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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86화


비성유검은 이중인격자다.

그는 낮에는 인의대협이지만 밤이 되면 색한으로 돌변했다.

몇 년째 계속되는 흉년에는 쌀을 아낌없이 풀었다. 제방이 무너질 때는 마을 사람들을 독려하여 제방을 쌓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얼른 받아 들었다.

그를 두고 욕하는 사람은 몰매를 맞는다.

비성유검은 살아 있는 성인이다.

그러나 그는 성적인 면에서 유별나 강간을 즐긴다. 청루에 있는 여자나 정상적인 관계는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강제로 겁탈하는 여자에게서만 쾌락을 느낀다. 남녀 간의 관계보다는 여자를 강제로 갖는 과정을 즐기는 거다.

하지만 그에게 당한 여자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다. 세상 그 누구도 직접 당한 사람이 아니면 오히려 당한 여자를 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여자는 사실을 폭로했다가 화냥년 취급을 받고 견디다 못해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명분을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성유검은 하남 무림에서는 알아주는 정인군자입니다.”

“만들어.”

종리추는 아주 쉽게 말했다.

“예?”

“비성유검의 무공이 뭔가?”

“본 사람이 없습니다. 비성유검의 무공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무공은 뛰어난가 보군.”

“굉장히 뛰어납니다.”

“비성유검에게 당한 여자들은 수소문할 수 있나?”

“모두 쉬쉬하는 바람에…”

“천만에! 그런 소문일수록 빨리 나는 법이지. 소문을 추적해 보면 몇 명쯤은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찾아.”

“찾아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 상세히 알아와. 족보를 만들어. 강간 족보.”

세상에 유례없는 강간 족보가 만들어졌다.

살문 외장 식객들을 총동원하여 만든 족보에는 단지 네 명만 기재되어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더 이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약속한 날짜도 내일로 다가왔고… 청부를 뒤로 미루든가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신용은 생명이야.”

“그럼…?”

“여기다 한 서른 명쯤 집어넣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여인들로. 날짜를 잘 파악해야 해. 명절이 끼어 있거나 집안 식솔들 생일이나 제사가 있는 날은 그에 맞춰야겠지.”

종리추는 백일 연공을 계속했다.

실전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가상으로 싸우는 것보다 실전에서 수련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는 살문에 연락해서 바뀌는 장소를 십 일 단위로 알렸다.

청부가 들어오면 사람을 보내라고.

살수행을 하면서 백일 연공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이건 중원 사정에 밝은 후사, 네가 해.”

종리추는 긴 별호 대신 앞에 두 자만 불렀다. 살수들은 못내 불만스러워했지만.

“가짜를 만들라는 말씀?”

종리추는 족보를 두들겼다.

“여기 적힌 네 명, 그들만으로도 비성유검은 죽어도 싸.”

후사도가 만든 책자를 읽어보면 분노가 하늘까지 치밀었다.

세상에 이런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강간에, 살인에, 임신한 여인부터 동녀까지 건드리지 않은 여인이 없었다.

“후사, 이거 네 경험 아냐?”

“주공, 무슨 말씀을 그리 심하게 하십니까?”

살수들은 남만 세 사내를 따라 종리추를 문주 대신 주공이라고 불렀다.

“음양.”

“주공, 제발 음양철극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은 별호 놔두고 음양이 뭡니까, 음양이.”

“좋아, 철극. 너는 이걸 비성유검 집무실에 갖다 놔. 아주 은밀한 곳에 잘 숨겨야 돼, 영원히 발각되지 않을 장소에.”

“끄응! 철극이라니… 그래도 음양보다는 낫네요. 그런데 영원히 말입니까?”

“세상에 비밀이란 없지. 꼭꼭 숨겨놔도 반드시 찾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살행은 오늘 저녁에 한다. 모두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이번 싸움은 어떤 싸움이 될 것 같나?”

좌리살검이 즉시 대답했다.

“과전입니다.”

“좋아. 또?”

“이전입니다.”

구류검수가 대답했다.

그는 열한 번째 전각의 주인인 화산파의 매화검수다. 별호는 바꾸었지만 화산파에서부터 들은 말이 있어 검수라는 말은 버리지 못했다.

“이전은 이익으로 적을 유인해 내는 거다. 과전은 시기와 지리를 얻은 다음 싸우는 거지. 어떤 방법이 좋을 것 같나?”

좌리살검이 대답했다.

“과전보다는 이전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내가 왜 이전을 생각 못 했지?”

“그럼 결정됐다. 비성유검은 구류가 맡아.”

“주공, 구류가 아니고 구류검수인데… 그렇다고 검수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구류검수는 청루의 여인을 샀다.

“다른 데서 할 거예요?”

“아니, 산책만 하자.”

“산책이요?”

“너는 옛 여자와 닮았어.”

‘사내들이란 그저… 그럼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까불지 마.’

“어멋! 정말요?”

“오늘 밤만 애인이 돼줄래?”

“그럼요. 셈도 벌써 치렀는데.”

“화장 지우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그럼요. 대신 산책이 끝난 다음에는 몇 냥 더 얹어줘야 해요? 밤 공기가 피부에 얼마나 안 좋다고요.”

“걱정하지 마.”

“미리 주면 좋은데…”

구류검수는 닷 냥을 쥐어주었다.

“산책이 끝나면 닷 냥 더 주지.”

기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놈이지 않은가.

화장을 지우고 여염집 여자나 입는 냄새나는 옷을 입게 하더니 밤길을 혼자 거닐란다. 자신은 몰래 숨어서 지켜보겠다고. 전에도 그랬다면서.

‘그래, 미쳤거나 말거나 밤길 한번 걷는 데 열 냥이면 그게 어디야?’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밤길을 걸었다.

아성촌을 지나 대숲이 나왔다.

미친놈은 대숲을 지나 조그만 다리까지 갔다 돌아오면 된다고 했다.

밤길을 혼자 거니는 것이 좀 무섭기는 했지만 돈을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미친놈이 따라오기는 하는 거야?’

기녀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마지막 말이 생각나서 참았다.

“어떤 경우에도 두리번거리거나 찾으면 안 돼. 그랬다가는 닷 냥은 없을 줄 알아.”

대숲을 막 지날 무렵, 앞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어멋!”

기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둠 속에서 괴물체가 불쑥 튀어나오는데 놀라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으랴.

“흐흐흐…..!”

사내는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미친놈, 별짓 다 하네.’

기녀는 짐짓 놀란 체했다.

“어멋! 누구세요?”

“네 서방.”

‘웃기고 자빠졌네.’

“서, 서방이라뇨? 누구세요?!”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기녀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적당한 곳에서 쓰러질 준비를 하면서.

기녀는 사내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서야 낯선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응? 이 새끼는 또 누구야? 별 볼 일 없는 놈팽이잖아? 어떻게 밤길 가는 여자나 지분거려 보려는 치사한 짓거리를 해대서야.’

기녀는 도망가려고 했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기일망정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몸을 주기는 싫었다.

“흐흐흐! 어딜 도망가려고!”

사내는 귀신처럼 움직였다.

분명히 앞에 있었는데 어느새 뒤로 돌아가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아프게.

“아얏!”

비명이 절로 새어 나왔다.

‘뭐, 뭐야! 무공? 무인이야? 오늘 재수 옴 붙은 것 아냐?’

기녀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내에게 들려 대숲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 이러지 말아요! 제발… 절 따라오는 사람이 있단 말예요. 그 사람은 무공도 익혔어요.”

“그래? 흐흐흐! 괜찮아. 앙탈 그만 부려.”

“놓으란 말야, 새끼야!”

“흐흐흐! 재미있는 계집이네. 좋아, 그렇게 반항해야 재미가 있지.”

사내는 귀싸대기부터 후려갈겼다.

쫘악!

기녀는 반항할 생각을 포기했다. 이놈은 정말 미친놈이다. 이런 놈에게는 반항하면 할수록 두들겨 맞는다.

치마가 끌러지고 가슴이 출렁 튀어나왔다.

그때 기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내의 양물이 하복부를 파고드는 찰나 사내의 등 뒤에 또 한 놈, 미친놈이 어른거렸다.

“헉!”

기녀는 습관적으로 헛바람을 토해냈다.

사내들은 그럴 때를 가장 좋아한다. 순간,

쉬익!

검풍이 일었다.

종리추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달빛을 쳐다봤다.

살문 살수들은 모르지만 그는 지금 큰 도박을 시작했다.

비성유검이 있는 곳은 개봉부가 아니라 남양부다.

개봉부라면 살천문이 눈감아줄 수도 있고, 그래 왔지만 남양부까지 손댄다면 정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비성유검의 살수를 청부한 자는 살천문도 찾아갔을 게다.

살천문은 당연히 거절한다.

돈 천 냥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비성유검 같은 고수를 살해하는 대가치고는 너무 적다.

비성유검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살천문은 당장 살문을 의심하리라.

‘전면전이 될 수도 있어. 이제 겨우 오십 전밖에 수련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순리라면 싸우면서 커야겠지.’

살천문과의 싸움은 예정된 수순이다.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상존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살천문주의 말을 떠올렸다.

‘목숨을 구해달라고 했어. 그때가 언제일까? 왜 그런 소리를 했지? 그러고 보니 소림 방장도 살천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같은 살수 문파이니 한마디쯤 꺼냈음 직한데…. 음! 무언가 있군.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정말 살천문은 너무 조용했다. 살문이 마음껏 휘젓고 다니도록 안방을 내주고 있다. 이런 살천문이 아닌데. 아무리 살천문주와 밀약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살천 문주조차도 어쩔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있는데.

‘알아야 돼.’

종리추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생각을 안 했을 때는 모르지만 생각이 미친 이상 궁금한 것은 풀어야 한다.

‘날이 밝는 대로 살문으로 돌아가야겠군. 지금은 백전이 중요한 게 아냐.’

백전을 치르면서 가장 큰 효과는 살문 살수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문을 위해서 싸우고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달빛은 너무 밝았다.

이 밤, 또 한 생명이 검빛에 스러지고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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