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63화
863화. 과거의 망령 (2)
화르륵!
검붉은 화염들이 연이어 퍼졌다.
상반신만 제외한다면 그 주위는 온통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무언가에 휩싸여 있다.
약 10m.
저 위에서 작은 미물들을 훑어보고 있는 탑의 망령이 키득거렸다.
“그래도 다들 이 시련의 탑에서 한 가닥씩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내가 가진 패를 보여줘야 공평하겠지?”
지금까지 뒤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던 흑막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개방했다.
[탑의 망령이 고유성창 ‘회차 계약’을 발동합니다!]
파츠츠
붉은 번개로 이어진 거대한 팔이 검은 구름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창을 꺼내왔다.
알고 있다.
뇌창 ‘아스트라페’.
제우스의 전용무구였다.
“이건 169회차에서 가지고 온 특이점이다. 그냥 제우스만 있는 게 아니라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권능까지 합성시킨 아스트라페지.”
단순히 성유물을 손에 넣거나 능력을 복사하는 게 아니다.
각 회차에서 일어난 특이점. 혹은 이상현상.
그것을 통째로 가져와서 사용할 수 있는 게 바로 ‘회차 계약’의 권능이었다.
[‘뒤섞인 아스트라페’가 회차의 계약으로부터 해방됩니다!]
투콰아앙!
포세이돈의 트라이던트에서 나온 물방울과 하데스의 명계의 불꽃. 거기에 제우스의 뇌창이 뒤섞여서 날아온다.
진혁 역시 ‘아스트라페’를 꺼냈지만 한 눈에 봐도 화력에서 상대가 되질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콰앙!
직선이 아닌 곡선 궤도로 날린 아스트라페가 뒤섞인 아스트라페의 측면을 강타했다.
파치치긱!
능력들이 뒤섞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퍼어엉!
공멸,
훨씬 더 약한 아스트라페가 뒤섞인 아스트라페와 동수를 이뤘다.
“제우스의 번개는 창의 앞쪽에 80% 이상의 마력이 모이는 특징이 있거든.”
당연히 측면은 번개의 위력이 훨씬 떨어진다.
제아무리 다른 신들의 능력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상쇄시킬 만큼은 안 되리라.
“169회차라고 해서 그 부분이 달라지진 않았나 보네.”
진혁이 다시 한 번 고인물 특유의 미소를 되찾았다.
분명 상황이 불리한 건 맞다.
허나.
절망적인 건 아니다.
상대 역시 전지전능한 건 아니었으니까.
“까불지 마라. 단순히 맛보기조차도 되지 않는 거였으니.”
과거의 망령이 진혁의 도발에 눈썹을 역팔자로 휘었다.
동시에.
[천마대멸겁 ‘구천지옥’이 개문됩니다!]
천마가 흑화해버려 탑의 40층까지를 모두 점령해버린 225회차.
[신살의 창 ‘롱기누스’에 태고의 염화가 발현됩니다!]
태고의 존재들에게 귀의한 미카엘이 모든 천사들을 죽이고 그 피로 롱기누스를 담금질한 301회차.
[초대 아타락시아의 순혈의 꼬챙이가 새로운 피를 원합니다!]
불로불사와 ‘포식’의 권능으로 무려 150,000명의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은 블러드메리 폰 아타락시아의 꼬챙이. 이번에는 무려 3개의 능력이 개방되었다.
같은 시각.
차원의 틈새를 두고 벌어지는 공방전은 상상 그 이상으로 격화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콰아아앙!
퍼퍼퍼퍼퍽!
피가 튀고 살이 잘려 나간다.
제히레테를 비롯한 엘더갓들의 합류로 인해 상황은 혼돈으로 빠져들었고. 때문에 1초마다 수백 명이 넘는 생명들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가고 있었다.
“건방진 엘더갓들 따위가 감히 우리 앞길을 막는 것이냐?”
“네놈들에게 잃어버린 땅들. 이번에 그걸 완전히 되찾고야 말겠다!”
어둠과 빛.
칠흑과 황금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엄청난 대군이 오염된 쇼거스들을 비롯한 심연포식자들과 초승달사제들을 상대하는 장면은 장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처음에 기세등등하게 밀어붙이던 것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전세가 이상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아우터갓들에게 패해 드림랜드로 도망간 세력들이 엘더갓들이었으니.
전체 전력의 격차는 아우터갓들이 훨씬 더 우위를 점할 수밖에.
기세를 끌어올린 초반에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이제는 상대의 처절한 반격에 박살 날 차례다.
“강진혁이 아자토스의 궁전을 날려버리는 데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냐? 우리라고 무한정 싸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도 몰라! 그냥 버텨달라고만 했어. 반드시!”
유연화가 태풍을 부르는 돌려차기로 10마리의 오염된 쇼거스들의 목을 꺾어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츳.
츠츳.
차원의 틈새 바로 인근에 공간이동이 이뤄졌다.
이곳의 모든 좌표는 모두 벨토르에 의해 관리되고 있을 터.
하지만, 그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누군가 아군의 심장부 안쪽에 나타났다.
“파훼법은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스이디크다.
게다가 그를 따르는 다수의 신격들도 함께 공간이동에 성공했다.
“저기가 그 차원의 틈새로군요.”
“버러지들이 꽤나 보입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다 치워라.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유연화가 품 안에서 검은색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진혁에게서 받은.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만 사용하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누나, 그거 맞아?”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 아니면 대체 언제가 최악인데? 저기 뚫리면 우리 다 죽어!”
“아니, 그건 그런데… 진혁이 형이 준 거면 아이템의 자세한 설명도 없이 쓰기엔 좀 많이 불안한데.”
“됐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퍼어어엉!
[‘공허의 녹색 불꽃’이 발동됩니다!]
하사신을 쓰러뜨리면서 보상으로 얻은 특수 아이템.
30초가량 상태 이상에 빠지게 만들 수 있었다. 아자토스나 요그소토스, 슈브니구라스 같은 최상위 신격들에게는 먹히지 않으나, 바로 그 아래. 심지어 니알라토텝 같은 고위 신격마저도
화르륵!
묘한 빛을 띤 초록색 아주 작은 불꽃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크읍?”
“쿨럭. 뭐, 뭐냐 이건.”
거침없이 다가오던 노스이디크와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이 비틀거렸다.
그나마 노스이디크만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뿐.
나머지 사냥개들은 그 자리에 선 채 정신을 잃었다.
[30초의 시간이 허락됩니다.]
30초라니!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딴 걸 쓸거면 말을 하고….”
“쓰란 말이…다.”
엘더갓들 역시 공허의 녹색 불꽃의 효과에 아주 제대로 휘말렸다.
50층의 지체 높은 이들이 사이좋게 헤롱거리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뜻.
“으음. 쉽지 않네.”
유연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누나는 바보야.”
이태민이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타이밍에 아군의 가장 큰 전력을 담당하는 이들마저 같이 무력화시켜버린 셈이다.
“괜찮아요. 저희가 남아 있으니까.”
‘혼령의 반지’를 착용한 5층의 보스 안드리아와.
“응. 우리가 다 합치면 엘더갓들 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어. 확률은 52.15%야.”
‘은사’를 다루며 불사의 인형군단을 지휘하는 프레이가 남은 마력을 불태웠다.
“모기기이이이!”
“미요오오오!”
“정령특전대! 전투모드로!”
“오오옷!”
“간다앗!”
“누가 많이 잡는지 나중에 결과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보상은 한 명이 다 먹는 거야.”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달그락. 우리 유령 기마대는 돌파에 초점을 맞춘다. 잡졸들은 됐으니 고위급만 노려라.”
콰콰콰콰콰콰콰! 고구마와 후라이드 그리고 정령수들을 비롯한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각자 맡은 위치에서 빛을 발했다.
엘더갓들이 없음에도 기대 그 이상의 전과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피해를 극대화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어야 해요!”
서리혼령의 빙계마법이 전장을 휩쓸었다.
얼어붙은 궁전이 소환되며 1,000마리가 넘는 오염된 쇼거스들이 서리 냉기로 인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기점을 시작으로 주위에 있던 다른 놈들의 몸마저도 서릿발에 서서히 잠식되어 나갔다.
“지원하겠소. 각자의 무구에 색(色)의 가호가 함께하길.”
7개의 색을 불어넣는 메드레이가 뒤를 서포팅했고.
“이렇게 쉬운 사격은 처음이군. 기껏해야 10초 정도밖에 남지 않긴 했지만.”
무한의 총알을 난사하는 사멸자가 도망가지 못하는 과녁들의 머리 한복판을 노렸다.
이게 마지막 총력전이다.
***
쿠쿠쿠쿠쿠···콰콰콰콰콰콰
‘천마대멸겁’으로 인해 생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그 폭심지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진혁이 더욱 속도를 올렸다.
탓!
“유성아!”
“알고 있다!”
천유성이 고함쳤다.
그 역시 날아온 신살의 창 롱기누스를 가까스로 쳐낸 상태였다.
하지만, 누적된 데미지 탓에 아까 전보다 팔의 각도가 조금 더 안 좋아 보였다.
‘지금 아니면 안돼.’
탓!
어느새 검은 운무를 넘어 과거의 망령이 있는 지척까지 도달했다.
큰 공격이 일어난 뒤에 생기는 공백.
확실히 처음보다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가시의 양과 속도가 훨씬 더 느려져 있었다.
“…거기에 휘말리고도 멀쩡하구나.”
과거의 망령이 양쪽에서 튀어나오는 진혁과 천유성을 바라봤다.
“템빨로 찍어누르는 것만 가지곤 안 되지.”
“이만 꺼져라. 내 썩어빠진 부분이여.”
가슴을 노리면 안 된다.
수많은 영웅들이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
강자를 죽일 때는 반드시 머리를 노려야만 한다.
푹!
서걱!
진혁의 여명의 검과 천유성의 극월이 머리를 종과 횡으로 갈랐다.
길고 긴 검은 피가 허공을 물들였다.
손맛은 확실히 좋았다.
그런데.
“과연, 이 정도인가. 그래도 조금 따끔하긴 하구나. 타이밍도 그렇고. 다 해서 30점 주지.”
즉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적은 죽지 않았다.
아니 죽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너무도 여유롭게 양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해! 이거 그냥 맞으면 죽는다!”
“크읍!”
모든 마력을 동원해 몸을 보호해야 한….
콰아아아앙!
과거의 망령의 손끝에서 나온 파동.
흰색과 검은색의 무늬는 태극(太極)의 형태를 이뤘다.
끔찍한 충격과 격통을 느끼며 몸이 왔던 곳까지 튕겨나갔다.
“계, 계약자! 괜찮은 것이냐!”
“진혁 씨!”
회복 중이던 엘리스와 테레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십자로 찢긴 가슴에서 제법 큰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괜찮긴 하니까. 그 붕대는 좀 치워줄래? 테레사 씨도 이 상처에 빨간약이 소용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치만 칭칭 감아야 피가 멎질 않느냐? 아니면, 기왕 버릴 거 짐이 좀 마셔도 되겠느냐? 상처 회복에 아주 그만일 것 같은데.”
“그・・・ 한국 군대 뷰튜버가 모든 약 중에 으뜸이 이거라고 했어요. 공장형 엘릭서라고 막 소개하던데. 정말이에요. 조회수 300만인가 넘는 거 스샷도 찍어놨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이상한 것 좀 그만 보라니까.
바로 그때
[‘초대 아타락시아의 순혈’이 발동됩니다!]
[‘끈적이는 혼돈’이 섞인 피는 대상에게 ‘감염’과 ‘신체 붕괴’를 일으킵니다!]
킥킥킥!
저 멀리 아름다우면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뜩이나 최악의 또라이이자 대량 학살자로 평가받는 아타락시아의 초대 가주에… 50층에서도 악명 높은 ‘끈적이는 혼돈’이 섞였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조합이다.
‘저걸 제대로 막으려면 나로는 비효율적이야.’
광역기인 데다 위력 또한 살벌하다.
그러니.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2개의 아이템을 꺼내 엘리스에게 던졌다.
‘망령나무의 낫’.
이제는 꽤나 과거가 되어버린. 엘리스를 공격했던 레비시타의 가주 ‘아비가일’이 사용하던 낫이다.
“이것들은….”
마찬가지로 자그마한 파란 달의 형태를 한 ‘블루문’ 역시 탑의 운영자이자 아타락시아의 권속이기도 했던 ‘벨루스’가 사용했던 고유무장이었다.
망령나무의 낫과 블루문을 받아든 엘리스가 깜짝 놀랐다.
“그 두 개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게 너야! 큰 게 올 테니까 무조건 막아줘. 나랑 유성이는 다시 한 번 놈에게 갈 테니까.”
“으…응!”
엘리스가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핏방울들이 회오리치며 망령나무의 낫을 휘감았다.
동시에.
어깨 위에 떠 있는 블루문이 눈부신 빛을 발하자, 핏방울 너머로 수많은 박쥐들이 나타났다.
“치치치칫!”
“치이잇!”
평범한 패밀리어들이 아니다.
쿠쿠쿠쿠쿠! 엘리스의 격을 대변하는 박쥐들은 50층으로 치자면 전원이 17성급 이상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서서히 강림하는 검은 혈액 덩어리.
이에 맞서.
“가거라. 짐의 권속들아.”
지상에 있는 엘리스가 ‘망령 나무의 낫’을 치켜들며 수많은 박쥐들을 위로 올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