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2화
822화. 모멸의 사원 (3)
절망이 한계치를 넘어서면 허무함의 끝에 도착한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고, 그저 다가오는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할 때에..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이다.
수리부엉이는 눈앞에 서 있는 두 명의 거대한 벽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운명을 곱씹었다.
・・・・・・ 전부 읽혔다.
어디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상대는 여기까지 모든 걸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엘더갓들과 접촉할 거라는 건 언제 눈치챈 거지?”
“처음부터.”
“처음부터라면, 50층 공략이 시작되었을 때를 뜻하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일부러 탈출하게 내버려 뒀을 때부터 말인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언젠가는 반드시 움직일 것이라는 대전제. 거기에 엘더갓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이런 장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어.”
고작 그런 정도가 아니다.
이 계획을 세운 것은.
“시련의 탑이 다시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이 만남은 필연적으로 계획되어 있었어. 강진혁과의 싸움을 위해서는 이 정도 대비는 해두지 않으면 안 되거든.”
“……!!”
수리부엉이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집념.
저 광기.
그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
“맞아. 네가 생각하는 게.”
남자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
볼 수 있으면서 볼 수 없던 진실이 드러났다.
천유성.
정확히는 지금의 천유성과는 다르다.
상상할 수 없는 세월과 경험을 머금은 외모를 하고 있었으니까.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과 몸에 난 여러 상처들은 그가 얼마나 혹독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종착역.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내던져야지만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이른 자였다.
“무슨 버그인진 몰라도 시련의 탑이 엔딩을 맞이한 후에도 계속해서 나는 탑에 남아 있었어.”
등반자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세계.
그 고독하고 공허한 전장에 버려졌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럴 성격도 아니었고,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어. 처음 몇 년은 말이야.”
발버둥 치고 올라갔다.
답습하고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연들을 찾으며 탑을 잘근잘근 곱씹어나갔다. 강진혁이라는 고인물의 말투와 생각과 사고방식과 행동패턴까지도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시간?
얼마나 걸렸는지 따위는 모른다.
이미 그런 관념 자체가 모두 사라져버린 신화의 영역을 걸어왔으니까.
[사망하셨습니다.]
죽는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는다.
[부활합니다! 1층으로 돌아갑니다.]
[사망하셨습니다.]
다시.
[부활합니다! 1층으로 돌아갑니다.]
[사망하셨습니다.]
다시.
[부활합니다! 1층으로 돌아갑니다.]
[사망하셨습니다.]
또다시.
트라이하고 또 트라이한다.
무한의 회귀를 반복하는 빌어먹을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보상도 없는 탑의 망령이 되어 모든 층계를 부유한다.
마모되고 닳아지며, 감정과 기억마저 뒤섞였을 무렵이 되어서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마저도 희미해져 가는, 그런 거지 같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시련의 탑 50층을 클리어했습니다.]
[진 엔딩 외에 3개의 서브 엔딩을 모두 달성했습니다.]
[탑에 존재하는 99%의 이스터 에그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에게 단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도달했다. 진혁과 같은 영역에.
아니, 그보다 더 어렵고 고차원적인 엔딩에.
-지금의 기억과 힘을 갖고 새로이 나타난 시련의 탑에… 강진혁과 같은 시간선을 공유하게 해다오.
천유성이 아닌, 천유성의 데이터로서 전장에 합류하는 것.
그것이 탑에 원한 요구였다.
그리고 탑은 그 요구를 들어줬다.
약간의 제약을 달긴 했지만, 거의 바라던 그대로를 이뤄준 것이다.
“그런 거였나. 그 터무니없는 정보력과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겠군. 헌데, 어째서지? 지금의 네놈이라면 진혁마저도 압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으음. 지금의 내가 이기는 건 약간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어.”
치트를 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승리를 위한 승리를 원했다면 이렇게 판을 짜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그런 걸로 끝낸다면 지금까지의 시간이 너무도 허망하다.
하지만, ‘현재’의 천유성은 다르지.
진혁과 같은 시간선 상을 달리는 라이벌이라면,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지표가 될 수 있었다.
“그 외의 것은 필요 없어.”
태고의 존재도. 50층도. 탑의 정복도. 기타 소원이라든가 보상이라든가 하는 껍데기뿐인 것도.
・・・전부 무가치하다.
과거의 천유성이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니.
“우리가 원하는 건.”
시련의 탑을 처음 플레이한 순간부터.
현실이 된 지금 이 시간까지.
오롯이.
오롯이 단 하나.
“다른 누구의 손이 아닌 우리의 손으로 놈을 꺾는 것뿐.”
최강의 자리에 오른 고인물을 넘어서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
그것이 천유성이라는 인간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방해하는 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아.”
이제 최종 무대가 갖춰져 간다.
어떤 식으로 피날레를 장식할지는 오래전부터 생각해놨다.
물론.
거기에 수리부엉이라는 운영자는 초대받지 못했다.
“적절한 상대야. 새로 얻은 무기에 첫 피맛을 보게 해주라고.”
“알겠다.”
스릉!
천유성이 검마의 검 ‘극’을 뽑아들었다.
눈이 시리게 빛나는 검광.
기존의 주인을 부활시켜 1:1로 베어내고, 그 능력을 고스란히 검에 봉인시켜두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건 진심이야.”
수리부엉이에게 실수가 있었다면 단 하나.
고른 게 천유성이 아닌 강진혁이었다는 것.
그것뿐이다.
[고유능력⋯⋯]
검이 노래를 부른다.
[‘검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서글프게.
***
“크하하하… 크읍.”
욱씬!
스스로의 힘에 취한 매버릭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생소하고 낯선 힘이 혈관에 과부하를 걸었기 때문.
줄기차게 범람하는 마력의 파도에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만 같았다.
역시, 익숙해지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편이었다.
애초에 슈브니구라스로부터 받은 최우선 명령은 적의 섬멸이 아닌, 시간을 끄는 것.
탑의 층계와 현대에 현현한 태고의 존재들이 마음껏 유린하도록 이곳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디… 천천히 오거라. 가장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매버릭의 몸이 순식간에 혈관들로 뒤덮였다.
“누구 마음대로.”
엘리스가 즉시 꼬챙이들을 꺼냈다.
“그렇게 두진 않겠습니다!”
테레사 역시 신성력으로 뒤덮인 검을 치켜들었다.
콰콰콰콰콰콰!
신성력과 꼬챙이가 혈관들을 꿰뚫었다.
하지만,
[미궁주가 최심부 ‘제물의 제단’으로 이동합니다!]
이미 늦었다.
매버릭이 이동한 게 간발의 차이로 더 빨랐다.
“쳇!”
“놓쳤어요.”
손맛이 느껴지지 않자, 엘리스와 테레사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마치, 폭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제야 비로소 멍하니 서 있는 플레이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버릭의 배신과 자신들이 온 곳에 대한 절망감까지. 모든 악조건이 연이어 겹치다 보니 그야말로 멘탈이 붕괴된 듯 보였다.
“괜찮으세요?”
테레사가 가장 먼저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갔다.
“테, 테레사 씨?”
“진짜다. 암스테르담의 성녀가 이곳에 있어.”
“우리처럼 매버릭에게 속으신 건가요?”
이곳에 모인 공격대는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모였다.
절반 이상은 매버릭과 함께 이동해왔지만, 다른 루트로 모멸의 신석을 받고 넘어온 이들도 있던 것이다.
“아뇨 저는….”
테레사가 말을 하려던 찰나 진혁이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세하게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쪽이 지닌 정보를 풀 이유는 없었으니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다른 루트를 통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건, 신석 사용자를 제외하곤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이들 뿐.
데스티아로부터 인류의 멸망을 한 차례 막은 언노운과 밀접한 관계라는 소문에 더욱더 힘이 실렸다.
“알겠습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면 굳이 더 묻지는 않을게요.”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당장 한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이곳에 온 플레이어는 총 50여명.
나름대로 선별된 정예들이긴 했으나, 50층이라는 생태계 앞에서는 호랑이 굴에 던져진 생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찮게 됐네.
당연히 사원 공력에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할…. 응?
속으로 혀를 차던 진혁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플레이어들이 허리춤에 저마다 특이한 것들을 차고 있었다.
[아파치 토템]
-50층 공략에 필요한 성유물 중 하나가 지급됩니다.
다른 것은 다 거짓이었지만, 적어도 저기에 적힌 건 거짓이 아니었다.
‘호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의 일방적인 저주에 가까운 성유물.
그 압도적인 디메리트를 상쇄할 수 있는 보상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개는 진혁마저도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종류였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같이 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늘었다.
이 사원의 끝에 있는 제물의 제단에 가면 저 아이템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까.
그 외에도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낼 만한 아이디어들이 여러 개 떠올랐다.
“크흠! 반갑습니다. 저는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저 매버릭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에게 호되게 낚여서 이곳에 오게 되었죠. 국적은 대한민국입니다.”
진혁의 표정이 180도 바뀌면서 영업자 모드로 바꿨다.
“한국?”
“예전에 유명했던 그 나라잖아요?”
유천영과 유연화 그리고 이태민이 주축으로 버티고 있는 동쪽의 작은 나라.
한때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위치에 있는 곳이다.
당연히 저 핵심 멤버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중요한 랭커가 없다는 뜻.
물론, 아까 전에 보여준 능력을 미루어보건데 상당한 실력자라는 건 맞겠지만, 정체불명의 플레이어보다는 검증된 테레사 쪽이 훨씬 더 중요했다. 테레사에겐 그동안 쌓아온 업적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테레사 씨.”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모두의 관심이 테레사에게 쏠렸다.
씁.
‘망각의 샘물’을 사용해서 잊혀진 게 이럴 때는 조금 답답하긴 하다.
뉴비 취급을 당하는 건 언제나 적응이 되질 않았으니.
그래도 테레사가 귀찮은 응대를 맡아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지.
“・・・・・ 주목받지 못해 많이 삐진 모양이구나 계약자.”
“하하.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이리 소외 당하는 걸 보는 건 또 신선하네요.’
엘리스와 페시스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삐지거나 하진 않아.”
그보다 어떤 식으로 사원을 공략해야할지가 관건이다.
핵심 전력 중 하나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 하게 됐기 때문.
아트리사와 갑옷 꿀벌들은 플레이어들이 넘어오는 시점에서 적절하게 몸을 감췄다. 괜히 몬스터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 진혁이 즉시 몸을 숨기라고 말을 건네줬었던 것.
-우리는 거리를 조금 두고 따라가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적절한 상황이 오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계획을 세우고 있는 바로 그때.
띠링!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모든 생각을 다시 해야만 하는 상태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