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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91화


하오문 총단이 하남성 여주부 상점진에 있다는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다. 그곳은 또 하오문 하남성 모지가 널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오문의 세력권은 중원 전역에 널려있다. 각 성에는 망주를 휘하에 두고 있는 모지가 있고, 하오문주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지에 머문다. 하오문주가 사천성 모지에 둥지를 틀면 하오문 총단은 사천성 모지가 되는 것이고, 하남성 모지에 머물면 그곳이 총단이 된다.

역대 하오문주는 하남성 모지에 총단을 마련했다. 중원 전역에서도 가장 문물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려니와 중원 무림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기에 하남성에서 벗어나면 왠지 중심지에서 쫓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 하오문주도 하남성 모지에 자리를 잡았다. 밤이 깊은 시각인데도 상점진의 허름한 고택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망주 천은탁이 초조한 모습으로 대문 앞을 서성이는 모습도 보였다.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천은탁은 한껏 경계를 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으로 어둠 속을 쳐다봤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모습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휴우!
천은탁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두 명이었다. 등천조와 살문 십전각 각주인 산화단창.

등천조가 천은탁에게 말을 걸었다.

망주께서 직접 나와 계십니까?
이게 보통 일인가? 이 정도라면 해야지. 늦어서 걱정했네. 휴우! 일은 어떻게 됐냐?
여기 산화단창님이 깨끗이 끝냈습니다. 다른 쪽은 어떻습니까?
모두 도착했네. 어서 들어가게. 수고하셨소.

산화단창은 포권 대신 대답으로 대신했다.

등천조와 산화단창이 고택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지자 천은탁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후 대문을 잠갔다.

하오문주, 살천문주, 개봉 망주, 개봉 다섯 향주… 그들은 종리추를 쳐다보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전광석화처럼 치러진 살겁이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일을 벌일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는데, 종리추는 치밀하게 계획한 듯 순식간에 십은비를 해치웠다.

반란이란 문주만 해치운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이 어떤지 모르지만 하오문은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독립된 세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좋은 모지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문주를 죽이더라도 실패하게 된다.

십은비는 총단에 변괴가 발생했을 경우 각 모지에 반란 사실을 통지하라는 임무를 받고 있다. 단순한 통보가 아니다. 문주의 최후 명령인 반란 주모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과거 하오문은 문주 직위를 놓고 많은 부침을 거듭했다. 평생 천한 일만 하던 사람에게 중원 전역에 몇만 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문주가 된다는 것은 크나큰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싸웠다. 문주가 될 기회만 생기면 잡으려고 노력했다. 무공이 강한 자는 배분이나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하오문주가 되려는 양상까지 보였다. 반란이 일어날 경우 하오문주는 죽었다고 봐야 한다.

하오문의 무공이 무림에 두각을 나타낼 만큼 강했다면 개방이 구파일방에 포함되었듯이 하오문도 무림의 별이 되어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문파가 되었을 게다. 하지만 하오문은 이렇다 하고 내세울 무공이 없다. 단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이 모여 조그마한 권익이라도 지키고자 노력할 뿐이다.

하오문 모지들은 안정을 원했고, 쉽게 일으키는 상황을 없애고자 노력했다. 그런 상황인데 반란이 일어나면 무사할 리 없다. 하오문 모지들은 안정을 원했고, 쉽게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없애고자 노력했다.

십은비는 그런 상황에서 마련되었다. 그동안 모셨던 문주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문주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는 철칙이 세워졌다.

문주의 마지막 명령은 십은비가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반란이 일어나면 곧장 모지에게 연락하게 되어있고, 모지는 반란의 주모자가 누구든 그가 하오문주의 직위에 올라 무슨 명령을 내리든 십은비의 마지막 명령을 따르게 된다.

하오문주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

하오문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십은비를 제거해야 한다. 하오문도 중 십은비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은비들도 자신의 역할만 알 뿐, 다른 아홉 명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십은비를 제거하기는 쉽지 않다. 반란을 일으키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

이 자리에 있는 하오문주가 하오문을 안정시키고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그가 십이 년 동안 별 탈 없이 하오문주라는 자리를 지킨 힘이기도 했다.

현 하오문주는 반기를 쳐들 때 십은비를 간단히 제거했다. 문주밖에 알지 못하는 십은비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들의 거처는 또 어떻게 알았고, 그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없앨 수 있을까? 무공도 만만치 않았던 사람들인데.

의문은 종리추가 풀어주었다.

“하오문도든 아니든 모든 촉각을 문주에게 쏟아 붓고 있는 자. 그런 자를 어떻게 알아내는가? 사람의 행동은 똑같을 수 없습니다. 한데 똑같이 움직인다면 의심해 볼 만합니다. 문주가 다른 지방으로 갔을 때 같이 따라가는 자가 누군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선이 닿아있는 자를 보낼 수도 있겠고.”

이해가 되면서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인가? 설혹 한두 명이라도 그렇지,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낸 것이며, 하오문주는 바보란 말인가. 누가 뒤를 캐고 있는 것도 모를 만큼.

“반란이 일어나고 총단을 움켜쥐는 것은 순식간이죠. 모지가 사태를 알았을 때는 손쓸 사이도 없을 겁니다. 십은비를 마련했다 해도 가장 빨리 연락을 취해서 늦어도 보름 안에는 일을 해결해야 하죠. 모지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총단으로 모이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하나, 전서구. 문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자들 중에 비둘기를 기르는 자는 십은비라고 봐야겠죠.”

“총단을 알아내고 반년이면 됩니다. 천 명만 움직이면 반년이면 알아낼 수 있어요.”

처, 천 명!
놀란 사람은 살천문주다. 살천문에도 정보를 캐기 위해 부심했지만 천 명이라는 인원을 일시에 움직이지는 못한다.

“현재 그만한 인원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문파는 두 곳입니다. 하오문, 개방.”
한군데 더 있지. 살문. 무섭게 컸군. 살문이 그 정도라니…!

살천문주는 다시 신음했다. 종리추가 말한 식으로 전 문주를 몰아내고 문주를 차지한 현 하오문주도 놀랍지만, 그런 것을 알아내고 똑같은 방법으로 일시에 십은비를 제거한 종리추 또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살문의 정보력이 하오문이나 개방에 못지않다는 것을 말한다.

“현 하오문주가 하오문을 동원했을 리는 없고 …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개방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 개방인가…

이번에는 하오문주와 살천문주가 동시에 신음했다.

“개방이라고 할 수 없죠. 개방은 소식통만 빌려주었을 뿐, 실은 구파일방이라고 해야죠.”

음…!

이제 움직이셔야겠습니다.

종리추가 먼저 일어났다.

그날도 그랬다. 벌써 삼 년 전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단의 무리들에게 손쓸 사이도 없이 당했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비수들은 그날따라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 않던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배금향과 쏙 빼닮은 여인을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징후를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배금향과 너무 닮았다. 얼굴 모습부터 키, 몸매, 말하는 어투까지… 쌍둥이도 아니고 분신이라 믿어도 좋을 만큼 닮았다.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대로 움직여 준 결과 죽음 직전에 이를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살았다고 느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십은비. 모지들은 반란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구파일방이 나섰다는 것은 짐작하지만 하오문 전 문도를 도륙하지 못하는 한 모지의 행동을 막을 수 없다.

한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십은비는 자신이 당하기 바로 직전에 몰살당했다. 모지들은 소식을 듣지 못했고, 그들이 소식을 접했을 때는 소란이 가라앉고 총단이 완전하게 장악된 후였다. 뒤늦게 조작된 십은비가 나타났다. 십은비를 생각해 낸 하오문주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큰 구멍이다.

그들은 하오문주의 유언이라며 십여 년 전 살혼부 십망에 가담한 하오문도를 척살하라는 밀지를 보내왔다. 무려 이백여 명이 죽었다. 적지인살 일행을 탈출시키는 데 가담했던 사람들, 배금향 향주와 뜻이 맞았던 기녀들… 모두 죽었다.

구파일방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 살혼부 살수들이 십망을 벗어난 사실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탈출할 수 있었던 도주로를 분석하고, 하오문이 걸려들었다. 구파일방은 하오문주의 제거를 택했다. 물증이 있는지, 아니면 심증뿐인지는 모르지만 살혼부 살수들이 십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공표한 이상 대놓고 징계를 가할 수는 없었으리라.

하오문주에게 문주 직을 되찾아주는 것은 종리추가 갚아야 할 빚이다. 구파일방이 살혼부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오문 총단에 가려면 미로처럼 굽이진 골목을 돌고 돌아야 한다. 너무 음침해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골목도 있고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은 골목도 있다. 남의 집에 들어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골목마다 술 취해 자빠져 자는 자, 혹은 부랑배로 보이는 건달들이 어슬렁거려 여간한 담력이 아니면 발을 들여놓기 싫은 곳이었다.

“소리를 지르게 해서는 안 된다. 입에서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게 하라.”

공격 명령이었다. 후사도와 음양철극 모두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누…!

골목에 들어서기 무섭게 후사도와 마주친 사내는 입을 벙긋거리다 말고 픽 쓰러졌다. 등 뒤에서 꺼낸 소도가 사내의 복부를 휘젓고 지나간 후였다.

후사도는 쓰러지는 사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누가 말하라고 했니? 넌 입만 벙긋거렸잖아.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자, 조용히 가야지.

사내는 연신 입을 벙긋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눈동자에 힘이 풀리더니 스르륵 감겼다.

누구 집에 가세요?

음양철극은 할 말을 다 하게 만들었다. 손에는 쇠 심장이라도 가를 만한 병기가 들려 있지만 쳐낼 수 없었다.

제가 이 동네는 빠삭하거든요. 찾는 곳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두 푼만 주시면 돼요. 특히 밤에는 찾기 힘들어요.

죽여야 하나…

철극이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무정한 것이 사람을 죽이는 병기라고 하지만 콧물조차 제대로 닦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까지 무정할 수는 없었다.

집에 들어가 있거라.
에이 아저씨도 참 야박하네. 좋아요, 그럼 한 푼만 줘요. 누구 집 찾아요?
들어가지 않으면 혼난다.
알았어요. 들어간다고요. 성질낼 건 뭐예요!

소년은 투덜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쉬익!

허공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난다 싶었는데 멀쩡히 걸어가던 소년이 픽 고꾸라졌다. 음양철극은 미풍을 제지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었을 뿐, 해결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죽일 때는 무정해라. 문주님 말씀을 잊었군.”

후사도였다.

잊은 게 아닙니다. 무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유정이 되더군요.
유정이라… 덕분에 일이 복잡하게 꼬였어.

종리추가 입도 벙긋거리지 못하게 하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굽어지고 꺾어진 곳이 워낙 많은 골목길. 꺾어진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 저쪽에 사람이 있다면 말소리가 들렸을 경우 경종을 울리는 격이 된다.

살수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말이라면 혹시라는 말이다. 혹시라는 말처럼 필요 없는 말도 없다.

골목길 저쪽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음양철극과 소년이 나누는 말을 들었고 모습을 감췄다.

쒜에엑! 쒜액…!
화살이 비 오듯 날아왔다.

음양철극과 후사도는 직각으로 꺾여진 골목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고개만 내밀었다 하면 쇳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오는 통에 누가 쏘아대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골목 저쪽에 있는 자는, 혹은 자들은 대낮에 화살을 쏘는 듯 정확히 쏘아댔다.

이건 방법이 없어.

음양철극은 후회 막급했다. 한순간의 동정이 이런 사태를 불러왔다.

한 시진을 넘기면 십은비를 죽인 효과는 사라진다. 십은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하오문주가 알게 되면 끝이야. 서신을 쓰고 직인을 찍고 전서구를 날리면… 모지들은 십은비가 날린 전서로 알 테지.

종리추는 십은비가 죽은 사실을 하오문주가 알게 되는 시각으로 한 시진을 잡았다. 즉, 하오문주가 변괴를 알게 되는 시간에 목숨을 거두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말이다. 서신을 쓰고, 직인을 찍고, 전서구를 날리는 시간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런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이면 충분하니까.

틀렸어.

음양철극과 후사도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면 백 번이라도 내놓겠지만 지금은 한 사람의 목숨을 버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오문 개봉 분타는 오늘부로 제명된다. 망주 천은탁을 비롯한 향주 다섯 명은 한시빨리 중원을 벗어나야 한다. 하오문의 추적을 피하려면.

이미 하오문주는 사태를 파악했다.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정말 문주가 될 자격이 없는 작자다.

몸을 빼야겠다.
후사도가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렸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음양철극은 종리추를 볼 낯이 없었다. 처음으로 겪는 실패다. 그렇다고 마냥 있을 수도 없다. 골목으로, 지붕을 타고 하오문도는 속속 늘어나고 있다. 자칫 시간을 지체하면 자신들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안되겠어. 가자!

후사도는 음양철극의 어깨를 강제로 잡아당겼다.

폭멸살도는 어른 키만 한 대도를 움켜쥐고 의자에 앉아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의 무공은 싸움판에서 익혀진 것이라 실용성이 강하다. 본인 스스로 비무는 자신 없지만 싸움은 어떤 놈하고도 자신 있다고 큰소리칠 만큼 파괴적인 도법을 구사한다.

그는 싸움 냄새를 맡았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는 으레 그렇듯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르르하니 전율이 흐른다. 싸움을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다. 질 때의 고통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괴롭다. 하지만 이길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싸움을 즐기는 대다수의 사내들은 이런 맛 때문에 계속 싸움판을 기웃거린다.

폭멸살도는 전형적인 싸움꾼이다. 그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싸움판에 뛰어들어 대도를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 한다.

대도에 척 걸리는 인육의 촉감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쾌감보다도 진하다.

하오문주라는 직위는 많은 수하들이 있기에 즐겁다. 작은 왕국의 왕이 되어 존경과 공경을 받는 몸이 되는 것이니 즐겁지 않을 리 없다. 괴로운 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과 같은 때다. 싸움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는데 수하들에게만 싸움을 맡겨야 위신이 서니.

빌어먹을! 어떤 놈이 반란을 일으킨 듯한데 … 아이구! 몸이 근질거려 죽겠네.

폭멸살도는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싶었다.

그 시간, 권붕은 낯선 손님을 맞았다.

뉘시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인들이다.

빨리 문주에게 기별을 넣어라. 구감일이 왔다고 하면 아실 게다.
이자가 어디서 반말지거리를 해대는 거야. 혓바닥이 반 토막인가! 빌어먹을!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이야.

권붕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인 두 명이 두렵기는 하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는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럴 때 자리를 잘못 비우기라도 했다가 사단이 벌어지면 뒷감당을 못 한다. 목숨을 내놓거나 병신이 될 게 뻔한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자식이! 빨리 보고하지 않고 뭘 해!
호, 혹시… 다른 부에서…

권붕은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를 상기했다. 낯선 무인들이기는 하지만 서슬이 시퍼래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신패는 무슨 신패! 총단에서는 신패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몰라! 빨리 문주님께 보고나 하란 말야.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신패를 보여달라는 것은 그냥 해본 소리였다. 골목길을 통과할 때는 신패를 사용하지만 낯선 자가 총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주나 모지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예외는 없다.

그는 아무 재주도 없다. 배수 짓도 못하고 도둑질은 담이 약해 더더욱 못한다. 마차는 그럭저럭 몰 수 있지만 워낙 하기 힘든 일이라 하기 싫어한다. 그는 아무 재주도 없으면서 하오문에 몸을 담았다. 그가 맡은 일은 오직 하나, 누가 찾아오면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키는 임무다. 그 누가 되었든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그는 상대를 지연시킬 임무가 있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 그가 충분한 용채를 얻어 쓰면서 하오문에 기숙하는 이유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야. 이러다 정말 목이라도 잘리는 것 아냐.

권붕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안에서 사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가 방문자를 막고 있는 동안 숨어있는 자들은 방문자의 신분 내력을 알아내고 있을 것이다. 찾아온 용건이며, 어쩌면 대응 방책까지도 준비했을지 모른다. 하오문의 넓은 정보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공산이 크다.

휴! 살았군. 총호법께서 직접 나오셨으니. 휴우! 그런데 이놈들 도대체 누구기에 기세가 이렇게 등등해. 어디 총호법 앞에서도 그렇게 기세등등한지 보자. 분명히 간살스러운 목소리로 아양을 떨면서…

권붕의 생각은 뚝 그쳤다.

낯선 무인들과 총호법이 마주 섰을 때 공손한 태도를 보인 사람은 오히려 총호법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총호법은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구감일, 여긴 어쩐 일이야. 옆에 모시고 온 손님은 누구고?

폭멸살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물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소란이 일고 있는 바깥으로 달려나가게 될 것 같아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흥!

폭멸살도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반란은 없다. 아니 소란스러워졌다는 것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넌 좀 뭘 아는 것 같은데, 들어나 보자. 어떤 놈이 반란을 일으킨 거야?
개봉 망주 천은탁입니다.

구감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분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구감일은 옆에 선 무인을 가리켰다. 폭멸살도는 방금 전 자신이 던진 질문을 잊어버렸다.

십은비… 그들은 문주의 신변에만 관심을 쏟게 되어 있다. 기타 무림 동향이나 다른 정보를 수집할 임무는 없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모지들에게 전서구를 날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불쑥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반란이라니… 분명히 이상한 일이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옆에 서 있는 무인의 기도가 범상치 않아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누구요?
전에는 일수혈이라고 불렸는데, 기억하십니까?
무, 문주!

폭멸살도는 기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벌떡!

무슨 말씀을… 문주는 당신 아니오?
아, 아냐! 당신은 문주가 아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폭멸살도의 경악성은 낯선 사내의 행동을 보고 난 다음 침묵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일수혈이라고 소개한 사내가 얼굴에서 가죽을 벗겨냈다. 그러자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전 하오문주. 자신이 대도로 옆구리를 찍었던 그자…

흐흐흐! 살아있었군. 목숨도 모질게 질겨.

폭멸살도는 당황하지 않았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십은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감일이 왜 일수혈과 같이 있는지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안에서 솟구치는 혈기가 너무 뜨거웠다. 그는 싸움 냄새를 맡았고 즐기고 싶을 뿐이다.

폭멸살도, 하극상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널 하극상으로 처단해야겠다.
흐흐흐! 문주의 일수혈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 어디 한번 견식해볼까?

스르릉…!
폭멸살도가 대도를 뽑아 들었다.

싸움은 그들보다 다른 곳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구감일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총호법의 면전으로 날아가서 일각을 뻗어냈다.

쉬익!

총호법은 막 검을 뽑으려던 참이었다. 위기를 느낀 총호법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머리로 날아드는 일각을 피해냈다. 아니, 피해냈다고 믿었다. 허공에서 내지른 발길질이, 얼굴을 걷어차던 발길질이 문어발처럼 흐느적거리며 수직으로 뚝 떨어져 내릴 줄 누가 알았는가.

퍼억!

총호법의 몸뚱이는 워낙 큰 타격에 위로 솟구친다 싶더니 청석 바닥에 처박혔다. 상체를 뒤로 눕힌 것은 그의 의지였으나, 상체가 위로 튕기고 이어서 바닥으로 패대기쳐진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가슴을 쇠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느낀 것이 마지막 고통이었다.

구감일은 공격하는 기세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총호법의 머리를 향해 한 번 더 발길질을 했다.

퍼억!

머리가 뒤로 뚝 꺾였다. 그 충격에 목뼈도 꺾여 나갔다.

구감일의 신형은 꽃밭에 나는 나비처럼 대청 안을 누볐다.

퍼억! 퍽퍽!

곳곳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하오문주를 호위하는 십이호법은 상대가 아니었다. 복부를 걷어차는 발길이 위로 솟구쳐 얼굴을 걷어찬다. 이기각을 시전하는 듯싶더니 선풍각이 되어버린다.

구감일의 각법은 단순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각법이었다.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도 펼칠 수 있는, 도저히 절정 무공이라고 할 수 없는 각법이었다.

그러면서도 현란했다. 단순함과 단순함이 어울린 것뿐인데 방향을 종잡을 수 없고 막아낸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서 총호법을 비롯한 십이호법은 유명을 달리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저, 저것! 저것…!

폭멸살도는 방금 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환상인가 싶어 눈만 끔벅거렸다.

구감일은 십은비 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자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지금 구감일이 보여준 무공은 자신이 상대하기도 벅차 보이지 않는가.

십은비가 죽었어!

폭멸살도는 구감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구감일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처음 품었던 의문, 십은비인 구감일이 왜 이 자리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도 생각났다.

당했군.

오늘은 승리의 쾌감보다 패배의 고통이 기다리는 날이다. 폭멸살도는 대도를 고쳐 잡고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문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문주.
아직도 문주인가?
흐흐흐! 좋아, 일수혈. 저자와 싸워야 하나? 아니면 너와 싸울까?

흐흐흐! 난 어느 놈이든 상관없어.
죽을 것이기 때문에?
흐흐! 그건 싸워봐야 아는 일이고.
폭멸살도.
말해.
넌 기껏해야 향주나 될 놈이야. 망주나 모지가 되기 위해서는 무공도 중요하지만 머리가 있어야 돼. 싸움판에 써먹기는 적당하나 수하를 맡기기에는 불안한 놈이야.
흐흐흐! 맘에 안 드는 평가군.
네놈도 하오문도라면… 말해라. 누가 널 사주했나?
흐흐! 일수혈, 넌 똑똑한 놈이잖아? 스스로 알아봐. 찻!

폭멸살도는 성난 호랑이처럼 덤벼들었다. 일수혈은 천수여래가 되었다. 양손이 허공을 휘젓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어떻게 해서 손이 열 개로 불어났는지도 보지 못했다.

퍼억!

비수 한 자루가 미간을 파고들었다.

퍼억! 퍽퍽퍽…!

또 한 자루가 심장을 화끈하게 지졌다. 또 한 자루는 목젖을 관통했고 또 한 자루는…

컥! 컥컥…!

폭멸살도는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였다.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은 밑동 잘린 거목처럼 무너졌다.

하오문은 밤새도록 불을 밝혔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중 제일 먼저 할 일은 폭멸살도의 수족을 잘라내는 일이었다. 살문 십사전각 각주들에게 저항할 의사를 잃어버린 자들의 목을 베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밤새도록 살육은 계속되었다. 십사각주는 화상 세네 장씩 지녔고, 화상 속 인물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싸움이 아냐. 살육이야.

살천문주는 하오문주가 복위하는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종리추가 어떤 명령을 내리고 십사각주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종리추의 심복인 십사각주에게조차 말할 필요가 없는 일들은 말하지 않았다. 후사도와 음양철극은 성동격서의 계를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골목길을 뚫어야 하고, 그래야 하오문 총단으로 쳐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후사도와 음양철극이 싸움이 끝난 후에도 문주에게 쉰 소리 한마디 하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 중 하나다. 온갖 계략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면 하다못해 퉁명스러운 푸념이라도 내뱉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 않은가.

살문 살수들은 계략에 능통해.

살문은 무섭다. 살문의 힘을 빌린다면 자신도 살천문주의 직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하오문과 살천문은 입장이 다르다. 하오문주나 살천문주나 구파일방의 눈 밖에 벗어났다. 그래서 당한 모반이다. 하오문주는 문주로 복위할 수 있다. 그는 십은비의 허점을 알고 있으니 보완 조치를 하게 될 것이다. 구파일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당분간 일수혈은 하오문주의 직위를 누릴 수 있다.

살천문은 그런 조치도 없고, 인원도 구파일방이 염려할 만큼 많은 것도 아니다. 하오문을 몰살하려면 심각하게 숙고해야 하지만 살천문을 몰살하는 것은 밥 먹다가도 결정할 수 있다.

휴우!

살천문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지들은 전대 문주가 복위한 사실을 알고 오히려 다행스러워했다. 폭멸살도는 문주 직을 찬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신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일수혈은 하오문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표면적으로는 문주가 바뀐 문파 같지 않게 조용했다.

하오문주는 보고 싶지 않은 자의 방문을 받았다. 도관을 쓰고 도복을 입은 사람.

무당파의 현복이오.

마주 앉아 차를 마시기도 싫은 자다. 아니, 얼굴을 마주보기도 역겨운 자다. 현복 도인은 무당파 팔궁 중 태황궁을 맡고 있다. 그렇다고 궁주라고 하지는 않는다. 무당파는 장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직책을 부르지 않고 도호를 부른다.

“요수과의계율초를 읽어본 적이 있으시오?”

아! 피곤하다. 귀를 막고 싶다.

“인간의 육신에는 신이 있다오. 일정한 시간마다 하늘로 올라가 선악을 보고하는데, 백팔십 번 죄를 지으면 모라고 하여 가축이 잘 크지 않는다오. 백구십 번 죄를 지으면 무가 되어 병에 걸리고, 오백삼십 번 죄를 지으면 소흉이라… 사산아를 낳게 되죠.”

어떻게 이런 말을 태연자약하게 할 수 있을까? 필요할 때는 하수인처럼 부려 먹고 거침없이 문주도 갈아치우는 자들이.

“죄를 칠백이십 번 지으면 대흉,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낳게 되며 팔백이십 번 지으면 앙,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된다오. 천팔십 번이면 화, 재난을 만나 죽게 되고, 천이백 번이면 잔, 폭도에게 습격을 당하며, 천육백 번이면 구, 후손이 끊기고, 천팔백 번이면 색, 다섯 대에 걸쳐 불행해지지요.”

탁자에 놓인 차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번 사건으로 얻은 교훈이 있다면 타인과 같이는 절대 먹을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오문주께서 이번에 어려운 일이 있었던 것은 전부 죄를 범했기 때문이오. 다행히 구함을 받아 다시 문주에 오르셨으니 앞으로는 선행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차가 식습니다.

차를 권했다. 현복 도인은 힐끔 쳐다본 후 차를 마셨다.

“이번에 살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소만…”

이것이었군. 너구리 같은 놈들.

하오문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옅은 미소만 살짝 지어 보였다.

“살문은 살수 문파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소.”
야인으로 떠돌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겠구려. 이제 막 옛집으로 돌아왔으니 무얼 알겠소만, 우린 살문을 예의 주시하고 있소. 살문이 정말 살수 문파라면 십망을 발동시킬 생각이오.”

“살문과 쌓은 교분이 있다면 잊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제 막 문주에 복위했으니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게요.”

결국 살문과 교분을 쌓지 말라는 말이다. 그 말을 하기 위해 무당파 현복 도인이 직접 하오문을 방문했다?

살문이 신경 쓰인다 이거군.

살문이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교분은 끊어야 한다. 그것이 살문이 살고 하오문이 사는 길이다. 구파일방은 무림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살천문이 그랬고 하오문이 그랬듯 이번엔 살문주가 표적이 되어가고 있으니까.

충고 받들지요.

하오문주는 공손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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