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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58화


유구는 인적이 끊긴 산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오늘따라 날씨도 우중충해서 별빛 한 점 흘러들지 않았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자욱한 안개, 가끔 들려오는 승냥이의 울음소리.
산길을 타기에는 내키지 않는 날씨였다.

“옷을 든든히 입고 가. 산은 여기보다 훨씬 추워.”

남만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뭐니 뭐니 해도 추위였다. 이놈의 추위만은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추위 외에는 거리낄 게 없었다.
남만의 우기를 겪어본 사람들에게 안개니, 밤이니, 산속이니 하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였다.

산 중턱까지 더듬어 올라가자 화전민이 살았음직한 허름한 농가가 나타났다.
방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끝! 대삼원.”

촤르륵…!

조용하던 방 안에서 골패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구는 골패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서 소 뼈 조각으로 만든 장난감을 달그락거리는 것이 영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중원인들은 틈만 나면 골패를 만지작거린다.

‘골패를 하고 있으면 네 명… 두 명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유구는 서슴없이 농가로 향했다.

덜컹!

문을 열어젖히자 방 안의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밖에서 듣고 예측했던 대로 사내 네 명이 발가벗은 채 탁자에 앉아 골패를 만지고 있다. 다른 사내 두 명 역시 발가벗었다. 그 두 명은 여인 한 명을 상대로 교합을 벌이는 중이었다.
여인은 탈진했는지 목석처럼 멍하니 누워 있다.
유구는 한눈에 여인의 상태를 알아봤다.
정신이 공황 상태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극심한 충격에 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간 상태다.
여인의 몸에는 멍 자국이 가득했다. 얼굴에는 피가 응고되어 딱지가 졌고, 눈두덩은 시퍼렇게 변한 채 잔뜩 부어 올랐다.

“뭐야!”

“아이구, 추워! 문 닫고 꺼지지 못해!”

사내들은 기세가 등등했다.

“개봉부에서는 소문난 망나니들이다. 개봉부를 돈과 권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자식들이지. 아비의 위세가 워낙 등등해서 건드릴 엄두를 못 내는 자들이야. 그놈들 두 명은 무공을 익혔다. 정식으로 문파에 입문해 익힌 무공은 아니지만 돈이라면 못할 게 없지.”

유구는 문을 닫았다.

“응? 뭐야, 이 새끼.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히히!”

“너, 저 계집 남편이냐? 야야! 남편이 마누라 데리러 온 모양이다. 그만하고 보내줘.”

“가만있어. 조금만 더 하면 나올 것 같아. 헉헉!”

교합을 벌이고 있는 사내들은 이런 경우에 익숙한지 용두질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가 한 번씩 용두질을 할 때마다 여인의 뽀얀 가슴이 출렁거렸다.

“조금만 기다리라는데? 기다렸다 데려가.”

스윽! 스르릉! 척!

유구는 쇠막대기를 꺼내 맞붙인 후 꽉 조였다. 훌륭한 철봉이 완성되었다. 그는 다시 창날을 꺼내 제일 위에 붙이고 조였다.
순식간에 장창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구는 창에 익숙했다. 모진아에게 하사받은 무공은 각법이지만 암연족 전래로 계승되어 온 창술도 부단히 연마했다. 그는 각법보다는 창이 좋았다.
종리추가 창술 한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십팔반 병기에 능통하고 많은 무공을 알고 있으니 창술 하나쯤 창안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창은 이해하고 연마하는 데는 더없이 좋을 거야. 하지만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많이 보완해야 해. 병기만 능숙하게 사용해도 웬만한 사람은 이길 수 있어.”

무인을 상대하는 것이 문제다. 무인에게는 병기만 능숙하게 사용하는 정도로는 통하지 않는다. 상대를 알면서도 당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초식이 필요하다.
종리추가 가르쳐 준 초식, 그것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유구의 몫이다.

“뭐야? 우리랑 싸우겠다는 거야?”

“저, 저놈! 무인이다!”

골패를 만지작거리던 사내들 중 한 명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옷을 벗어 던진 곳, 그곳에는 고색창연한 보검이 놓여 있었다. 검병이 푸른색의 옥으로 되어 있고, 검수에는 여의주를 문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검집에도 꿈틀거리며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쉬익!

유구의 장창이 검을 향해 신형을 날린 자의 허리를 노렸다.

“헛!”

사내가 헛바람을 내지르며 회공번신을 펼쳤다. 허공에서 한 바퀴 신형을 비튼 사내가 날렵하게 물러서며 유구를 노려보았다.
유구는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사내들의 땀과 정욕으로 후텁지근하게 덥혀진 공기가 역겨웠다.

강간이라면 암연족의 특기다. 노예로 잡아온 여자는 누구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암연족도 윤간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정 마음에 들 때는 내 노예를 주고 맞바꾼다.
그건 사내를 여럿 거느리고 있는 홍리족 여인들도 마찬가지다. 서방이 여럿이지만 부부 관계를 가질 때는 한 남편하고만 한다.
사내가 정액의 아기 씨다. 한 사내의 ‘아기 씨’가 옥토를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유구는 사내들이 추잡하게 보였다.

쉬이익!

“컥!”

엉거주춤 일어서던 사내가 급살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더니 푹 고꾸라졌다.
유구의 창이 사내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피, 피닷! 이 새끼 정말 사람을 죽였… 아아악!”

말을 하던 사내도 비명을 토해냈다.
어느새 창을 빼고 다시 내지른 손속에 혼을 내맡겨 버렸다. 창은 사내의 입을 꿰뚫고 머리 뒤까지 삐져 나왔다.

쉬이익!

창이 다시 빠져나왔다.
창날은 피와 누런 뇌수가 뒤섞여 요사한 사기를 띠었다.

“저, 저놈!”

용두질을 하던 사내가 날렵하게 뛰쳐 내려왔다.
유구는 무인 두 명이 누군지를 알아냈다.

쉬익! 페에엑….!

득달같이 달려들며 창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른다 싶은 순간 거세게 후려쳤다.

빠악!

침상에서 뛰어내리던 사내의 머리가 함몰되었다. 철봉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아무리 단단한 돌머리라 해도 무사할 순 없다.
유구는 내친 김에 여인의 입에 양물을 집어넣고 있는 사내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퍼억!

사내는 벽에 등을 부딪친 후 되튕겨 나와 여인의 배 위에 엎어졌다.
여인의 배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여인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전혀 들리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는 듯.

“죽일 놈!”

무공을 익힌 사내가 벼락같이 몸을 날려 회선각으로 공격해 왔다.
사내는 공격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각법이라면 유구 또한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유구는 안면을 차오는 상대의 오른발을 손등으로 쳐올리고 몸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왼발은 창대로 후려쳤다.

쿵! 사내는 거칠게 떨어졌다.
망설임 없는 창이 사내의 복부를 깊게 찔러 버렸다.

“컥!”

사내는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창을 움켜잡고 억울하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내 털썩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억울해도 복부에 틀어박힌 창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었다.

“나, 나는 한 번밖에… 한 번밖에 안 했어요. 에잇!”

사정을 하던 남은 사내가 부리나케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산을 내려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는 가만 내버려 둬도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될 것이다.

유구는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힘껏 던졌다.

페에엥…!

화살처럼 날아간 창이 사내의 등을 꿰뚫고 가슴 뼈를 으스러뜨리며 앞으로 삐져 나갔다.
옷가지를 주운 다음 여인에게 엎어져 죽은 사내를 밀어내고 피를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속살에 오돌토돌 돌기가 맺혔다.
그제야 유구는 겨울 찬바람이 거침없이 여인의 몸을 핥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구는 여인의 이런 상태를 잘 안다.
자신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노예로 잡아온 여인이었는데 반항이 무척 심했다. 그녀는 자식과 남편이 있다면서 돌려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대부분의 여자는 몇 대 두들겨 패면 반항을 그치는 법인데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강제로 겁간했다. 여자가 아무리 반항을 해도 싸움으로 단련된 사내의 거센 힘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여자를 정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여자가 이런 증세를 보였다. 드러난 치부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부가 활짝 드러나 있지만 멍하니 누워 있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애초하고 똑같은 상태야.’

유구는 잠시 망설였다.

“여자도 같이 죽이라는 청부다. 정조를 더럽힌 여자와는 같이 살 자신이 없다면서. 힘이 없어 제 계집을 빼앗겨 놓고도 아픈 상처를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앗으려는…. 똑바로 들어라. 이게 청부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배알이 뒤틀리고 욕지기가 나와도 해야만 하는 일이 청부다.”

유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내력이 담긴 주먹을 연약한 여인의 머리가 감당해 낼 수 없다. 내려치기만 하면… 내려치기만 하면 청부는 끝난다.

‘죽여야 하나….’

유구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망나니가 검 하나는 좋을 걸 가졌군. 네놈에게는 벅찬 검이야. 주공에게나 어울리는 검이지.’

검을 뽑아 들자 시퍼런 청광이 방 안을 난자했다.
보통 명장의 솜씨로 만들어진 검이 아니다.
검신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천하에 이렇게 날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으리라.
유구는 보검을 챙겼다. 밖에 나가 나무에 깊이 틀어박힌 자신의 창도 뽑아 들었다. 창은 사내의 몸을 관통하고도 힘이 남아 나무에 깊이 틀어박히기까지 했다.

‘끝났어.’

유구는 몇 발자국을 떼어놓았다.
죽일 자는 죽였으니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애초와 같은 상태….’

자꾸 뒤가 켕겼다. 알지 못할 힘이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휴우!”

유구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농가로 다시 들어갔다.
유구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유구가 앉혀 놓은 상태 그대로.
그는 여인을 등에 업었다.

종리추는 냉담했다.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다향을 음미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유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처분을 기다렸다.

“애초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 한마디로 할 말은 다 했다.
유희도, 역석도 끼어들지 못했다. 종리추에게 차를 끓여주던 벽리군도 너무 기가 막힌 일에 입을 벌리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종리추도 유구와 애초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다.
유구는 정말로 애초를 사랑했다. 노예로 잡아온 여자이니 그런 여자를 건드렸다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여 버려도 상관없다.

“잘못 건드렸어. 그렇게 건드리는 게 아닌데….”

유구는 후회했다.
암연족은 여자에게 연연하는 자를 전사로 보지 않는다. 여자는 사내의 노리개일 뿐 동등한 사람이 아니다.
유구는 온갖 비난과 멸시를 감수하고 애초에게 매달렸다.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목욕을 시켜줬다.
암연족 전사가 여자를 목욕시키다니!
그 일은 유구를 암연족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진아의 배려가 없었다면 유구는 그때 추방당했을 것이다.

애초는 죽었다. 스스로 자진했다.

“정신이 돌아왔어! 돌아왔다구!”

유구는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지만 그 시간 애초는 나무에 목을 매고 있었다.
유구가 웃음을 잃어버린 것은 그때부터다.

‘하지만….’

청부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의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신의가 무너진 살수는 이미 살수가 아니다.
살문은 이제 갓 출범했다.
인정을 두기 시작하면 살문은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은 한 명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게 된다. 제방도 개미 구멍으로 무너지는 것을.

종리추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죽이라고 하면 어찌할 테나?”

“죽이겠습니다.”

유구는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럴 걸 뭐 하러 데려왔어?”

“….”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태어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살수. 남자와 여자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어. 사랑을 하고,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고…. 또 배반하고, 간통하고, 죽이고, 살인 강간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어. 죽이는 것.”

벽리군은 마음이 아팠다.
종리추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유구가 여자를 데려온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만은 없는 종리추의 삶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그녀는 현숙한 아내처럼 비어진 찻잔에 차를 따랐다.
뭇 사내에게 짓밟힌 몸이고, 나이도 거의 배는 많지만 이 순간만은 현숙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의 처절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살수가 한다면 죽는 길을 택했다고 보면 돼. 아내, 자식… 모두가 짐이지, 사람도 재물도 다 필요 없어. 몸을 가릴 수 있는 옷 한 벌. 나를 지켜줄 적의 병기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럼 왜 살수가 되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악마인가요? 그럼 죽이면 되잖아요.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이면. 청부는 뭐 하러 받아요? 나쁜 짓이지만 큰 돈을 움켜쥘 수 있으니까 살수가 되는 것 아니에요?’

벽리군은 반박하고 싶었다.
종리추의 말에는 허점이 많다. 무엇보다 그는 왜 사는지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으리라.

“사람은 한 가지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 해. 죽일 자와 죽이지 않을 자. 죽일 자는 죽이고, 죽이지 않을 자는 놔두는 거야.”

“….”

유구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유구”

“옛!”

“넌 살수의 경계를 넘어섰어.”

“….”

“그 여자를 지금 죽인다 해도 무너진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

“돌아가.”

“옛?”

“동토를 벗어난 사람이 같이 있을 수는 없지. 아버님에게 돌아가 있어. 여자는 죽이든 데리고 가든 네 마음대로 해.”

종리추는 벽리군이 따라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주공!”

“….”

“주공! 차라리 죽으라고 하십시오. 목숨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공을 모시겠습니다.”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를 더 데울까요?”

벽리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벌써 두 시진째다.
아침에 시작된 지루한 침묵이 점심을 훌쩍 넘어 오후로 들어섰다.
점심때가 되었지만 점심상을 들여오지 못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구는 무릎을 꿇은 채 하명을 기다렸다.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돌아갈 수 없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그동안 종리추는 차를 넉 잔이나 마셨다. 국화를 한 장 그렸고, 글씨 연습도 했다.

‘문도로 들어섰으면 문성이 되었을 분….’

벽리군은 종리추가 갓 이십을 넘은 청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태산처럼 높은 거산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종리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텅 빈 한지를 앞에 놓고 묵상에 잠겨 있다.
글씨를 쓸 것인지, 그림을 그릴 것인지….
벼루에서는 짙게 갈린 먹물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붓을 잡았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휘갈겼다.

살문

획이 뚜렷하고 반듯하다.
기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먹물도 묻어 있어야 할 만큼 묻어 있을 뿐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명필이야!’

벽리군은 감탄했다.
그녀는 종리추가 ‘송영의 글씨’로 유명한 송영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알았다 해도 놀람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한동안 글씨를 들여다보던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여자를 평생 보호할 자신이 있나, 세상으로부터?”

“자신 있습니다.”

유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풋! 건방진 소리. 제 한 몸도 지키지 못하면서 누굴 보호하겠다고.”

“어느 놈이든….”

“내가 죽이겠다면?”

“….”

“후후후! 주종 관계를 떠나 무공 대 무공으로 맞선다면 몸을 지킬 자신은 있나?”

‘주종 관계?’

벽리군은 이들의 관계가 주종 관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도대체 종리추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

유구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마디만 하겠다. 이 중원에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인이 백 명도 넘는다.”

“그런!”

“믿어라.”

“….”

“넌 나도 이기지 못해. 그러면서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나? 숨어라. 숨을 수 있을 데까지.”

“주공… 주공!”

유구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종리추는 받아들였다. 조심에는 조심을 거듭하라는 말이 받아들였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축하한다. 중원 색시를 얻었으니.”

“주공!”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에만 해도 자욱하던 안개가 싹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나 역시 어린이 있는….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

종리추의 이런 결정은 살수계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태풍의 시초였다.
살수도 가정을 가질 수 있다. 살수도 사람이다라는. 또한 살문의 성격이 결정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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