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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90화


종리추는 흑죽림으로 나와 예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봉으로 가는가?
네.
그쪽은 걸려들었다 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천하 험지인데 괜찮겠는가?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듭니다. 누가 악조건을 이겨내느냐에 달려있죠.

나 같으면 천성으로 발길을 돌리겠네.
언제부터입니까?
뭐가 말인가?
구파일방으로부터 제약을 받기 시작한 게. 아직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음…!

살천문주는 신음부터 토해냈다.

살천문이 만들어질 때부터… 라면 믿겠는가?
믿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종리추는 소림 방장과의 면담을 떠올렸다.

“아직은 지켜보는 중이다. 조정할 일이 생기면 사람이 올 것이다. 안 되겠다 싶으면 십망을 선포하든가, 살천문처럼 문주를 교체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멸문을 시키리라.”

살수 문파는 구파일방이 묵인해 줄 때만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당금 무림의 현실이다.

문주님을 왜 죽이려 하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묻지 말게.
간단하군요.
진리는 늘 간단한 것에 있다네.

살천문주는 힘들어했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예봉 정도에 허덕일 사람이 아니다. 그의 복부를 길게 찢어놓은 검상만 아니라면.

쉬어갈까요?
그러지. 좀 힘들군.

창자가 삐져나올 정도로 심한 상처이다. 금창약을 바르고 옷가지를 찢어 대충 여며놓았을 뿐 제대로 된 치료는 하지 않은 상태다. 힘든 게 당연하다.

종리추와 살천문주는 개울로 내려갔다.

상처를 치료하시지요.
내가 하라고? 허! 고약하구먼, 아픈 사람에게 직접 치료하라고 하다니.

종리추는 빙긋 웃어 보인 후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예봉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았지만 뿌연 운무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험산을 가렸다. 종리추는 예봉을 뒤지며 동물의 분뇨를 수거했다. 산에 널려 있는 것이 동물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은 배설을 하건만 정작 배설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토끼같이 작은 동물이 아니라 큰 동물의 배설물이 필요했다.

종리추는 지도에서 본 예봉의 지형을 떠올렸고, 큰 동물이 다님 직한 통로를 찾았다.

이 산에 곰이 있나?
험한 바위로 가득한 예봉이건만 곰의 배설물이 쌓여 있다.

종리추는 웃옷을 벗어 곰의 배설물을 담았다. 전신을 활짝 열고 피 냄새를 쫓았다. 살천문주가 흘린 피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걷기는커녕 혼절했어도 진작 했을 만큼 많은 피를 흘렸다. 살천문주는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극강의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게다.

핏자국 위에 곰의 배설물을 덮었다. 핏자국을 지우는 정도로는 안심하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개의 후각은 속이지 못한다. 천천히… 빠짐없이 핏자국이 있는 곳은 모두 곰의 배설물로 덮어 나갔다. 살천문주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개울까지 왔을 때는 쌀 반 가마 분량의 배설물이 모두 소용되었다.

이제부터는 피를 흘리면 안 됩니다. 꽉 여며놓으세요.
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 눈에는 이게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로 보이는가?
아뇨. 검에 베인 상처로 보이는군요. 맞습니까?
허… 허…!

살천문주는 기가 막힌 듯 헛바람을 토해내다 눈을 부릅떴다. 종리추가 행낭에서 긴 대롱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롱 한쪽을 열자 뱀 머리가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그게 뭔가?
뱀입니다.
아, 뱀인 줄은 알아. 그 뱀으로 도대체 뭘…
문주님, 뱀에 물린 적은 있습니까?
아니, 그런 적은… 그럼 그 뱀으로 나를…
한번 물려보시죠. 의외로 아프지 않습니다.
뭐, 뭐얏!

살천문주는 기겁을 했지만 종리추가 허벅지에 뱀을 갖다 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게다. 뱀이 입을 쩍 벌리는가 싶더니 허벅지를 꽉 깨물었다. 아팠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사람들은 왜 뱀에 물리면 따끔거린다고 할까? 이렇게 아픈 것을.

무슨 뱀인가?
독사입니다.
제길! 이건 말이 통해야 살지. 독사인 줄은 나도 알아! 내 말은 무슨 독사냐고.
이놈 이름을 물으시는 거라면… 아마도 혈안사라고 할 겁니다.
혀, 혈안사!

살천문주는 크게 놀랐다. 그제야 뱀의 눈을 쳐다보았는데 정말 핏빛처럼 붉다. 뱀의 눈은 섬뜩할 만큼 차갑다. 비정하다고 해야 하나? 혈안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한 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이 뱀이 나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죽일 요량이면 확 달려들 것이고 살릴 요량이라면 다른 데로 기어갈 게다. 삶과 죽음. 혈안사의 차가운 눈빛은 오직 그 생각밖에 나지 않게 만든다.

이, 이건…!
혈안사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살천문주는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멈춘 듯하다. 사지는 부르르 떨리고 혈기는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종리추는 작은 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향긋한 내음이 콧속을 간질였다. 혈안사가 문 자리에 병에 들어 있는 붉은 물을 쏟아붓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종리추는 약초를 개어놓은 것까지 꺼내 혈안사가 문 자리에 붙인 다음 붕대로 꽁꽁 동여맸다.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직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어지럼증과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듯한 욕지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숨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살 만했다.

벼, 병 주고 약 주는 겐가?
그런 상처로는 예봉을 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봉을 넘어 사구로 갈 겁니다. 사구에서 모든 흔적이 없어지는 거죠. 앞으로 쉴 틈도 없을 겁니다.

혈안사의 독기가 아픔을 잊게 해줄 것입니다. 가시죠.
허! 독사에 물려 죽느니 차라리 검에 맞아 죽을걸. 괜히 네놈에게 목숨 구걸했나 봐.

살천문주는 벌떡 일어서는가 싶더니 화살 맞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종리추는 부축하지 않았다. 아픔을 챙겨주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고도 험했다. 독사에 물린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허벅지에 감싼 약초가 독기를 중화시키기는 하지만 어떤 약초를 사용했는지 흡수되는 속도가 더뎠다. 살천문주는 왼쪽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쫓아왔다.

예봉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직도 살아있는지… 살천문주의 몸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당당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더 뛰셔야겠습니다.

종리추는 인정사정 없었다. 나쁜 방향으로 보면 아픈 사람을 놀리는 것으로도 보였다. 사실 종리추의 무공 정도라면 살천문주를 업고도 예봉 정도는 가볍게 넘을 수 있을 텐데.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살천문주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인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쉬이익…!
종리추는 정말 부축도 하지 않고 경신술을 펼쳤다.

헉헉!
급기야 살천문주 입에서 단내가 풍겨 나왔다.

이제 됐습니다. 그만 쉬셔도 되겠네요.

살천문주는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더 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 오기를 부리기에는 몸이 너무 지쳤다. 종리추의 생각대로 혈안사의 독기는 효험이 있었다. 다리가 파랗게 물들고 퉁퉁 부어올랐지만 복부를 가른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경이 온통 다리로만 쏠렸다. 그때,

쉬익! 쉬이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리며 낯선 자들이 튀어나왔다.

음…! 숨어 있는 줄도 몰랐다니! 무공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데…

살천문주는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신법만 보고도 상대의 무공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방금 튀어나온 자들의 무공으로는 종리추를 감당할 수 없다. 종리추가 살심만 품는다면 열이 아니라 스물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 살천문주는 종리추의 무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무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거처에 잠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아니, 그런 일이 없었다 해도 높이 평가했을 게다.

이유는 없다. 왠지 종리추를 보고 있자면 무공이 강할 것처럼 생각된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무공이 강하다고 소문난 자들이라도 직접 검을 섞어보기 전에는 강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살천문주 역시 살수이기 이전에 무인이기에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그런데 종리추만은 무공도 보기 전에 인정하고 싶다. 왜일까?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쉽게 원인을 찾아내기 힘들 게다.

살천문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옷을 벗으시죠.
…?
입고 계신 옷을 다 벗으셔야겠습니다.
허! 백주대낮에 알몸이 되란 말인가?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천문주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낯선 자들 중에서 영민해 보이는 자 두 명이 앞으로 다가와 살천문주를 거들어주었다.

살문인가?
옷 수발을 들어주는 자들은 벙어리인 양 대답이 없었다. 얼굴표정도 바꾸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들이 할 일만 했다. 옷을 다 벗자 낯선 자들 중 한 명이 새 옷을 내밀었다.

철저하게 준비했군. 처음부터 모든 일을 지켜본 사람같이.

살천문주는 낯선 자들에게 몸을 내맡기고 종리추를 응시했다. 종리추는 낯선 자들에게 나무 밑동을 파게 한 다음 벗어놓은 살천문주의 옷을 묻었다.

‘피와 땀이 얼룩진 옷… 추적견을 피할 수 없어. 피만 묻었다면 묻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땀 냄새까지 배어 있으니. 일부러 땀을 흘리게 한 거야. 옷 묻은 장소를 들키게 하려고.’

또 눈길이 종리추에게 향했다.

‘옷 묻은 장소를 들키게 한다… 추적견이 찾아내면… 찾아내지 않은 것보다 더 혼란에 빠진다. 추적자들은 이 부근에서 적어도 한 시진은 소모하게 된다. 한 시진… 큰 시간이지.’

그에게 목숨을 달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거처를 침범한 첫 사내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종리추가 정말 자신의 목숨을 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하려고 해도 능력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구파일방이 뒤를 봐주고 살천문 최고 살수들이 맹렬히 추적하는데 구해줄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한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하늘은 그에게 천인을 보내준 셈이다. 그가 한 일은 살문을 인정해 주고 몇몇 사람들의 청부를 거둔 것에 불과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목숨을 얻게 됐다.

낯선 자들이 들것을 내왔다.

이제 편히 가시죠.
그래야겠군. 자네는 늙은이를 너무 뛰게 했어.
잊어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잊을 수 없지. 내가 거느리던 문파에, 수하들에게 개처럼 쫓기는 날인데 절대 잊을 수 없지.

낯선 자 중에 한 명이 주변에 분을 뿌려댔다. 냄새로 보아 송진 가루였다.

‘사람 냄새를 없애는군. 그때 살문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큰 싸움이 될 뻔했어. 살문을 적으로 돌리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지. 허허!’

“비운적검… 살천문을 유지하고 싶거든 살문을 건드리지 마시게나.”

표면상 이번 일의 주동자는 비운적검이다. 문주를 호위해야 하는 총호법이 검을 거꾸로 돌린 것이다. 그는 목숨을 맡겨도 좋다고 생각했던 사내다. 갓난아기 때 살천문에 들어와 친아들 못지않게 정성을 쏟았다. 그런 그가 다섯 아내, 여섯 아들, 열한 명의 딸을 죽였다. 폭풍처럼 일어나 순식간에 쓸어버린 치밀한 반란이다.

살천문주는 또 계산 착오를 했다. 약간은 준비할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가장 아끼는 넷째 아내와 열두 번째 자식만은 숨기려 했다. 평생 편히 살 수 있도록 기반도 마련해 두었고 방책도 일러두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들것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천문주는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푸른 하늘에서 먼저 죽어간 아내와 자식들을 떠올렸다. 반란이 있은 후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것이다.

살천문주는 자신이 어디로 옮겨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낮에는 이름 모를 곳으로 옮겨져 잠을 청했고, 밤이 이슥해진 후에야 마차를 타고 길을 재촉했다. 그나마도 창을 두터운 휘장으로 가려 어두운 밤하늘도 쳐다볼 수 없었다. 살천문주 곁에는 종리추와 더불어 의원 한 명이 생활을 같이 했다.

의원은 살천문주를 만난 후에는 약재를 구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살천문주의 상처를 보기라도 한 듯 정확한 약재를 구비해 왔다.

어떻게 알았는가, 내가 이런 상처를 입을 줄?
몰랐습죠.
그럼…?

의원은 종리추를 힐끔 쳐다본 후 말했다.

“상처를 입지 않으면 모르지만 입는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살천문주의 병기는 검. 문주의 병기로 목숨을 거두는 것이 예의이니 아마도 검상을 당했을 것이라고…”

그렇게 들었단 말이지?
그렇습죠.
적지인살이 사부라고 했나? 적지인살을 다시 봐야겠군. 뛰어난 살수였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이렇게 큰 그릇으로 다듬어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종리추는 늘 생각에 잠겨 있다. 눈을 반쯤 내리감고 시선을 단전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운기행공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되지만 운기행공을 한다고 보기에는 집중도가 약해 보인다. 단순히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종리추가 불쑥 물어왔다.

바… 람… 소리?

귀머거리가 아닌 다음에야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왜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일까?

바람 소리가 맑군요.
마, 맑아? 바람 소리가?

살천문주는 귀를 기울여 바람 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에서 터져 나오는 덜그덕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살천문주는 종리추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쥐를 부릴 수 있다고 했다.

잘하면 달빛이 쏘아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하겠군.
역시 맑죠.
…응?
바람 소리, 달빛 소리 모두 시시때때로 바뀝니다. 중간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이 달빛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전달해 줍니다. 꽃이 말하는 소리도, 바위가 말하는 소리도 참 맑군요.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달빛 소리, 꽃이 말하는 소리, 바위가 말하는 소리…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단 한 종류의 인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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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천문주는 자신이 미친 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부터 길들인 습관인데 전 피로하거나 조급하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는 소리를 듣습니다. 자연의 소리. 몸에서 악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아주 편안해집니다. 원한, 분노, 고통… 견디기 힘드실 테지만 소리를 들어보세요. 아주 좋습니다.

이, 이것은!
살천문주는 놀랐다. 심장이 뛰고 살이 부르르 떨렸다.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공이 조화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검은 쇠붙이에 불과하고 봉은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손에 닿는 것은 그것이 설혹 모래알일지라도 병기가 되리라. 살천문주는 비로소 종리추가 강해 보이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는 적당히 강해 보인다. 터무니없이 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조금 더 수련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느끼게 만든다. 터무니없이 강해 보이면 사람이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다. 너무 물러 보이면 무시하거나 핍박한다.

종리추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사람을 가까이 있게 하고 친근한 감정이 우러나게 한다. 천지자연이 조화를 이루듯 진기가 자연히 우러나와 그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조화지경! 이것이 진정 조화지경…! 어쩌면 … 훨씬 강할지도. 이런 나이에… 믿을 수 없어. 조화지경에 이르려면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경륜도 있어야 돼. 세상 단맛 쓴맛 모두 맛보고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돼.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들어서지 못했거늘… 아냐,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말 한마디에 조화지경을 생각한다는 게 우습지.’

살천문주는 애써 부인했다.

동이 틀 무렵 마차는 허름한 장원에 도착했다. 옛날에는 성세를 누렸을 장원이나 지금은 퇴락하여 처마 밑에 거미줄이 가득한 장원이었다. 담도 군데군데 부서졌고 지붕도 낡았다.

살천문주는 부축을 받으며 대청으로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은 대청, 그 안에는 낯선 자들이 십여 명이나 앉아있었다.

얼마나 노고가 크셨습니까? 먼 길에 수고하셨습니다.

낯선 자가 일어서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살천문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오랜만입니다.

이번에는 종리추에게 한 말이다.

준비는?

종리추는 대뜸 하대를 했다. 살천문주는 그게 또 이상했다. 살문 문도라면 오랜만이라는 말을 할 리가 없고, 문도가 아니라면 하대를 받으면서 일을 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일이 아니고 구파일방까지 개입된 살천문 사건에.

다 마쳤습니다. 여기라면 앞으로 일 년은 버틸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과 귀를 번뜩여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자는 여전히 공손했다.

이것으로 약속은 지켰습니다.

종리추가 최후통보를 했다. 살천문주는 자신이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른 문파도 아니다. 개방이다. 개방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는 살천문에 흘러 들어가고, 비운적검은 어쩔 수 없이 살수들을 보낸다. 살수들이 죽어갈수록 살천문의 힘이 약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이목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 꿈같은 이야기다.

저 사람은 못 보던 사람인데?

종리추의 눈이 어둠 한구석을 향했다.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살천문주의 눈에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도 보였다.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

강자다!

살천문주는 한눈에 상대의 기도를 읽었다. 상대는 자신이 건강한 몸일 때도 상대하기 벅찰 만큼 강해 보인다.

소개하지요. 저희 문주님이십니다.

문주… 서 있는 자는 문주라는 말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종리추의 첫마디는 담담하게 앉아 있던 사내의 어깨를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있죠.
그런가? 난 기억에 없네만…

종리추가 사내 옆으로 다가갔다.

망주의 말에 따르면 한성천류비결을 시전했다고 하던데? 일수비백비. 그 말을 듣고 많이 궁금했지.

망주, 일수비백비… 살천문주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냈다. 하오문에서 축출된 전대 하오문주다. 그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었다. 그것도 멀쩡하게. 젊은 나이에 하오문을 장악했고 십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문주의 자리를 지켜왔던 거목, 그였다.

부엉…! 부어엉…!
종리추는 난데없이 부엉이 소리를 냈다.

이, 이건!
창!

경악성이 터지며 지금까지 호의적이었던 망주 천은탁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하오문도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밀마. 어둠 속에서 사내의 눈이 빛을 토해냈다.

일수비백비와 밀마까지. 알 것 같군.

종리추는 품속에서 옥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모께서는 잘 계시냐?

하오문주의 말투가 온대에서 하대로 바뀌었다.

모친 되시지요. 잘 계십니다.

하오문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마도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을 게다.

그랬군. 하하하!

이야기가 편하게 돌아가자 망주 천은탁이 민망한지 슬그머니 검을 집어넣었다. 하오문주가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때 그 꼬마가 살문 문주가 되어 나타나다니. 적지인살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잘 키우는군.

하오문주도 살천문주와 같은 소리를 했다.

지금은 어머님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살혼부 살수로 명성을 날릴 때보다 훨씬 만족해하십니다.
그래야지.

종리추는 하오문주를 남겨두고 일어섰다. 살천문주도 부축을 받으며 거처로 정해진 별채 쪽으로 갔다. 망주 천은탁도 일어서고 하오문 향주들도 몸을 일으켰다.

하오문주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옥패를 만지작거렸다.

파아앗…!

종리추의 전신이 물고기처럼 비늘로 뒤덮인다 싶은 순간, 화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튀어나갔다. 짚으로 만든 인형은 고슴도치가 되었다. 머리 부분부터 발끝까지 촘촘히 비수가 꽂혔다.

일수일백비.

오랜만에 펼쳐보는 무공이다.

음…!
하오문주가 탄식을 토해냈다.

비슷한 듯하나 완전히 다른 무공이군.
그럴 수밖에요. 어머님께서 전수해 주신 무공인데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믿을 수 없군. 배 향주가 이런 무공을 전수하다니. 이 무공은 내 한성천류비결보다 뛰어나.

종리추는 이 빠진 부분은 자신의 심득으로 채워 넣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한 여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떤 때는 상상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다. 십 년이 지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환상이 깨질지, 연모의 마음이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한 여인의 모습을 퇴색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배 향주는 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못 봤군. 무재는 아닐지라도 무공을 생각하는 깊이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자네도 놀랍네. 난 한시도 쉬지 않고 한성천류비결을 수련했지만 이제 겨우 구성에 도달했을 뿐이야. 보아하니 자네는 완전히 습득한 것 같은데… 놀라운 자질이야.
그런 말씀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기분이 괜찮군요.

살천문주도 놀랐다. 종리추가 선보인 한성천류비결은 암기의 명가인 사천 당문이라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지고하다. 종리추가 일수비백비로 가문을 일으킨다면 중원에서 사천당문과 더불어 종리가라는 또 하나의 명가를 탄생시킬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자신은 막을 자신이 없다.

망주 천은탁과 향주들도 놀라움이 컸다.

그때와는 또 달라. 그때는 비수가 보였는데 이제는 아예 보이지도 않아. 번쩍거렸을 뿐이야. 이렇게 빠른 비수를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신법이 빨라도 비수 백 개를 일시에 던지면…

그들은 종리추의 일수비백비를 견식한 적이 있다. 놀라웠다. 무척 놀라웠다. 자신들의 문주 말고 또 일수비백비를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다. 문주와 똑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고 그 빠름과 정확성에 놀랐다.

지금도 놀랐다. 무공 성취는 꾸준한 노력의 결과다. 하루 이틀 반짝 수련한다고 성취도가 높아지는 예는 없다. 종리추는 아주 짧은 시간에 놀라운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다. 처음 일수비백비를 봤을 때와는 천양지차다. 그때도 강했지만 지금은 더욱 강하다.

하오문주는 인형에서 비수를 뽑아 유심히 살폈다.

자루를 없앴군.
날아가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중심을 잡아내기가 힘들 텐데?
속도로 대체했습니다. 비수의 폭을 좁히고 두께를 줄여서 속도가 더 나오게 했습니다.
그것도 방책 중 하나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자네 내력이 심후하기 때문이겠지. 이런 비수는 아무나 던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비수에 관한 한 하오문주와 종리추는 말이 통했다.

문주님의 일수비백비도 구경하고 싶군요.

파아앗…!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는 종리추의 무공과 사뭇 달랐다. 종리추의 일수비백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다. 전신에 비늘이 돋는가 싶은 순간 세상은 폭우로 뒤덮인다. 하오문주는 천수여래가 하강한 듯하다. 순식간에 팔이 열 개로 늘어난 듯 희미한 잔상이 보인다.

속도 면에서는 단연 종리추가 앞선다. 하지만 무공이란 속도만 가지고 따질 수 없다. 종리추의 일수비백비는 한꺼번에 터져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는 순차적으로 세상을 장악하여 종내는 숨 쉴 공간마저 없앤다.

한 사람의 움직임을 잡는 데는 비수 열 개면 족하다.

십비십향.

일수비백비는 십비십향으로 발전했다. 종리추는 일시에 열 개의 방위로 십비십향을 점했고, 하오문주는 일차적으로 십비십향을 펼쳐 상대방의 움직임을 유도해 내고 연속적인 비도로 숨통을 조인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몰라도 일단 움직였으면 방향을 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를 깨는 유일한 방법은 일수비백비를 펼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뿐이다.

대단하군!
살천문주가 감탄했다.

하오문의 무공은 무림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는 살천문의 무공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증명하지 못하는 문파가 살수들의 문파와 시정잡배들의 문파다. 무공을 증명하는 순간 그들은 죽는다. 마두, 효웅이 되어 무림 문파의 공적이 된다.

도둑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소매치기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기녀들의 무공이 뛰어나다면… 그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게 된다.

그것 참…! 똑같은 비도술인데 누가 낫다고 할 수 없구먼. 같은 무공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살천문주의 중얼거림을 하오문주가 탄식하며 받았다.

서로 맞부딪치면 제가 집니다.
문주의 무공도 놀라운데 겸양이시오.
겸양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저는 살문주의 무공을 본 다음부터 일수비백비 파훼 방법을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어요. 제가 십비십향을 펼친 순간 고슴도치가 됩니다.

음…!

살천문주는 하오문주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는 삶의 활력을 얻었다. 종리추가 펼친 일수비백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수비백비로 파훼하고 싶어 한다. 앞으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일에 몰두할 게다. 무공을 수련한다면 약간이나마 가능성 있는 파훼법이 떠올랐을 게다.

그 일수비백비… 펼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종리추가 말했다.

꼬꼬댁! 꼭꼭꼭…!
성난 닭들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목청을 돋웠다.

소복에게 닷 냥.

홍철은 서슴없이 검은 닭에 닷 냥을 걸었다. 몸집이 작지만 믿음이 간다.

시작!

신호와 동시에 닭 주인은 닭을 허공으로 날렸다. 닭들은 있는 힘을 다해 날개를 퍼덕였다. 투계에 나온 닭 중에 싸움 경험이 있는 닭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 번이라도 싸워본 적이 있는 놈은 정말 어쩌다 한번 구경하는 게 전부이다. 싸움 경험이 있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도 아니다. 많은 훈련을 받았어도 단 한 번의 싸움에 피투성이가 되어 닭집에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닭은 발톱에 새끼손가락만 한 칼날을 달고 싸운다. 부리로 상대를 쪼는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 몸을 띄워 발톱으로 할퀴는 싸움이다. 발길질 한 번에 발자국이 푹푹 패어 나간다. 가장 멋있는 광경은 발길질이 제대로 들어가 목이 싹둑 잘려 나가는 모습이다. 두 번째로 멋있는 광경은 닭이 죽어갈 때다.

투계에 돈을 거는 사람들도 닭이 어떻게 당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승부는 찰나간에 결정지어진다. 당한 놈은 언제 날개를 퍼덕였나 싶게 푸드덕 주저앉는다. 이긴 놈도 무사하지 못하다. 크든 작든 상처를 입게 되어 있고, 잘하면 한 번 더 나올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역시 닭집에 팔려나가는 신세가 된다.

그래!
홍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소복은 날개를 몇 번 퍼덕이지도 않았는데 상대 닭의 다리를 잘라버렸다.

파다닥…!
다시 날개를 퍼득였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기회를 잡았다 하면 놓치는 경우가 드물다. 싸움을 하도록 길들여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소복의 발길질에 상대 닭이 풀썩 쓰러졌다. 제일 멋있는 광경은 아니지만 머리를 모로 떨구는 모습이 멋있다. 소복은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놈은 다음번에 또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소복과 싸울 상대 닭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홍철은 닷 냥의 세 곱절인 열닷 냥을 받았다.

오늘은 시작이 괜찮은데.

다음 닭은 독귀라는 놈과 대생이라는 놈이다. 홍철은 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벌써 칼날을 발목에 매단 닭들은 상대 닭을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듯 기세를 올려댔다. 투계는 왕도가 없다. 그야말로 운이다. 부리로 쪼아서 이기는 생투계의 경우는 실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지만, 발목에 칼날을 달고 싸우는 사투계는 몸집이 크다고, 몸이 날래 보인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아무리 싸움을 잘할 것 같아도 위치를 조금만 잘못 잡으면 가슴팍에 칼날이 박히고 만다.

좋아, 이번에는 독귀!
홍철은 뼈만 남은 닭을 점찍었다.

독귀에 열 냥!

홍철은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목 안으로 잠기고 말았다. 그의 귓전으로 낯선 음성이 파고들었다.

“잘 가, 독심광마.”

아주 작은 소리였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속삭임이었다.

크윽! 빌어먹을! 어떤 놈이…!

생각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홍철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잠이라도 든 듯 고개를 떨궜다. 의자 밑으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계에 흥분한 사람들은 발 밑에 흐르는 피를 밟아대며 소리쳤다.

독귀에 석 냥!
대생에 스무 냥!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조금씩은 융통성을 가지고 있지만 박장궤만은 앞뒤 꽉 막힌 벽창호였다.

사람은 착실한데 너무 꽉 막혔어.
그러니까 이십 년이나 장궤를 맡고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잘렸을걸!
그럼 뭐 해? 말 못 들었어? 마누라가 해산을 했는데도 일하는 시간이라고 가보지도 않았대. 그것뿐이면 다행이게? 해산을 했으면 미역국이라도 끓여줘야 할 것 아냐. 널리고 널린 게 미역인데 글쎄 돈이 없다고 빈손으로 털래털래 들어갔대요.
조금 너무했지?
조금이 뭐야, 많이 너무했지.

사방이 온통 육지로 둘러싸인 하남성은 해산물이 귀했다. 강에서 생선을 잡고 새우를 잡고 하지만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건어물도 귀하고 비쌌다. 하지만 박장궤는 얼마든지 해산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해산물을 파는 어물전의 장궤였기 때문이다.

건어물이 아무리 비싸다지만 이십 년이나 장궤(회계: 장부를 맡아보는 사람)를 맡고 있는 박장궤가 미역 한 줄 얻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것이 아니면 미역 한 줄도 손을 대지 않는 벽창호였다.

오랜 세월 장궤를 맡아 이름조차도 박장궤가 되어버린 사내. 그가 주판을 달그락거리며 셈을 했다.

이상해. 셈이 안 맞아. 두 푼이 비는데…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매상을 기록한 장부와 돈이 틀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틀리고 있다. 하루 일과를 되짚어보았지만 두 푼이 새어 나갈 구석은 없었다.

‘아무 이상도 없는데 돈이 빈다…? 그럼 배수짓이군. 이곳 배수는 모두 아는데, 아는 얼굴은 없었고… 다른 고장에서 흘러온 배수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하오문의 영역은 뚜렷해. 그럴 리 없어.’

박장궤는 계속 주판을 달그락거렸다. 하나 셈을 하고 있지 않았다. 주판을 달그락거리는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밤손님의 이목을 잡아끌기 위한 가식 행동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셈을 하기에 부산했다.

하루 일과를 되짚어보자는 생각이 치밀었지만 고개를 내둘렀다. 벌써 다섯 번이나 되짚어봤다. 건어물을 팔 때의 상황을 일일이 생각해냈고, 건어물을 건네줄 때와 돈을 받을 때의 모습도 상기했다.

하자는 없다.

‘확실해. 배수짓이야. 이건 중대사건이다!’

박장궤는 주판을 밀쳐내고 벌떡 일어섰다. 순간 그의 눈이 촛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찾아냈다.

누구…

앞에 선 자는 씨익 웃었다.

‘저자… 기억나. 개봉 배문에서 제일 손이 빠른 자. 이름이 등천조인가 될 텐데… 개봉! 개봉 망주 천은탁은 전 문주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자! 사단이다.’

박장궤의 몸놀림이 달라졌다. 착실하지만 융통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꽁생원에서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내는 무림 고수로 탈바꿈했다.

후후후! 이름이 생각나는군. 등천조. 맞지? 무슨 짓이냐! 개봉을 떠나서는 안 되는 문규를 잊었을 리는 없고.
너무 짖어대.
뭣…?
개가 짖는 정도도 어느 정도지, 너무 짖어댄단 말이야. 지금은 밤이잖아. 밤에 그렇게 짖어대면 동네 사람들이 다 듣지.

이자가 뭘 믿고… 박장궤는 분노보다 경계를 했다. 한데,

슈욱! 경계심이 너무 늦었다.

컥!

박장궤는 신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물체를 바라봤다. 창끝이다. 거무튀튀한 창끝이 붉은 피를 머금고 튀어나와 있다.

후… 후후! 개봉 망주 천은탁… 그렇게도 말했는데…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당한다고…

박장궤는 자신을 찌른 자가 누군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했다. 등 뒤에 있는 자는 창이 두 개인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한 다른 창끝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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