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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80화


880화.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2)

스윽.

엘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가 서서히 커지면서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짐의 영역에서 이토록 시비를 거는 놈은.”

시련의 탑에서 거주하는 가장 호전적인 종족.

전쟁을 거듭하면서 강해진 뱀파이어를 건드는 세력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를 썼지.

“뭐. 나도 성깔 사납기로 우리 세계에서는 꽤 유명했거든.”

진혁이 어깨를 한껏 폈다.

“아, 물론 저기 저 친구도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놈이야. 지금 꼴이 저 모양이어서 믿기 힘들겠지만, 나름 세계관 최강자 중 한 명이라니까?” “제발 닥치고 집중이나 해라. 너는 저 마력이 느껴지지도 않는 거냐?”

천유성이 으르렁거리며 답했다.

얘는 칭찬을 해줘도 왜 저리 까칠한지 모르겠다.

“아뮬람. 줄리아드.”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짐이 직접 상대할 테니, 그대들은 나서지 마라.”

권유나 제안이 아닌 명령.

흥미와 투쟁심으로 타오르는 엘리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두 가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엘리스가 고유 능력 ‘블러드 로드’를 발동합니다!]

우우웅!

핏방울들이 겹겹이 쌓이며 파도를 이루었다.

“궁금하구나.”

엘리스의 입술에 핏빛이 맴돌았다.

“과연, 그대들이 몇 초나 버틸 수 있을지.”

스윽.

수백 개의 꼬챙이들이 날아왔다.

시그니처인 ‘블러드 레인’이다.

이거야 패턴만 꿰고 있으면 궤도를 읽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혈귀 궁수’가 ‘붉은 사선’을 발동합니다!]

처음 보는 놈들이 나왔다.

피로 만들어진 갑주를 입은 해골 궁수들이 기괴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파츠츠….

핏방울이 궤적을 새로 그렸다.

뭐지, 저 능력은?

‘탐식의 눈’이 빠르게 구조를 파악하려는 찰나.

콰아앙!

“……!!”

진혁의 몸이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괜찮냐!”

천유성이 고함을 질렀다.

“안… 괜찮아.”

어깨에 반쯤 박힌 화살을 뽑아낸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간에 몇 번의 가속이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패턴이라는 것이다.

‘자신감이 넘칠 만하네.’

이 정도면 본래 직업과 능력을 전부 다 사용할 수 있어도 그리 쉬운 싸움은 되지 못했을 거다.

그 정도로 지금 엘리스가 보여주고 있는 격은 차원이 달랐다.

‘평범한 공략법은 버린다.’

기존의 엘리스 보다 족히 2배는 더 강하다고 상정해야 한다.

“유성아. 버프와 디버프. 각각 사용할 수 있겠어?”

“가능은 한데, 이번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왜, 벌써 체력이 한계야?”

“체력이 아니라… 내 수치심이 한계다.”

반쯤 헐벗은 몸으로 하는 춤사위.

얼마 전까지 한 문파를 이끌며 모든 무림들에게 경외를 받던 검성에겐 너무나 가혹한 싸움이었다.

음. 충분히 이해는 한다만.

본래 영웅이란 대의를 위해 개인의 수치심을 희생해야 하는 존재.

“우리가 있던 세계와. 무엇보다 추혼사영을 위해서 네 한 몸. 불태워줘.”

“추혼…사영.”

천유성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자존심이나 긍지마저 잊게 할 정도로. 그에게도 이제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그래. 드디어 살얼음 위에 꽂힌 한 자루의 검 같은 놈에게도 ‘약점’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흐르는 땀과

번들거리는 피부.

“우오오오오!”

천유성이 정열을 불사르며 격한 춤을 추었다.

[무희의 고유 성창 ‘승천의 춤사위’가 발동됩니다!]

대상의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는 고유 성창.

기우제처럼. 이 춤은 특정한 신께 스스로를 헌납하는 고귀한 희생의식이었다.

물론, 이 경우엔 강해지게 하고 싶은 대상이 완전한 암성향인지라 신성을 모욕하고 마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신성계열의 신격들이 타락한 춤사위에 격노합니다!]

[신성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당연히 성기사에게 주어진 신성력은 추락하다 못해 마이너스로 바뀌어버렸다. 그러나.

오히려 그 부분이 진혁이 원하는 바였다.

[마신의 권능이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됩니다!]

[한계치를 넘어선 마기로 인해 마신의 고유 성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우우웅!

넘쳐나는 검은색 기운.

만약 이 춤을 가브리엘이나 테레사가 봤다면, 바벨탑이 무너지고 소돔과 고모라가 다시 한 번 불덩이에 집어삼켜졌을 거다. 그 외에도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침을 뱉고 저주를 퍼부었을 정도로. 춤은 퇴폐적이고 더러웠다.

“기억할게.”

진혁이 한쪽 기둥을 잡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하고 있는 천유성을 잘 찍어뒀다.

“두 눈이 썩는 것만 같구나. 혹여 뭐라도 보여줄까 말미를 허락했건만, 결국 인간이란 놈들은 이런 식인 건가.”

엘리스가 진저리를 치며 재차 공격을 이어가려 했다.

그런데.

혈귀들이 활을 쏘는 게 엄청나게 느려졌다.

얼핏 봐도 80% 이상 떨어진 속도.

[칠죄종 ‘나태의 대죄’가 펼쳐집니다!]

“다시는 우리 유성이를 무시하지 마라.”

이제부터 반격의 시간이다.

***

불타오르는 야자수와 말라버린 오아시스.

부서진 피라미드 사이로 머리를 잃은 스핑크스가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쩌저적.

“끄으으… 모, 모른다.”

악어의 머리를 한 이집트의 하급 신이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들뿐이로군요.”

니알라토텝이 혀를 찼다.

침식하는 모래의 첫 번째 특성을 이용해 강진혁과 천유성이란 골칫거리들의 발을 묶어두고. 두 번째 특성인 ‘이면 세계의 백화(白花)’를 개화하여 적의 주력을 불러 모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정말로 완벽하고 순조로웠지만,

정작 최종 목적인 ‘금서’를 찾는 것에는 진척이 없었다.

‘성유물을 봉인하여 감추는 데 특화된 게 이집트라서 ・・・ 당연히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이렇다 할 단서 하나 나오지 않았다.

십이지 쪽인가? 아니면 에덴이나 마계 쪽?

엘리스가 머무는 블랙 캐슬도 찾아보긴 해야 한다.

일전에 겉핥기식으로 둘러보긴 했었으나, 구석구석 확인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래서야 한세월이 걸리겠군요.’

역시 정보를 아는 자를 잡아서 심문하는 게 가장 빨랐다.

강진혁이야 워낙 끊임없는 변수를 만들어내는 자라 논외로 치고.

그렇다면 남은 건….

‘운영자들’

놈들이라면 금서가 보관되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최선책으로는 릭을 제외하고 아는 게 가장 많은 수리부엉이, 차선책으로는 일전에도 정신적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JJ나 1인2닭이 베스트다.

콰득!

“케엑!”

단숨에 악어의 목뼈를 부러뜨린 니알라토텝이 옆에 있는 오딘을 바라봤다.

“첫 번째 침식은 어떻게 되고 있죠?”

“엘리스와의 전투가 조금 전에 막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면 참 재밌었을 텐데, 다른 세계선의 일이라는 게 아쉽군요.’

“니알라토 님께서 계시는 이상 이 세계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겁니다.”

“후후! 감옥에 갇혀 있더니 입바른 소리를 하는 솜씨가 많이 늘었군요. 오딘.”

“은혜를 갚고자 할 뿐입니다. 또한.”

오딘의 눈에 강한 분노가 서렸다.

“당한 만큼 갚아줘야죠.”

꿀꿀이 죽이나 먹으면서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세월.

온갖 모욕과 핍박을 받은 건 죽어서도 잊지 못한다.

***

일곱 개의 지옥.

각각의 대죄를 상징하는 마신의 권능은 지금까지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쿠쿠쿠쿠!

‘나태의 대죄’에 이어 ‘탐욕의 대죄’가 발동되었다.

순간, 엘리스가 펼쳐둔 핏방울들이 역으로 진혁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무슨…!?”

엘리스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권역에 영향력을 끼친 이는 전무했으니까.

그것도 ‘블랙 캐슬’이라는 거점의 가호를 받고 있는 중 아니던가? 어떠한 주신이 오더라도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는 그리 생각했었다.

“크크크하하하!”

진혁이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와 마신의 권능.

두 개의 시너지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오만의 대죄 – ‘약자멸시(弱視)’가 발동됩니다!]

진혁이 검보라빛 기운이 가득 실린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사선으로 그었다.

파츳!

너무도 깔끔한 검격.

공간을 그대로 도려내는 오만의 일검이 엘리스에게 향했다.

그러나.

쏴아아아.

힘에 부쳐 나오는 신음 소리나. 공격에 당해 나오는 비명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등 뒤로 떠오른 붉은색 고리.

한 쌍의 날개.

그래.

드디어 엘리스도 전력을 다 발휘하기 시작하는 거구나.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가 고유 성창 ‘개벽의 계시록’을 발동합니다!]

가끔 상상하곤 했다.

저 엄청난 고유 성창을 지닌 엘리스를 적으로 마주한다면 어떠한 기분일지. 적의 시선에서 저 천재지변과 같은 힘을 마주한다면 얼마나 절망적일지를 그 상상에 대한 대답이 지금 눈앞에 있다.

-침식을 막으려면 엘리스를 죽이거나 ‘순혈의 왕관’을 확보해야 한다.

그 대전제는 이미 알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저 초월자를 상대로 힘을 조절하면서 싸운다는 게?

“죽어라.”

엘리스가 ‘드라큘라의 마창’을 직접 손에 쥐었다.

추진체 따위는 필요 없다.

넘치는 마력이 그녀의 뒤를 보좌하고 있었으니까.

파아앙!

수십 개의 소닉붐이 만들어지며 마창이 진혁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저기에 그냥 맞았다간 갑주고 나발이고 간에 즉사다.

[‘나태의 대죄’가 대상의 위력과 속도를 대폭 감소시킵니다!]

투콰아앙!

절반 가까이 감소한 파괴력.

“큭!”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암흑투기로 만들어낸 방패가 박살이 나버렸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거대한 낫을 든 혈귀가 진혁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질투의 대죄’가 대상의 본성을 뒤틉니다!]

“끼이이….”

“끼긱!”

활을 든 혈귀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퍼퍼퍼퍽!

“케에에에!”

낫을 든 혈귀가 수십 개의 화살에 꿰뚫렸다.

동시에 남은 혈귀들을 이용해 엘리스에게도 화살을 발사했다.

콰콰콰쾅!

엘리스가 거대한 붉은 손을 소환해 화살들을 모조리 우그러뜨렸다.

“타락한 성기사의 갑주를 이렇게나 잘 다루다니. 네놈. 설마, 인간이 아니라 차기 마신인 것이냐?”

“아니라고!”

저 녀석은 진짜 남편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나중에 바가지 제대로 긁어줄 거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아뮬람과 줄리아드가 엘리스의 명을 어기고 천유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아! 나, 난 무희다. 비전투원이란 말이다!”

천유성이 열과 성을 다해 춤을 추면서도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저 변태만 죽이면 엘리스님의 전투가 훨씬 더 편해진다!”

“두 번 다시 더러운 춤을 추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시각적으로 역겨움을 자아내 디버프를 만들어내고. 반대로 아군에게는 땀냄새 물씬 풍기는 춤으로써 각종 버프를 건다. 천유성은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전력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 한눈팔지 말고. 오롯이 짐에게 집중해라.”

엘리스가 천유성을 구하는 걸 허락할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다.

일곱 대죄 중 오직 반려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죄악을 사용할 때다.

[음욕의 대죄가 대상을 유혹합니다.]

세계선을 초월한 플러팅.

“훗! 거기 예쁜이. 오늘 밤에 오빠랑 넷플릭스 볼래?”

이게 최후의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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