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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57화


서신을 읽는 벽리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어. 이제부터 본격적인 피바람이 불 거야. 자칫 숨 한번 잘못 쉬면 목이 날아가니까 각별히 조심하도록!”

다른 향주들의 안색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살천문 개봉 제일 살수 살천사괴, 사.
살천문 개봉 제일 살수 청살신필, 사.
살천문 개봉 제일 살수 유수어옹, 사.

항주들은 자신이 들고 있는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서신에는 살천문 살수들이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까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살천사괴는 독에 중독되었다. 그들 네 명은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친형제들로 손속이 잔인하기로 소문난 자들이다.
직접적인 사인은 목이 떨어진 것이다.
유구는 처음에 독을 사용했고 중독되어 신음하고 있는 자들을 깨끗이 처리했다.
보통 사람을 중독시키기는 쉽다. 하지만 살수는 그런 독에 대해 반반의 준비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유구는 해냈다.
서신에는 독에 중독된 원인으로 독침을 꼽고 있다.
독침… 암살이다. 은밀히 숨어서 독침을 쏘아댔다. 살수로서 유구가 살천사괴보다 한발 앞서 있다는 증거다.

청살신필은 병장기로 철필을 사용한다. 철필이 지닌 특성상 그의 무공이 근접전에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암기에도 능한 자다.
청산신필을 죽음으로 이끈 병기는 매화표다.
암기의 달인의 암기에 죽었다.
완력만 자랑하던 거한 유희에게 청산신필을 암기로 죽일 만한 무공이 있었다니…

유수어옹의 병기는 죽간.
유수어옹은 병기가 될 것 같지 않은 죽간으로 때리고, 찌르고, 후려치고, 창이나 봉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모든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유수어옹은 평상시에도 반경 삼 장 안으로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싸울 때는 특히 더 그렇다. 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이리저리 쫓기다가 찔러 죽거나 맞아 죽는 수밖에 없다.
낚싯바늘이나 낚싯줄도 유수어옹의 손에 들리면 훌륭한 병기가 된다.
낚싯줄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금방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가 되고 만다. 낚싯줄이 목을 휘감으면 대로로 베어낸 것처럼 깨끗하게 절단할 수 있다고 한다.

유수어옹은 단검에 심장이 찔려 죽었다.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땅속에 숨어 있다가 지척까지 근접했을 때 불쑥 솟구쳐 급습을 가했거나 유수어옹이 휘두르는 죽간을 피하며 파고드는 것.
어느 쪽이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종리추의 수하들 중에 가장 사람이 좋아 보이는 역석도 감탄할 만한 무공을 지녔다.

그리고 벽리군이 들고 있는 서신에는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

살천문 개봉 지부장, 사.

지부장이 살해당한 장소는 살천문 개봉 지부다. 대낮이며 자신의 집무실에서 당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도대체 언제!”

벽리군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기루를 나설 때만 해도 종리추는 탄금에 몰두했다. 자정이 넘어서 기루를 나섰는데 그때까지도 탄금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 했다.
어제가 지나고 오늘이 되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것은 살천문 개봉 지부장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지금 막 전서로 날아왔으니까… 몇 시진 전에 벌어진 일이지.”

“개봉 지부를 언제 알아냈죠?”

“닷새쯤 됐나?”

‘닷새…’

종리추가 살인 명령을 내린 날이다.
그렇다. 종리추는 개봉 지부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식을 접하고도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봉 지부가 파악되자 번개처럼 움직였다.
모두 오늘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
종리추는 살천문이 방비할 시간적인 여유마저도 빼앗아 버렸다.

“우리는 이 일에 간여하지 않았어. 절대로! 만약 조금이라도 간여할 흔적을 발각당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거야. 모두 각별히 명심하도록 해.”

“아이구! 벌써부터 살이 떨리네. 그자들 정말 혈주를 들기로 작정한 자들이었잖아?”

“작정은 무슨 작정, 벌써 혈주를 들었는데.”

“조용조용. 지금 중구난방으로 떠들 때가 아냐.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청부자를 구해주는 일이야. 개봉 지부장과 살천문 제일 살수가 죽었지만 살천문이 와해된 것은 아니지. 그것쯤이야 살천문에서 고수 몇 명만 보충하면 해결될 거야.”

“…”

모두 침묵을 지켰다.
모두들 하오문도는 의리가 없다고 한다. 하오문도에게 충성심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한겨울에 감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한다.

모르는 소리.
비록 소매치기에 노름꾼에 도둑놈들, 몸을 파는 여자에 말똥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을 열어준 사람에게는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의리가 있다.
망주와 향주는 그 의리를 전 문주에게 바쳤다.

“어차피 살문에는 사람이 네 명밖에 없으니까 개봉 지부를 깨끗이 쓸어내지는 못해. 지부장과 일급 살수들을 죽인 것은 실력을 과시한 것에 불과하지 세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어.”

“살천문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겠구먼.”

마문 향주가 말했다.

“그렇겠지. ‘살문의 종리추’라고 이름을 밝혔다니… 하지만 어디서 살문을 찾나? 찾을 수가 있어야 죽이든 살리든 하지.”

“실력을 과시한 것치고는 대가가 너무 없네요. 청부자도 구할 수 없고, 내놓고 다닐 수도 없고.”

새로 배문 향주가 된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실력 과시 이상이야. 상대방의 지부장을 죽이는 것은 살수들이 문파를 일으킬 때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의식이야. 정식으로 살문이 무림에 나섰다는 개파 의식이지. 죽음이나 보복이 두려운 자는 살수가 되지 마라, 이런 뜻이랄까?”

“…”

모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피를 흘린 사람도 없는데 진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너무 진해서 구역질이 치밀기까지 했다.

종리추는 단순히 사람 몇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람들은 살천문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을 거야. 원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니까. 살문이 어디 있냐고 웅성대겠지. 그 틈을 놓치지 말고 살의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도록. 살문이 버젓이 나설 때까지는 그렇게 하면서 이름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어.”

“망주, 그들이 살수라면 차라리 청부를 넣어버립시다. 하오문주를 죽여달라고. 그럼 깨끗하지 않겠어요? 성공하면 살문도 단숨에 명성을 날릴 테고.”

소문 향주가 말했다.

‘일리 있어’

망주 천은탁은 고개를 내돌렸다.

“나중에. 지금은 눈과 귀가 되어주고.”

‘하오문주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살천문에 이어 하오문까지 나선다면… 청부를 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쫓기다가 볼일 못 보겠지. 아무래도 무리야.’

천은탁은 종리추를 궁지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종리추가 펼친 무공, 그것은 전대 문주의 진신비기이지 않은가.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같은 사문을 둔 것만은 틀림없다.

‘문주와 형제나 다름없는 사람… 종리추는 하오문주를 죽여준다고 했어. 그건 청부가 아니라 정리로 내린 결정이야. 전대 문주가 당했다는 분개심에서 내린 결정. 그 순간만은 우리가 같은 마음이었어. 도와줘야 해.’

천은탁은 세세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종리추와 유구, 유희, 역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천화기루로 돌아왔다.
종리추는 여전히 금기서화에 몰두했다.
종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맛 들리기 시작한 다도로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별채에 있는 사람들 말야, 언니 기둥서방 아냐?”

“에이! 언니 나이가 몇인데…”

“아무렴 어때? 젊고 잘생기면 그만이지.”

“그럼 배문 향주는 왜 죽었어?”

“뭔가 사연이 있나 보지 뭐. 망주도 가만히 있잖아. 여기 계속 머물게 하고 말야.”

“하기는…”

“그런데 왜 같이 자지 않지?”

“그건 낮에 하나 보지 뭐.”

“호호!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기둥서방인데 왜 잠을 같이 안 자? 밤에는 고자가 되는 병이라도 걸렸대?”

“호호호! 그거 재미있겠다. 밤에만 고자가 된다면.”

기녀들은 별채를 차지하고 있는 종리추 일행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종리추 일행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것도 잠시뿐이다. 그녀들은 곧 향주의 엄밀한 명을 기억해 냈고, 함구했다.

천화기루의 기녀들은 칠대째 염색에만 종사해 온 종가의 둘째 자제를 화화공자라고 부른다.
어느 기루에나 화화공자라고 불리는 사내들이 한 명씩은 있다.
기루를 제 집처럼 여기는 사내.
쓰는 돈은 많지 않지만 거의 매일 잠깐이라도 들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내.
여자를 정복하고는 싶으나 여염집 처자를 건드릴 용기는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한 기녀만을 고집하는 자도 있다.
정가의 둘째 자제는 후자다.
그는 천화기루에 들를 적마다 부영이라는 기녀를 찾는다.

“부영이는 지금 다른 손님을 모시는데 내가 말 상대나 해줄까?”

“아니, 됐어. 기다리지 뭐.”

“오늘은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잠깐 몸을 빼는 것도 어려울 거야.”

“괜찮아. 술이나 줘.”

“바보, 차라리 데려가서 소실이라도 삼으면 되잖아.”

“…”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가의 둘째 자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어머니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문난 여장부다. 남편, 자식은 물론이고, 시부모까지 한 손에 쥐고 흔든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 곳에서나 뒹굴던 천한 년을 들여놓을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한 발짝도 안 돼!”

그러나 그런 어머니도 아들의 한바탕 자살 소동을 겪고 난 다음에는 기루 출입을 묵인했다.
다음날에도 화화공자는 기루에 들렀다.

“부영이는?”

“너무 일찍 왔잖아.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난 모양이지? 지금 화장하고 있어. 곧 나올 거야.”

“위층에 올라가 있을게.”

화화공자는 힘없는 걸음으로 이층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오늘은 일찍 왔네!”

부영은 키도, 얼굴도, 손도 모두 작았다.
예쁘장하고 귀여운 얼굴이다.

“응, 오늘은 빨리 끝났어.”

“술 가져올게.”

“다른 사람이 가져올 테지 뭐. 여기 앉아. 너무 보고 싶었어.”

“피이~ 어제도 봤잖아.”

부영과 화화공자의 음성은 나직해서 문밖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늘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원래 사랑의 밀어란 귀에다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다 새겨놓는 소리이지 않은가.

“오늘은 화장이 잘 먹었네.”

“응, 예쁘지?”

화화공자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부영은 재빨리 서신을 가로채 품속에 찔러 넣었다.

“어제 손님들 귀찮지 않았어?”

“왠걸, 귀찮아서 혼났어. 내 마음 잘 알잖아. 다른 사내들이 만지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

“미안해. 이렇게 놔둬서…”

“어쩔 수 없지 뭐.”

화화공자와 부영은 뜨거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술상은 황고라는 하인이 가져왔다.
황고는 귀머거리에 벙어리다.
전대 향주가 동냥 온 그를 불쌍히 여겨 기루에 머물게 한 다음부터 황고는 착실한 하인이 되었다.
기녀들은 거지들에게는 도둑 근성이 있으니 은자를 훔쳐 도망갈 것이라고 쑥덕댔지만, 기녀들의 쑥덕거림은 보기 좋게 틀렸다.
황고는 은자를 훔쳐 도망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술과 안주로 너저분하게 널려진 방들을 깨끗이 청소했으며, 술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기녀에게는 꿀물도 타다 줬다.
지금에 와서 황고 없는 천화기루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부영은 황고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서신을 꺼내 건네주었다.
서신은 황고의 바지춤으로 들어갔다.
벽리군은 황고가 가져온 서신을 읽었다.

금일 해시정, 공자묘, 자시초, 인문교.

서신 내용은 짤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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