를 지켰던 사람이 팔 년이란다. 온통 암계와

음모가 난무하는 속에서 목숨을 보존하기는 쉽지 않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에게 진신 비공

을 전수했다. 종리추 자신이 익히고 있는 한성천류비결이 바로 그의 무공

이다.

‘이 년 전에 들은 말이니… 십이 년이군. 최장으로 하오문주의 직위를 지

녔어. 한성천류비결을 제대로 익혔다면 쉽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유구가 천은탁의 뒤로 돌아가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천은탁은 눈을 감았고, 벽리군은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

종리추의 입에서 천은이 내려졌다.

“하오문주… 반드시 죽여주지.”

“고맙…”

천은탁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쩍 벌렸다.

종리추의 전신에 무수한 비늘이 생겼다. 물고기 인간처럼, 아니, 그런 착

가이 들었다.

쉬이익! 쉬익….!

비늘은 하늘로 솟구쳐 벽에 걸린 소녀미인화에 틀어박혔다. 백여 개에

이르는 비늘이 정확히 한 폭의 그림에.

“이, 이 무공은… 이 무공은…!”

천은탁의 어깨가 격동으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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