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9화
십사전각에는 살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시중들어 줄 사람으로 들어왔던 시녀, 하인… 그들의 숫자만 해도 전각마다 십여 명은 된다.
종리추가 십사각주를 데리고 외유하며 백전을 수련하는 동안 벽리군은 하인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하오문 배수들 중에서 손이 빠르기로 유명하다는 등천조, 소매치기 중에서 훔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진무동. 그들이 사부다. 물론 소매치기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인심이다.
전각 주인인 살수가 살행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 가르쳤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눈을 속이는 방법, 여러 명이 한 명을 바보로 만드는 방법… 모두 일상사에서 한두 번쯤은 겪었을 일들이지만 체계적으로 몸에 완전히 붙을 때까지 반복 연습을 시켰다. 인간이 항상 긴장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긴장도가 지극히 높은 사람은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하고, 안이한 사람은 또 그런 점을 이용하고. 속임수는 잠깐의 허점에서 풀려진다.
십사전각에 배치된 시녀, 하인들은 외장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몸이 날래고 똑똑하다. 처음 하인을 받아들일 때부터 오늘 일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그들은 한지에 먹물이 스며들듯 등천조와 진무동의 본전을 뽑아 먹었다. 그들 백오십여 명이 대청에 모였다. 넓은 대청에 사람이 가득했지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기침 소리는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모두 서 있는데 혼자만 앉아 있는 사람, 살문 문주인 종리추의 움직임 없는 모습에서 알지 못할 긴장이 스며 나와 숨도 쉴 수 없었다.
‘이것이 문주의 진정한 위용… 아! 나는 문주를 너무 모르고 있었어. 나는 문주의 상대가 안 돼!’
사각 각주인 쌍구광살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하인, 시녀들과 함께 불려온 십사각 각주들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창백했다. 종리추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달랐다. 너무 조용하고 침착했다. 평소에도 하루 온종일 입을 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뭔가 달라 보인다.
‘눈이 달라. 눈빛이 바뀌었어.’
그렇다. 종리추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편안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활활 타오른다. 유구, 유회, 역석은 이런 눈빛을 했다. 아니, 많다. 남만에 있을 때 종리추는 항상 이런 눈빛을 했다. 무언가에 열중할 때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이제는 명확히 알겠지만…’
종리추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습은 차분하지만 강한 힘이 실린 어조다.
“우리는 살수 문파다.”
“이 중에는 목숨이 아까운 사람도 있을 게다. 가도 좋다.”
전례에 없는 말이 떨어졌다. 대체로 살수 문파는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 하인이든 시녀든, 살수 문파를 알았든 몰랐든 간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뼈를 묻어야 한다.
“갈 사람은 가도 좋다. 약속하지만 어떤 보복도 하지 않겠다.”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종리추가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수 문파는 약속 어기는 것을 밥 먹듯 해왔으니까.
“돌아갈 사람은 오늘 중으로 돌아가라. 오늘 자정이 넘으면 정말 돌아가지 못한다. 남는 사람은 살문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한다. 등을 돌린 자에 대한 살수 문파의 보복은 잔인하다. 본인은 물론 본인과 관계된 모든 사람은 죽여 버린다. 부모, 처, 사촌… 한 명이라도 등을 돌리면 최소한 서른 명 이상 목숨을 잃는다.
“총관.”
“예.”
벽리군이 다소곳이 대답했다.
“문을 활짝 열어놔. 갈 사람은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배웅을 할 필요도 없어. 그것조차 부담스러울 테니까. 떠날 사람은 소리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 줘.”
“네.”
“그동안 수고한 삯은 전낭에 넣어서 대문에 놔둬.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집어서 나갈 수 있겠끔.”
“알겠습니다.”
“외장에도 통보해. 갈 사람은 가도 좋다고. 총관이 알아서 보내. 편히 갈 수 있도록.”
“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종리추의 의사는 확실했다. 그리고 그동안 지켜봐 온 문주의 성품상 떠나는 사람에게 보복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살문 역시 살수 문파 중 하나라고 하지만.
“갈래?”
“글쎄…”
“삯을 넉넉히 넣어놨다고 하더라고.”
“문주님이 신경 썼으면 그럴 거야.”
“제길! 이거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자니 반겨줄 사람도 없고, 남자니 죽을 것 같고.”
“죽을 것 같지?”
“살수 문파에 몸을 담고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
하인들, 시녀들…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의사를 묻기에 분분했다. 개중에는 혼자 앉아 생각을 골몰하는 사람도 있었다.
벽리군은 지시대로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형식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들어올 적에 적어 놓았던 개인 기록도 가져갈 수 있도록 펼쳐 놓았다. 십사전각 각주들은 지하 밀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대청에서 약조한 대로 편안히 떠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줬다.
“난 남기로 했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가봤자 밭 한 뙈기도 없는데 빌어먹기 딱 알맞지. 죽을 땐 죽더라도 여기서 죽으면 식솔들은 편안할 것 아냐.”
“열 받았군.”
“꼭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우리야 검을 쓸 수 있어, 발길질을 할 수 있어. 기껏해야 입 놀리고 눈치 보는 것뿐인데… 갈 테면 가. 난 남을 거야.”
남는 자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외장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아. 가만히 있다가 오늘 갑자기 떠날 사람은 떠나도 좋다고 말한 것이나… 난 갈래.”
떠나는 자.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렵다. 한 명이 기록이 적힌 종이와 전낭을 움켜잡고 정문을 나서자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대문을 나섰다. 그들의 수는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외장은 훨씬 많아서 거의 칠 할에 이르는 사람들이 대문을 나섰다.
유구가 전각에 들어섰을 때 그를 반기는 사람은 시녀 한 명과 하인 네 명뿐이었다. 시녀 중에는 네 명이, 하인은 한 명이 짐을 꾸렸다. 딱 절반이다.
“너희는 이제 하인이 아니다.”
유구는 종리추가 일러준 말을 옮겼다.
“…”
“너희는 이제 내 피붙이야. 살문이 그랬듯 우리 여섯 명이 한 문파를 만드는 거야. 문파 명은 제일각. 이 전각이 제일각의 총단이야.”
“하하! 재미있네요.”
유구는 웃지 않았다.
“오늘부터 우리는 한 몸이 되어야 해. 같이 울고 같이 웃어. 살행도 같이 나가고 쉴 때도 같이 쉬어. 동고동락,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거야.”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시녀와 하인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자, 오늘은 늦었으니 돌아가서 푹 쉬어. 우린 내일 떠날 거야.”
“저도 같이 가요.”
유구는 백치나 다름없던 아내를 쳐다보았다.
“살수의 아내이고 당신이 제일각 각주이니 저도 문도가 되죠.”
“당신은…”
“이래 봬도 쓸모가 많을 거예요. 당신은 서민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알지만 대갓집은 모르잖아요. 전 대갓집에서 살았어요. 잘 알고 있죠.”
유구는 아내가 몸에 이어 마음까지 열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
“원지에요.”
“…”
“정원지. 제 이름이에요.”
“아! 이름이 참 곱네.”
“고와요? 풋! 사내 이름 같아서 말하기 싫은 이름인데.”
“아니, 고와. 참 예뻐.”
“서른다섯 살이에요.”
“나, 난 마흔하나.”
그들은 만난 지 일 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서로를 알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이 닿기만 해도 질겁을 하던 여자. 이제는 스스로 이름도 밝혔다. 그리고… 유구의 가슴에 살며시 기대왔다.
“두 남편을 섬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신, 한번 믿어볼게요. 더 나빠질 것도 없지만 상처받기 싫어요.”
유구는 꼭 끌어안았다.
암연족은 아내와 밀어를 나누지 않는다. 여인들은 사내가 원하는 대로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안다 해도 벅차게 끓어오르는 가슴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혹여 말을 번복이라도 할까 봐 꼭 끌어안기만 했다.
십사전각이 텅 비었다.
각주들은 각기 문도들을 데리고 온다 간다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떠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다. 언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살문은 외장, 내원 할 것 없이 찬바람만 쓸쓸하게 불었다. 어제 아침만 해도 사람이 북적거렸는데, 이제는 사람 구경을 하기가 힘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확실한데 너무 조용해. 이게 무슨 괴변이지? 아니면 우리가 정보를 얻어 들이지 못하는 거야. 움직임은 분명히 있어. 잡지 못할 뿐.”
벽리군은 속속 들어오는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주목할 만한 상황은 접하지 못했다. 종리추에게 무엇인가 보고를 해 줘야 할 텐데,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인데 할 말이 없었다.
“하하! 그렇게 종이 뭉치 속에 파묻혀 살다가는 머리에 쥐날 것 같은데?”
벽리군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종리추다. 그가 벽리군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어서 오세요.”
“총관의 집무실 답군. 여기 오면 언제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어.”
“아침마다 나무를 태우거든요.”
“나무?”
“작약나무를 태우죠. 향이 아주 좋아요.”
“그렇군.”
종리추는 의자에 앉아 벽리군이 들여다보는 서신을 살펴보았다. 그의 등 뒤에 모진아가 공손히 시립해 섰다.
종리추와 모진아가 같이 움직이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 종리추는 그동안 적지인살 등을 살문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살문과 연관된 일에는 철저히 배제시켜 왔다.
종리추가 서신을 살펴보는 동안 벽리군은 흐뭇한 마음으로 차를 끓였다. 천화기루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는 종리추의 모든 수발을 그녀 혼자 들었었다. 차를 끓이는 것은 물론 방을 청소하는 일까지 손수 했다. 종리추에 관한 모든 것은 그녀가 직접 나서서 했다.
하오문 향주라는 직책은 내세울 만한 직위는 아니지만 궂은일을 할 정도는 아니다. 더군다나 웃음을 팔고 사는 기문 향주쯤 되면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이 없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다. 종리추를 위해 하는 일이었기에.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정보가 너무 많군.”
“쓸 만한 정보는 별로 없어요.”
“혼자서 다 할 생각은 하지 마.”
“…”
“진짜 유능한 사람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일 잘하는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이지.”
“풋! 그건 문주님 일이잖아요.”
“무인이 아니더라도 무림 정세에 밝은 자들이 있어. 무림 정세에는 밝지 못해도 무인들의 면면을 꿰뚫고 있는 자도 있고. 그런 자들을 물색해 봐. 현재 무림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글 한 줄 읽고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어야 돼. 정보를 분류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결국 머리가 뛰어난 자를 말한다. 그것도 천재, 수재 소리를 한 번은 들었음 직한 사람들.
“현재 우리 살문에서 정보를 분류하는 사람들은 무림 정세에는 밝지만 정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이 속에는 많은 알맹이가 있지만 모두 흘려보내고 있어. 나갔다 오는 동안 구방을 이십 명으로 늘려놔.”
천재 열 명을 더 들여오라는 소리다. 어제저녁에 살문에 뼈를 묻지 않을 사람을 모두 내보냈으니,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그런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살문에 뼈를 묻을 사람만 받아들여야 한다. 천재 열 명씩이나…
“할 수 있어요.”
벽리군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을 간단히 대답했다.
“구방은 말 그대로 거북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해. 세상이 무너져도, 살문이 완전히 멸살되어도 구방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아야 돼. 그것이 나를 살리는 최후의 탈출구야.”
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지만 벽리군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정보를 분류하는 구방의 존재를 숨기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찻물이 향긋하게 우러나왔다.
“나도 나가봐야겠어. 살문이 텅 비겠어. 기습 같은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살천문은 제 앞가림하기에도 정신없을 테니까. 처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여기 모진아에게 부탁하고.”
종리추는 ‘부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적지인살 일행이 살문에 와 있지만 살문과는 전혀 별개의 사람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짚은 것이다.
“모진아의 무공은 어느 정도죠?”
벽리군은 진작부터 묻고 싶었다. 적지인살이 실패를 모르는 살수였다는 것은 알지만 대거혈을 손상당해 무공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안다. 배금향의 무공은 오히려 자신보다도 못하다. 그녀는 무공으로 향주 직을 맡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수족처럼 다룰 줄 알기에 맡았다. 하오문의 기사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어린의 무공은 보잘것없다. 이제 막 입문을 한 듯하며 성취는 빠르지만 주목할 정도는 아니다. 어린의 어머니 구맥은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여자이며, 그들 모녀의 수발을 들고 있는 비부라는 사내는 제법 근골이 다부지지만 역시 무공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 가족은 칼바람 속에 내몰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사람들 같다.
오직 한 명, 모진아만이 시선을 끈다. 모진아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떠돌지만 이들 가족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모진아부터 제거해야 되리라.
‘그의 무공은 어느 정도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벽리군 자신의 무공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거다. 싸우고 싶은 의욕조차 생기지 않으니.
남만 무공은 보잘것없다. 그것이 중원 무인들의 생각이었다.
대막이나 천축에는 이름난 무공이 있지만 남만 무공은 알려진 것이 없다. 소개되지 않았다기보다 뛰어난 무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진아도 그렇고 유구, 유회, 역석도 그렇고 살수 문파에 몸담지 않고 비무행을 시작했으면 지금쯤 명성이 자자하게 날렸을 자들이다.
“모진아의 무공은… 글쎄? 적어도 장문인과 버금가지 않을까?”
“어느 파 장문인이요?”
“…”
종리추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맙소사! 구파일방 장문인? 모진아의 무공이 그 정도로 높단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모진아의 무공이 오독마군의 대연신공이란 것을 벽리군이 알 까닭이 없다. 모진아의 무공은 일취월장했다. 남만에서 지낸 세월보다 중원에서 보낸 일 년의 기간이 더 큰 성취를 안겨다주었다. 구연진해의 아홉 가지 각법이 토대를 띠었고 하나로 묶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모진아는 외골수적인 성격이 되었다.
‘오독마군의 구연진해를 제대로 구현해 내야 돼.’
그에게 내려진 천명이었다.
모진아는 단철각에서 원음각으로, 원음각에서 천둔각으로… 또는 환영각과 수라각을 동시에 펼쳐내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자오각으로 변하기도 했다. 모진아의 각법은 예측할 수 없다. 옛날 오독마군의 구연진해가 모진아에게 계승되었다. 구파일방이 십망을 선포하고도 중원에서 밀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오독마군의 무공이 모진아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모진아의 무공은 추측하기 곤란했다.
“문제가 생기면 모진아에게 부탁해.”
“예, 예…”
벽리군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리고 새삼 모진아를 뜯어보았다.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데… 휴우!’
다 같이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이상해. 왜 난 아기가 안 생기는 거지?”
어린이 불쑥 말했다. 종리추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입 안에 든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엄마는 어땠어? 엄마도 힘들었어?”
벽리군은 눈을 둘 데가 없었다. 이야기에 같이 끼어들 수도 없었다. 더욱 가관은 구맥이다.
“아니. 잘 들었었는데? 했다 하면 아기가 들어서는 통에 하기가 겁날 정도였거든.”
“그런데 왜 난 안 되지?”
“흠! 때가… 되면 들어서는 거란다.”
계속 듣기 민망했는지 배금향이 나서서 말문을 제지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휴우! 이해하지 말자. 그냥 보고 듣는 거지. 그러다 보면 이해될 때가 있겠지.’
벽리군은 약간, 아주 약간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이어지는 비부의 말로 아예 끊겨 버렸다.
벽리군은 종리추를 쳐다보았지만 종리추는 체념한 듯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시부모가 되는 적지인살과 배금향도 음식만 먹었다.
‘이, 이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정말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 시간에 걸친 식사가 끝나고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도 벽리군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철이 없다고 해야 하나, 원래 그런 민족인가, 아니면 종리추가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풋!”
벽리군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문주님이 그렇게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봐. 기가 막혔을 텐데.’
“오랜만에 차라도 끓여 가야겠군.”
벽리군은 차를 끓였다. 종리추가 좋아하는 온도와 색깔을 갖추기 위해 불빛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다반을 들고 종리추의 집무실로 들어섰을 적엔 싸늘한 공기만이 그녀를 반겼다.
‘어디…?’
그녀는 깨달았다. 십사각 각주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듯이 종리추도 간다 온다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는 것을.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다반을 내려다보았다. 온도도 적당하고 향도 부드럽게 우러나왔는데.
오늘은 혼자서 마셔야 할 것 같다.
이기의형
종리추는 이제 갓 이기의형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기라는 놈이 어떤 형체를 띠었는지 알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으로 폭출되기에 어떻게 나가는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이기의형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 보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속에 흐르는 기를 느끼지 못하고 조절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공에 입문하여 내공을 수련하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좀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서면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그런 것처럼 이기의형도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내리라.
종리추는 이기의형을 펼쳤다. 살수는 죽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타인을 죽이듯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한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다. 사람이 되었든 물질이 되었든 목숨을 내맡길 만한, 흐트러지는 의지를 굳건하게 잡아 줄 구심점이 필요하다.
신이다.
절대적인 신이다.
종리추는 신과 다름없는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어도 살문 문주만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 줘야 했다.
그렇다고 무공을 선보이는 것과 같은 행동은 우둔한 짓이다. 투지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은 절대 투지를 생기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가 심장을 꽉 움켜쥔다. 신이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마음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종리추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분운추월을 떠올렸다. 소고를 떠올렸다. 그들이 펼친 기운을 생각했다.
‘되면 좋은 것이고 안 돼도 최선을 다한 것이고…’
종리추는 한 번도 펼친 적이 없는 이기의형을 펼쳤다. 진기를 휘두른 다음 전신 무공을 통해 일시에 방출했다.
실제로 진기가 방출될 리는 없다. 단지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아니다. 실제로 방출되었을 수도 있다. 몸 안에 진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범인처럼 진기가 방출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기의형은 존재한다.
종리추는 십사각 각주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을 보고 이기의형의 존재를 느꼈다.
종리추의 몸에서 빠져나간 강한 기운은 십사각 각주들에게 영향을 미쳐 투지를 소멸시켰다.
‘분운추월이 펼쳤던 이기의형과 같은 종류일까?’
아직은 이기의형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종류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확인했다.
하녀와 시녀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종리추에게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무지막지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사슴이 호랑이를 만났듯이, 개구리가 독사 앞에서 움츠리고 뛸 생각도 못하듯이.
그런 신위를 보이지 않았다면 시녀와 하인들 거의 대부분이 살문을 빠져나갔을 게다. 아주 심약한 자는 남아 있어도 곤란하지만 빠져나가도 곤란하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고, 약삭빠르고, 배포가 있는 자들은 남아서 도와줘야 한다.
종리추는 이번 일로 두 가지를 얻었다. 이기의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문파를 정예화시켰다.
‘이제는 싸울만해, 어느 문파하고도.’
그는 확신했다.
종리추는 신법을 펼치지 않고 마차를 빌렸다.
두두두두…!
마부는 시간이 돈이라는 듯이 힘차게 말을 몰았다. 종리추는 편안하게 등을 기대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창밖으로 파란 물감을 들여놓은 듯한 하늘이 높게 솟아 있다. 산에는 노랗고 붉은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논에는 누런 벼 이삭이 고개를 떨군다.
올해는 농사가 제법 괜찮다. 삼 년 내리 흉년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는 천금 같은 벼 이삭일 게다.
‘영원히 머물 것 같던 여름도 지나가는군. 이제는 완연히 가을이야. 하긴 벌써 구월 중순이니…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지. 오면 가고 가면 또 오고…’
무심히 창밖을 쳐다보던 눈길에 메뚜기를 잡는 소년들의 모습이 비쳤다.
“잠깐!”
종리추는 불쑥 소리쳤다.
“많이 잡았니?”
“엄청 많아요. 이거 구워 먹으면 엄청 맛있어요.”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이 두렵지 않은지 활짝 웃으며 다가와 잡은 메뚜기를 들어 보였다. 풀줄기에 꼬치처럼 꿰여 있는 메뚜기가 제법 많았다.
“언제 구워 먹을 거니?”
“왜요?”
“아저씨도 한두 마리 얻어먹게.”
“정말 먹을 거예요?”
“그럼.”
“그럼 지금 구워 먹죠.”
아이들은 서슴없이 나와 길가 한쪽에 모여 앉았다. 검게 오그라든 메뚜기는 고소했다. 입 안에 넣으면 아삭거리며 씹히는 맛이 있고, 입 안에 가득 퍼지는 향기도 느껴진다.
“몇 살이니?”
“아홉 살이요.”
“전 일곱 살이요.”
아이들은 종리추와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선심도 크게 썼다. 메뚜기 중 큼지막한 놈을 서슴없이 내밀었다.
“너희도 먹어야지.”
“또 잡으면 돼요.”
종리추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아주 맛있구나. 정말 오랫동안 먹어본다.”
“많이 먹고 싶었죠?”
“어떻게 알았니?”
“급하게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섰잖아요. 그런데… 마차 좀 타봐도 돼요?”
금종수의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상단전을 최대한 열었다. 변검양부의 진기도 같이 끌어올려졌다. 상단전을 열면 열수록 중단전도 함께 열렸다. 혈암무극신공도, 무형초자의 천풍신공도, 오독마군의 대연신공도 덩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전신 모공을 통해 술술 풀려나갔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속에 돌멩이를 집어 던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으로 빠져나간 진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모공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감지되는데, 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망망대해에 던져진 조약돌마냥 흔적 없이 사라진다.
진기가 고갈되는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은 진기에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중단전을 단단히 붙잡아놓고 있다. 진기는 끊임없이 제공된다. 몸에서 방출되는 양만큼 미간으로 외기를 받아들인다.
“타보고 싶니?”
“네!”
“넷!, 타보고 싶어요.”
메뚜기는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아이들의 시선은 돈 많은 사람이나 탈 것 같은 고급 마차로 향했다.
“구운 것은 다 먹어야지?”
아이들은 한 무더기씩 잡고 입 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이기의형. 이것 역시 마음이다. 마음이 화를 내면 공포로 비쳐지고 사람을 담으면 편하게 받아들여진다. 아이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
종리추는 이기의형에 색깔을 심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이기의형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하고 정리를 할 요량이면 손에 잡히기 싫다는 듯 멀찌감치 물러섰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기의형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준비가 되어 있어야 찾아온다.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다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고 수련을 부단히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아직 멀었나?”
“이제 다 와갑니다. 해질 무렵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부가 연신 말채찍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흑죽림은 비극을 잉태한 대나무 밭이다.
‘오늘 흑죽림에서 죽을 사람이 많으니…’
종리추는 천천히 걸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검은 대나무가 발길을 가로막으려는 듯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쏴아아…!
바람에 휩쓸린 잎사귀가 호곡성을 뿜어냈다.
유천은 흑죽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검은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길손들의 발길을 잡아당긴다. 집집마다 흑죽 없는 곳이 없고 생활용품도 흑죽으로 만든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흑죽림은 단연 압권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대나무 숲이 야산 전체를 뒤덮고 있다. 한낮에도 흑죽림에 들어서면 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둡기도 하다.
흑죽을 켜는 사람이 보인다.
유천의 흑죽은 단단하고 변형이 잘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애호한다. 대적을 만들려는 예인이 있는가 하면, 빨래를 너는 장대로 사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대나무는 대나무이되 켜는 사람에 따라서 진가를 달리한다.
다른 사람들도 보인다. 흑죽림이 유천의 명소인만큼 조금 널찍한 공터를 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검을 찬 무인이 있는가 하면 시조를 읊는 유생도 있다.
흑죽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종리추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워낙 유명한 명소인지라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지만 유람 온 사람은 잘 찾지 않는 가파른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흑죽림 자체가 울창한 탓도 있지만 날이 어두워 어둠이 밀려들고 있다.
쏴아아…!
대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시원했다.
순간 시원하던 바람이 갑자기 갑갑하게 느껴졌다. 좁은 공간에 갇힌 듯 갑갑증이 치밀고 주위의 공기가 숨을 막아버릴 듯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공기 속에 퍼져 있는 피 냄새 때문이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자 한바탕 격전이 있었던 듯 황폐한 풍경이 나왔다. 시신도 보였다. 한 명은 등 뒤에까지 삐져나온 검을 끌어안고 엎어져 있었으며 또 한 명은 잘려진 대나무에 넘어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등을 뚫고 나오고 잘려진 흑죽은 배를 뚫고 나왔다.
시신 곁을 지나치며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을 쓸어주었다. 축 늘어진 팔은 건드리는 대로 흔들거렸다.
‘싸움이 있은 지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았어. 아직 삼경이 되려면 두 시진이나 남았는데… 살천문주가 계산을 잘못했군. 아니지, 그는 삼경에 맞추고 싶었으나 그럴 틈을 주지 않은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틀린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욱 많은 말을 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잘 발달된 근육은 사내가 몹시 빠르고 강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적어도 검을 뽑았으면 서슴없이 짓쳐드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리라. 돌덩이처럼 딱딱한 굳은살로 가득한 손바닥도 사내가 얼마나 열심히 무공에 몰입했는지를 대변해 준다.
‘십망에 버금가는 추적이군. 살천문을 제일 잘 아는 살천문주가 이 정도로 쫓긴다면… 누군가 뒤를 받쳐주고 있어. 훗! 개방인가?’
사태가 의외로 간단치 않다. 구파일방이 배후에서 조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여하고 있다. 살천문주는 살천문의 추적을 피할 자신 정도는 있었으리라.
구파일방이 배후에서 조종만 했다면 정말 그럴 수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직접 끼어들었다. 살천문주를 교체하면서 제거까지 하려는 속셈이다.
‘사정이 급하게 됐군.’
사람을 구하는 일은 너무 일찍 도착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 일찍 도착하면 종적이 드러나게 되고 늦게 도착하면 시간을 놓치게 된다.
적당한 시간을 계산한 결과 가장 좋은 시간으로 두 시진 전을 선택했다. 장소가 흑죽림이라 몸을 은신할 수 있는 곳이 많은 것도 좀 일찍 도착해도 괜찮다고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아니다. 좀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
종리추는 진기를 끌어올린 후 후각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피 냄새는 한곳으로 향해 있었다. 죽은 자들은 예상외로 많았다. 그들 손목에는 한결같이 독 오른 전갈 모습이 생생하게 문신되어 있었다. 살천문 살수들이다. 살천문 살수들 중에서도 초일류 살수다. 전갈 문신이 허락된 살수는 적어도 서른 번의 살행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처리해야 된다.
종리추는 시신 옆을 태연히 지나쳤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일지라도 무서울 때가 있다. 죽은 자는 천하 맹장이었어도 죽은 자일 뿐이다.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못하는.
쉬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당했군.’
종리추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일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음…!”
신음소리가 들렸다. 상대의 기습은 귀신도 속일 만큼 은밀했지만 모든 감각을 최고조로 일깨워 놓은 종리추의 귀는 속이지 못했다.
알고 있는 공격은 피하기 쉽다. 피하기 쉬운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이 고수이나 상대는 그러기에는 기력이 쇠잔해 있었다.
“살천문주!”
종리추는 상대를 알아봤다.
“크크! 너였구나. 약속을 지킬 줄 알았지. 너 같은 자는 약속을 지키거든, 미련하게.”
기습을 가했던 자는 살천문주였다. 그는 이지를 잃어가는 중이었다. 복부에 검상을 당해 삐져나오는 창자를 왼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그의 아랫도리는 흘러내린 피로 흥건했다. 이대로 놔두면 검상이 아니라 과다 출혈로 죽을 지경이었다.
아름답기까지 했던 백발은 수세미처럼 헝클어졌고 혈색 좋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다. 살천문주의 고초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살천문주가 방금 전에 전개한 일식은 극히 은밀했다. 극강한 고수가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정도로 살수로서 기본에 충실한 공격이었다.
“문주님과 전에 한 약속, 문주님을 위해 목을 걸어달라는 약속 이제 지킵니다.”
“크크크”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크크! 나갈 수 없어. 사방에 살수가 깔렸어. 크크! 여기는 지옥이야. 활염지옥.”
“한담은 나중에 즐기기로 하죠. 우선 점혈을…”
“아니, 맨 정신으로 가겠어. 죽을 때는 죽더라도 어떤 놈이 내 심장에 검을 틀어박는지 알고나 죽어야지.”
살천문주는 걸음을 떼어놓기도 힘들 지경일 텐데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검은 대나무가 갑자기 빼곡해졌다. 대나무가 너무 많아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크크크! 뭐라고 했나, 살천문은 먹이를 놓치지 않아.”
살천문주는 자신을 노리고 나타난 살수들이 보이지 않는지 자신이 일궈 놓은 살천문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삼십 명은 되는군요. 이해할 수 없어요. 초특급 살수는 양성하기도 힘든데, 문주님을 죽이더라도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된다면… 저 같으면 살려두는 쪽으로 방향을 틀겠습니다.”
“흐흐흐, 세상에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지.”
“언제부터입니까?”
“뭐?”
“구파일방으로부터 제약을 받기 시작한 게.”
“뭐, 뭣!”
“놀라시기는… 문주님답지 않습니다.”
“그런가? 허허! 살수 문파를 차리는 주제에 개파를 한답시고 천방지축 날뛸 때부터 배포는 있는 놈이라 생각했지. 한데 이제 보니 머리도 있는 모양일세.”
“머리가 있는 것을 알았으니 목을 원했겠죠.”
“크크! 좋아, 그럼 이 쓰레기들을 어떻게 치우겠나?”
흑죽림에 늘어서 있는 인원은 십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흑죽림 여기저기 숨어 있는 자들까지 합한다면 서른 명에 육박했다. 하나같이 은밀한 살인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다. 무공으로 겨루는 싸움이 아니라 오직 죽이기 위한 싸움이다.
“방금 머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머리로 치우죠. 쳐!”
“!”
흑죽림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밤새가 하늘을 날며 지저대는 울음소리가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아니, 또 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도 맑은 소리를 냈고 무수하게 쏟아지는 별빛도 반짝이는 소리를 토해냈다.
흑죽림은 아름다웠다.
살천문주는 분명히 느꼈다. 또 다른 소리가 있다. 신음소리…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소리.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떠는 육신의 소리… 살천문주는 소리를 귀로 듣는 대신 몸으로 느꼈다.
흑죽림에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죽이는 자, 죽임을 당하는 자… 모두 풀잎을 밟는 소리조차 흘리지 않고 있지만 분명히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쒸이익…!
흑죽림에 모습을 드러냈던 자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어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휘청거려야만 했다.
퍼억!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조그만 손도끼가 제일 앞선 자의 두개골을 깨뜨렸다. 어둠 속에서도 솟구치는 피 분수를 볼 수 있었다. 대낮처럼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는 대낮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종리추는 태연하게 뒷짐을 지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의 표상처럼 굳건하게.
“머리로 쓰레기를 치운다… 머리로… 허허!”
살천문주는 낙담한 듯 허허로운 웃음을 토해냈다. 그는 난관을 타개한다는 기쁨보다 살천문 살수들이 타 문파 살수에게 맥없이 쓰러져 가는 애통함이 더 큰 듯했다.
“알고 있었는가?”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몰랐습니다.”
“…”
“흑죽림 지형은 세세하게 파악했고 살천문 살수가 어느 규모로 동원되었는지는 몰랐습니다.”
“!”
살천문주는 하나를 배웠다.
살수들은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부심한다. 상대의 허실만 파악하면 거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또 사실 그렇다.
종리추는 반대다. 상대를 파악하는 것보다 지형을 먼저 파악했다.
누구나 지형을 먼저 파악한다. 하지만 지형을 세세하게 파악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하는 행동이다. 일단 움직였다 하면 지형은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기 마련이며, 몸은 적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목전에 적을 두고, 지형 때문에 꼼지락거리는 살수는 없다. 그런 살수가 있다면 준비성 없는 하급 살수가 분명하다.
종리추가 여타의 살수들과 다른 것은 끊임없이 지형을 파악한다는 점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 다음 움직인다. 열 번, 스무 번 확인한 다음 움직인다.
‘그러고 이길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있을까?’
종리추는 그렇게 한다. 지형을 파악하는 눈이 여타 살수들은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다른 살수들이 하나로 볼 때 서너 개를 볼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눈은 철저한 준비에서 나온다. 아마도… 종리추는 문파를 떠나오기 전에 도상으로 지형을 익혔을 게고, 실제 몸으로 부딪쳐 본 사람처럼 온갖 상황을 상상하며 움직였으리라. 지도 속에서, 머릿속에서.
소름 끼치도록 치밀한 준비가 그를 지형 속으로 숨겨준다.
‘평범하지만 살행에 익숙한 살수일수록 간과하기 쉬운 행동… 좋은 가르침이다.’
무공으로 겨루는 싸움이라면 다수의 인원이 효과를 발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살수들 간의 싸움은 누가 발견하느냐에 따라 목숨이 오간다. 더군다나 살문에서 온 이들은 수적으로도 밀리지 않은 듯하다.
쒸이익…!
채찍이 어둠을 갈랐다. 채찍은 흑죽에 부딪쳐 빙글 감기는가 싶더니 흑죽을 부러뜨리고 앞으로 나갔다. 찰나의 방심, 상대는 흑죽이 감기는 순간 아주 잠깐 방심을 했고 그것이 목숨을 내놓는 원인이 됐다.
‘지형뿐만 아니라 죽림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 살문이 이렇게 컸단 말인가!’
병장기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부산하게 들렸지만 비명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병기가 살을 파고들 때 토해지는 육음이 비명을 대신할 뿐이다.
흑죽림은 칠흑같이 어둡다. 살문 살수들에게나 살천문 살수들에게나 공평한 조건이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숨었다. 살문도, 살천문도 살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숨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죽는 것은 살천문 살수들이다.
보이지 않는다. 비명도 없다. 느낌이다. 느낌으로 살천문 살수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미리 와 있었어. 미리 와서 어둠에 눈을 익히고 기다리고 있었어. 난 움직였는데… 이들은 내 뒤를 쫓았을 게고… 아냐. 그럼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그냥 기다린 거야. 흑죽림 지형을 소상하게 파악해놓고 싸울 장소를 정해 놓은 거야.’
살천문주가 흑죽림을 만날 장소로 선택한 것은 단지 살천문 살수를 따돌릴 목적이었다. 흑죽림까지는 치열한 추격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흑죽림에 도착하면 울창한 대나무숲을 이용하여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흑죽림이라는 대표적인 명소 한 군데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천에 널리 퍼져 있는 흑죽림 전체를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다.
‘살문은 여기서 끝장 낼 심산이야. 추적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 놓을 심산이야. 살천문 살수…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해. 추적의 끈이 끊기는 거야. 여기서.’
살천문주의 생각대로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 다경도 채 못 되는 순간에 빽빽하던 흑죽림에 공간이 생겼다.
“가시죠.”
“…”
살천문주는 말없이 뒤따랐다.
‘주염유마…’
죽어 있는 자의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그의 목이 절반 정도 잘린 것으로 보아 도에 당한 듯싶다.
‘불광명도…’
또 다른 자의 얼굴도 봤다. 한때는 부처님을 모시던 불제자였으나 살천문에 입문하여 죽음의 사자가 된 자. 그는 땅에 엎어져 있는데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목이 완전히 한 바퀴 꺾인 것으로 보아 엄청난 신력에 당한 것 같다.
‘한 걸음 내디딜 때 다섯 번을 살피라고 했거늘… 쯧!’
살천문주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흑죽림이 다시 빽빽해지기 시작했다. 전과 같이 많은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위협은 되지 않았다.
‘여자? 여살수? 아냐!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이게 도대체…?’
모습을 드러낸 자는 살천문 살수들보다 훨씬 많아 오십여 명에 가까웠다. 그중에 눈에 들어오는 무인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아무리 뜯어봐도 무공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머리로 쓰레기를 치운다? 이, 이런! 미끼를 물었어. 이들은 미끼야. 미끼를 치려는 순간 낚시바늘에 틀어박힌 거야. 너무 몰랐어. 살문을….’
살천문주는 자신이 직접 살수를 인솔하고 살문과 부딪쳤어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종리추는 쳐다보았다. 그는 수하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나 또 배웠군. 살문을 무너뜨리려면 절대 약속 장소 같은 걸 말해서는 안 돼. 기습… 기습만이 살문을 무너뜨리는 방법이야. 그것도 살문이 머무는 곳에서는 안 되지. 전혀 낯선 장소로 유인해서 쳐야 돼.’
갑자기 복부가 끊어질 듯 쑤셔 왔다. 잊고 있었던 상처에서 아픔이 되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