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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76화


876화. 첫 번째 침식

치열한 경쟁 세계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엔… 솔직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래도 노력하면 결과는 늘 따라줬다.

모두가 선망하는 한국대 의대에 입학했으며 그 이후로도 탄탄한 엘리트 코스를 따라갔으니까. 그리고,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면서 강진혁이란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났을 땐,

생전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었다.

열등감과 좌절감.

분노와 혐오가 전신을 짓눌렀다.

마치, 지독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소금물을 퍼마시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텅 비고 공허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이게 행복인가.’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니, 그걸 넘어 너무나 만족스럽고 완벽한 하루하루였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훗. 나도 한 단계 성장한 거겠지.’

지금과 같은 마음이라면 그 빌어먹을 놈이 도발을 하더라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침식의 세계’에 소환되었습니다.]

“……?”

천유성이 달라진 시야를 보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방금 전까지 추혼사영과 함께 차를 마시며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건만.

어느새 주위는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야. 잘 지냈어? 이글루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너…!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침식의 세계가 뭔지 당장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천유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쉿! 쉬잇! 지, 진정하고 목소리 좀 낮춰. 여기 위험한 곳이라고.”

“말해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스릉.

반쯤 뽑힌 검.

설명을 잘해야 한다.

시작하기도 전에 죽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진혁이 열과 성을 다해 상황을 3줄로 요약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중요한 건 다 넣고 불리한 건 다 쳐낸 적절한 보고였다.

“…라는 이야기야.”

“그렇군.”

천유성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대문자 답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도 빨랐다.

“우선 직업이랑 능력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 이번 침식을 빠르게 끝내야지만, 2, 3번째 침식도 막을 수 있거든.”

“어떤 능력이 주어질지가 관건이긴 하겠군.”

주력인 검을 휘두를 순 있지만, 직업과 스킬이 없다면 본래 위력의 1/10도 발휘할 수 없을 터.

부디 좋은 게 걸리길 기도해야만 한다.

진혁과 천유성이 각기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을 조심스레 선택했다.

띠리리리링!

밝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많은 직업이 표시된 룰렛이 빠르게 회전했다.

속도도 속도인데, 중간중간 딜레이가 있는 데다 역방향으로도 움직여서 원하는 걸 고르는 게 불가능하다.

오롯이 감과 운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내가 쌓은 선행 스탯이라면 가능해.’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사원들을 대했고.

주말 등산이라든가 아침까지 이어지는 회식이라든가도 한 달에 8회 정도로 줄였다.

솔직히 갈구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지.

가브리엘이 지켜보고 있다면 에덴의 가호 몇 가지는 내려줬을 정도로 착해졌단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 이상한 직업이 나온다면 개종할 거다.

베리엘 교라든가.

이집트 신화 쪽으로 말이지.

[‘성기사’를 선택했습니다!]

[기본 아이템 ‘검’과 ‘방패’가 주어집니다.]

다행이다.

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뱀파이어들은 본래 암 속성의 성향을 가진 존재들.

성기사라면 상극에 존재하는 신의 사도들이었다.

“크흠. 나는 꽤 좋은 게 나왔어. 뭐, 평소 뿌린 대로 거둔 거니 당연한 일이지만.”

진혁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천유성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

천유성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거의 똥이라도 푸는 직업이 걸린 수준인데?

“왜, 뭘 골랐길래 그래?”

진혁이 굳어 있는 천유성에게 다가가 상태창을 살폈다.

고른 건 [무희].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과 춤사위로 아군에게 버프를 걸고 적에게 디버프를 거는 직업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경고하는데…”

“풉!”

“하지 말라고 했다!”

스릉!

검을 뽑은 천유성이 즉시 추혼검을 사용했다.

물론.

부웅!

느리고. 휘잉!

약하다.

전투 계열 스탯도 대폭 떨어졌는지 거의 유치원생 재롱잔치를 보는 기분이다.

감히 그런 주제에 대귀족 직업인 성기사에게 까불다니.

“우리 유성이. 이번엔 고블린이랑 싸워도 쉽지 않겠는데?”

진혁이 요리조리 검을 피하며 계속해서 천유성을 약올렸다.

“빌어먹을.”

“전투는 나에게 맡기고, 뒤에서 응원딜이나 열심히 넣어. 이번 침식은 이 형이 알아서 캐리해줄 테니까.” 

보여주마.

성기사란 직업이 어떤 힘을 가진 존재인지를.

빛이 있으라!

진혁이 당당하게 손을 위로 뻗었다.

엄청난 광휘와 빛줄기가 쏟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신앙심이 더럽게 부족하여 신성계열 능력의 효율이 0.1%로 재조정됩니다.]

피싯!

희미한 연기 한 줄이 떨어졌다.

작고 하찮고 심지어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

아니. 뭔가 좀 잘못됐는데?

이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신이 진노합니다.]

[암 성향이 극도로 높은 성기사가 무분별하게 신성력을 남발할 경우 ‘파문’당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저런 망언이 웬말이냐!

이 세계선의 신은 미쳐버린 게 틀림없었다.

“천벌이라는 게 존재하긴 존재하는 모양이군. 인과응보라는 거다.”

뭐라는 거야 얘는.

“너랑 나랑 같은 팀이거든.”

아무튼 이 조합.

미래가 없다.

망겜에서 망한 직업과 망한 동료와 함께다?

당장이라도 항복을 누르고 ‘다시하기’를 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다시 하기 따위라는 게 없다는 거겠지.’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니까.

침식의 세계에서 죽으면 그대로 무로 돌아갈 뿐이다.

블랙 캐슬의 알현실.

화려한 옥좌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진조가 앉아 있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역대 최강의 가주이며, 시련의 탑 중 무려 7개의 층계를 지배하는 절대자였다.

“엘리스 님.”

“고하라.”

“놈이 말한 대로 성채 내부에 침입자가 감지되었습니다.”

“인간 남성 두 명이더군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된 이상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타락시아 가문의 부가주 엑센시온과 데카서스 가문의 가주 아뮬람이 머리를 조아렸다.

엘리스의 눈썹이 씰룩였다.

“크하하! 말했지 않느냐, 나는 거짓말 따윈 하지 않는다!”

천둥의 군주.

토르가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처음 내 손으로 죽인 놈이 되살아났을 땐 무슨 장난질인지 의아했는데, 확실히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라면 말의 앞뒤가 맞겠지.” 

활활 타오르는 위그드라실과, 모조리 꼬챙이에 꿰뚫린 북유럽의 주신들.

엘리스는 층계 정복 전쟁을 하며 쓸어버린 신화의 말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내 묠니르는 돌려받아도 되는 건가?”

“그리하거라.”

엘리스가 허락하자 토르를 구속하던 혈계마법이 풀렸다.

토르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확실히 전력을 다 갖춘 뱀파이어들이 강력하긴 하군.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다. 지금 이곳에 잠입한 놈들도 결코 만만하지 않거든.”

“누가 왔든 상관없다. 블랙 캐슬에서 짐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도 그런 오만함을 가진 때가 있었지.”

“너희 따위와 짐의 군세를 비교하는 게 가당치도 않긴 하다만, 좋다. 그리 걱정이라면 짐의 수족 중 하나를 보내도록 하지.” 

엘리스가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을 불렀다.

“아비가일.”

“하명하십시오.”

“그대가 직접 쥐새끼들을 처리하거라. 감히 짐의 왕관을 노리는 멍청한 것들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을 안겨주어야 한다.”

“위대하신 가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레비시타 가문의 가주 아비가일이 망령 나무의 낫을 꺼냈다.

그렇게.

본격적인 사냥의 서막이 올랐다.

***

같은 시각.

[천유성이 스킬 ‘응원의 춤사위’를 발동합니다!]

열심히 제로투를 추고 있는 천유성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어때? 히, 힘이 좀 나는 것 같나?”

“음. 아직 좀 부족해. 이걸로는 턱도 없어.”

“제기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일단 이것부터 좀 써봐.”

진혁이 아이템 하나를 건넸다.

바니걸 복장에 토끼 귀까지 착용시키자 천유성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 이・・・ 이게 꼭 필요한 것이냐.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냔 말이다.”

“모름지기 무희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지.”

“차라리 그때 과거의 나와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응. 이미 늦었어.”

지옥 같은 시간이겠지만, 어쩌겠나?

이런 망캐릭터 두 개로는 도저히 공략할 방법이 보이질 않는데?

지금 수치심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를 신경 쓸 정도로 상황이 녹록지 않다.

막말로 이 조합으로 엘리스에게 덤빈다면 100전 100패가 확정이었으니까.

“자아. 준비하고 하나, 둘, 삼. 넷, 큐!”

“크윽.”

다시 한번 현란한 춤사위가 이어졌다.

[모든 스탯이 +2만큼 상승합니다!]

[마력 회복력이 +5%만큼 상승합니다!]

오오!!

된다.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희]라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컷트라인은 넘었다.

찰칵! 찰칵!

최대한 열심히 사진을 좀 찍어둬야지.

이걸 추혼사영에게 팔면 각종 영약과 보물들을 뽑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림이 아니더라도 이런 진귀한 사진과 영상들의 수요는 넘쳐났다. 예전에 메이드복 영상이 릭의 상단에서 올해의 BEST 5 안에 들기도 했었고. 그나저나.

‘쓰읍.’

아무리 콘셉트를 살리고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려고 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을 하는 수밖에.

진혁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유성아. 춤 그만 추고 움직일 준비 해.”

“허억. 허억. 훗. 네 기대보다 엄청나게 큰 버프가 들어간 모양이로군. 역시 내 재능은 춤의 영역마저 초월해버린 건가.”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직업이나 스탯빨이 안 되니 템빨로 가려고.”

“아이템을 구할 곳이 있다는 거냐?”

“한 군데 있긴 해.’

혈옥.

블랙 캐슬에 존재하는 엘리스의 비밀 창고로, 그 안에는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각종 흉흉한 성유물들과 금지된 아이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세계선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혈옥의 존재가 사라지진 않았을 터.

그곳에서 강력한 성유물을 얻는 게 이 망해버린 밸런스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진혁이 현재 위치를 통해 대략적인 혈옥의 위치를 추정했다.

‘구조가 완전히 똑같진 않네.’

그러나 상관없다.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 감추고자 하는 목적은 같을 테니까.

타다다다.

진혁과 천유성이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통로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5분 정도 얽히고설킨 미로를 통과했을 무렵.

“크르르.”

“컹! 컹!”

통로의 저편에서 사냥개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꼭꼭 숨어라. 쥐새끼들아.”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등줄기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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